〈 16화 〉 16. 만남이 악연 이었다
* * *
로이먼 사제님께 치료를 받고 오니, 오스틴이 사라졌어요.
분명 방금 전까지 로빈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데 말이죠... 마침 저쪽에 로빈씨가 앉아 계시니, 한 번 여쭤봐야 할 것 같아요.
"저기... 로빈씨. 오스틴은 어디로 간 건가요...?"
"아, 공녀님! 선배님이라면... 용사님을 따라 가셨어요. 잠깐 할 얘기가 있다고 그러셨던 것 같아요."
"그렇군요..."
오스틴은... 아마 용사님과 풀어야 할 응어리가 많아 보였어요. 잘 해결되면 좋을 텐데...
"아, 그리고... 그냥 로빈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저도 선배님처럼 평민이고... 로빈씨 라고 부르시면 조금 거리감이 느껴져서..."
로빈씨... 아니, 로빈이 저와 가까워지고 싶은 모양이에요.
하긴... 같은 파티원인데, 경칭을 쓰는 것은 조금 그렇죠.
"네, 로빈.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모쪼록, 저도 오르엔이라고 불러 주셨으면 해요."
로빈 역시, 저를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고 싶었던 모양이네요.
눈에 띄게 기뻐하는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아요.
"응! 오르엔, 나도 잘 부탁해!"
수도로 돌아가게 된다면 아카데미의 졸업을 준비해야겠지만, 졸업 이후에도... 이분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그나저나, 오스틴은 언제쯤 올지...
"...으응...?"
저 아이는 누구일까요...?
갑자기 오스틴이 용사님과 대화하고 계신 곳에서부터 걸어 오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로이먼 사제님께 다가가다가 멈칫 했어요.
...아무래도 피 냄새에 익숙해 지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죠.
결국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쭈뼛 쭈뼛 저에게 다가오네요.
"저... 오스틴 형이, 잠시 여기 있으라고..."
...꽤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는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조금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 * * * *
"어떻게... 어떻게. 너희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너희들이?"
"...오스틴, 조... 조금만 진정하고..."
내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토해내듯 말하자, 용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내 팔을 붙잡으며 흥분한 나를 가라앉히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그런 용사를 보는 내 속마음은... 뭐, 이제 와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희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됐어."
어떻게 나를 그딴식으로 대할 수 있었던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화가 나다 못해 신기 할 지경이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는데. 척후라는 역할이 그렇게 우스웠어?"
"오... 오스틴...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아니? 전혀 미안하지 않잖아. 내 자리를 얼마나 우습고 천하게 봤으면, 저런 애새끼를 척후랍시고 앉힐 수 있겠어?"
"아... 아냐...! 그런 게 아니야...!!"
모르겠다. 대체 이 여자의 말이 어디까지가 거짓말이고, 어디서 부터가 진실인지.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거짓말로 점철된 것은 아닌지.
이젠... 모르겠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뱉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마야와 이사벨의 걱정어린 시선이, 지금은 그렇게 나쁘게 다가오지 않았다.
적어도, 저 둘의 눈에는 거짓이 담겨 있지는 않았으니까.
용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용사의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는, 애절함과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거짓이 담겨 있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다.
이 여자의 모든 것을, 이제는 믿지 못하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녀들은, 어쩌다 이렇게까지 변모했을까.
"오... 오스틴... 제발..."
"내가... 매 전투가 끝난 뒤, 힘들었을 너희들의 뒷바라지를 해 주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런 게... 그런 게 아니..."
"아니면, 내가 너희들의 투정을 다 받아주기 시작했을 때부터?"
언제나처럼 하루를 끝마친 뒤 야영을 할 때가 오면, 모닥불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던 우리.
"...어쩌면, 처음 왕궁에서 만났던 것 자체가 악연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거면 된 거다.
누군가에게 잘잘못을 따질 필요 없이. 단순히...
"우리는, 만남 자체가 악연이었던 거야."
나는 말을 끝마치며 주저없이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스틴... 미안해. 내가... 내가 미안해..."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딱히 네 사과를 받아줄 생각은 없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이사벨과 마야도 똑같으니까.
굳이 용사의 사과를 받아줄 필요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내 바짓단을 붙잡고 애원하는 용사의 손을 슬쩍 풀어 주며...
풀어...
"흡!..."
...힘이 뭐 이리 쌔?
"...용사. 이거 놔."
"싫어... 오스틴이 내 사과를 받아 줄 때까지, 안놓을 거야."
"힘만 황소인 줄 알았더니, 고집도 황소 새끼 네. 빨리 이거 놔."
이 미친, 힘이 얼마나 쌘거야?
꼴에 용사라고, 내가 바지 끝자락을 붙잡은 용사의 손아귀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단단한 악력에 내 손가락이 먼저 부러질 것 같았다.
"이 씨발... 이거 안 놔? 어우 진짜! 힘이 뭐 이렇게 무식하게 쌘거야!"
"오스틴... 우리가 미안해... 제발..."
"아니, 난 너희 파티로 안 돌아 간다고!"
그렇게 용사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나와 옥신각신 하고 있으니, 별안간 그레이시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오늘은 이쯤하고, 슬슬 퀼른으로 돌아가지. 곧 해가 저문다. 오스틴, 다음에 다시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겠나?"
"아니, 난 이제 너희랑 다시 만날 생각 없..."
"미안하다, 오스틴. 검과 정의에 심장을 바친 기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진심으로 사과하지. 다른 파티원들도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은 것 같은데... 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나눌수는 없겠나?"
"...그래. 찾아올 수 있으면 찾아 와 보던가."
어차피 나는 곧 수도로 갈텐데, 용사와 똘마니들이 나를 찾던 말던 무슨 상관인가.
결국, 내가 억지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용사는 그제야 내 바짓가랑이를 움켜쥔 손을 풀어 주었다.
"자, 그럼. 마왕은 알아서들 잘 잡고. 퀼른에서 만나도 아는 척하지 말자."
그 말을 끝으로, 용사 파티를 등진 나는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젠 안녕이다.
...안녕 맞지?
* * * * *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 캄캄해진 공터에서 일행들이 쉬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모닥불과 텐트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보니, 내가 늦어질 줄 알고 야영 준비를 한 듯하다.
뭐, 나도 용사 파티와 하하 호호 웃으며 퀼른으로 함께 돌아갈 마음은 없으니까, 야영을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모닥불 곁에 앉아 휴대용 숫돌로 단도를 갈던 로빈은, 내 모습을 보곤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 나왔다.
"선배님! 용사님과는 잘 해결하셨나요?"
"어... 뭐, 어떻게 잘 해결 됐어."
로빈에게 건성으로 대답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로이먼의 옆에 앉아 로이먼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맥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 씨발."
쟤는 또 어떻게 해야 하지.
로이먼과 대화를 나누는 저 꼬맹이는,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다.
내 뒤를 이어 용사 파티의 척후 자리를 꿰차기에는, 아직 여리고 미숙한 아이이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맥스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오스틴 형. 이야기는 다 끝나셨..."
"야, 맥스"
"ㄴ... 네?"
나는 맥스에게, 일종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맥스가 저런 고생을 하게 된 것도, 내가 멋대로 용사 파티를 나온 탓이니까.
물론 내 호통을 들은 용사 파티 역시 맥스를 더 이상 척후로 쓰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되면 맥스는 갈 곳이 없어진다.
맥스의 등에 메인 숏보우를 슬쩍 보며,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너, 활은 얼마나 잘 쏘니?"
"화... 활이요...?"
"응. 네 어깨에 걸치고 있는 그 활 말이야. 쏠 줄은 아냐고."
보통 활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근력이 필요하다.
한번 당겨서 걸쇠에 걸기만 하면 되는 쇠뇌와는 다르게, 활은 활시위를 당긴 채로 조준을 해야 하기 때문에, 활을 계속해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 수준의 근력으로는 택도 없는 것이다.
"어... 아버지가 사냥꾼 이셔서, 어느 정도 쏠 수는 있어요..."
"...그래?"
이 아이를 용사 파티에 둘 수는 없고, 저렇게 어리버리 한 모습을 보니, 이대로 모험가 생활을 하게 두기에는 안 좋은 꼴을 보기 십상이다.
...로빈 이후로 들개는 들이지 않았지만... 이 아이에게 잠재력이 있기를 바랄 수밖에.
나는 옆구리에 멘 레인저 파우치를 열어, 밋밋하게 장식된 작은 단검 한 자루를 꺼내었다.
내 앞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맥스를 보고 피식 웃어 넘기곤, 그대로 내 손가락을 살짝 베었다.
"혀... 형?!"
내 돌발 행동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맥스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단검의 검 면에 내 피를 방울 방울 흘린 뒤, 밋밋한 단검집에 피가 묻은 단검을 철컥 집어넣었다.
검집과 단검의 틈 사이로 희미하게 붉은빛이 새어 나오고, 이윽고 단검집에 떠오른 사냥개 모양의 표식을 보곤, 그대로 맥스에게 건네주었다.
"지금부터 너는 내가 들인 들개다. 앞으로는 나를 선배라고 불러라. 부디 훌륭한 사냥개가 되길 바란다."
"들... 개요...?"
"서... 선배님?!!"
내가 맥스를 '들개' 로 들이자, 곁에서 단도를 갈던 로빈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게 달려들었다.
"아... 아니! 선배님!! 제가 선배님의 들개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렇게 막 줘버리시면 저는 뭐가 되나요!!"
"...아니, 얘는 그래도 나한테도 책임이 조금 있잖아."
"책임은 무슨 책임이요!! 하아... 이게 뭔가요... 제가 얼마나,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알기나 하세요?! 이러시면 저만 바보 같잖아요!!"
"...뭐, 맥스도 지금부터 노력하면 되잖아? 이대로 둘 수도 없고... 다른 놈들은 5마리씩 들이던데, 나 정도면 양반이지 뭐."
나는 달라 붙어오는 로빈을 떼어내고, 여전히 단검을 받아 든 채 멍하니 서 있는 맥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단검을 가지고 수도에 있는 레인저 훈련소로 가. 내가 준 단검을 보여주면, 아마 너를 받아 줄 거야. 왜, 레인저가 되기는 싫어?"
"제... 제가 레인저... 요...?"
맥스 역시, 3~4년만 지나면 로빈에 못지않은 훌륭한 레인저가 되어 있을 테니까... 나는 내 눈앞의 꼬마를 믿는다.
"맥스는... 덩치도 작고, 숏보우를 쓰니까 화력은 그렇게 좋지 못할 테니... 속도 위주의 싸움을 하겠네. 그러니까..."
옆에 꼭 붙어 있는 로빈은, 조금 심기가 불편한 것 같지만...
"앞으로 네 이명은 테리어(Terrier) 다."
오늘, 나는 새로운 들개를 들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