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17. 두 얼굴의 여인
* * *
오스틴이 떠나간 뒤, 벌써 어둑어둑 해지는 공터에 덩그러니 앉은 용사는, 허탈한 표정을 얼굴에 띄운 채로 산을 넘어가는 해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용사. 괜찮나?"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레이시는 걱정을 담아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그레이시의 손길을 힘없이 내친 용사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돌아가자. 밤이 되면 이동하기 불편하니까. 마야, 광원 마법좀 준비 해 줄래?"
용사의 무미건조한 말투에, 마야는 몸을 움찔하며 몸을 들썩였다.
어쩐지 용사의 말투가, 평소와는 다르게 서리가 낀 듯 차갑게 다가온 탓일까.
"...응. 알았어."
"좋아. 퀼른으로 돌아가자. 그레이시와 나도, 부서진 견갑을 수리해야 하니까."
그렇게 앞장서서 천천히 걸어 나가는 용사의 뒷모습은, 어쩐지 아슬아슬해 보였다.
살랑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처럼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용사의 모습에, 마야는 용사의 옆으로 다가가 용사의 손을 슬며시 잡아 주었다.
"...용사."
"내가... 내가 왜 그랬을까."
마야의 작은 손을 꼭 움켜쥐며, 용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내가 오스틴에게... 히극..."
용사의 축 처진 눈 꼬리 에서, 티 없이 맑은 눈물이 방울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스틴에게 했던 자신의 언행과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에.
그럼에도 오스틴이, 그녀들의 하대와 심한 언행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곁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난 정말로 미안한데... 진심으로 사과 한 건데..."
하지만, 오스틴은 결국 파티를 떠나갔다.
용사는 그러한 사실로 인해, 자기 자신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용사..."
그런 용사를 다독이며, 천천히 숲을 빠져나와 퀼른으로 향하는 용사와 일행들.
마야의 광원 마법이, 숲을 지나가는 그녀들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며 묵묵히 제 역할을 다 할 뿐이었다.
* * * * *
맥스를 들개로 들이고 난 뒤, 기분이 뚱해진 로빈은 데팔의 품을 뒤적거리고 있었고, 나는 날이 상해 버린 숏소드를 숫돌로 갈며 맥스와 잠시 대화를 나누던 참이었다.
삭 사악
"그래, 아버지는 모험가 셨구나."
"네. 언제나 잠자리에 들 때면, 저에게 모험가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어요."
"...개인적으로 너 같은 어린 친구들에게는 쇠뇌를 추천하고 싶지만... 뭐, 여태까지 활을 써 왔던 경험을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우니까... 경험이 실력이 되는 거다, 맥스. 뼈에 새겨 둬."
"네, 형..."
내가 앞으로 선배라 부르라고 말은 했지만, 나도 맥스도 서로에게 선배님 이라고 불리우고 부르기에는 너무 어색했기에, 맥스가 레인저에 소속되기 전까지는 형 동생의 호칭을 고수하기로 했다.
그렇게, 잘 갈린 숏소드의 날을 보며 흡족하곤 맥스와 레인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려던 찰나, 별안간 로빈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소리쳤다.
"선배님! 이 자식, 마나석을 가지고 있는데요?!"
"뭐?!! 그 말 진짜야!!!!!"
나는 날을 갈던 숫돌과 숏소드를 내팽겨친 채 로빈의 곁으로 한 달음에 달려갔다.
마나석이라니! 이게 웬 횡재야!!
"지... 진짜 마나석 맞지? 응? 가품 아니지?"
눈이 휘까닥 돌아간 채로 로빈에게 다급히 물으니, 로빈이 의기양양해 하며 콧김을 내뿜었다.
"이 영롱한 빛깔좀 보세요... 이게 어떻게 가품이겠어요!"
나와 로빈이 마나석의 영롱한 빛에 취해 눈이 풀린 채로 바보같이 헤실헤실 웃고 있자, 알렉시스 공녀가 슬며시 다가와 로빈의 손에 들린 마나석을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음... 마나석의 모양도 정교하고... 마나의 빛깔도 선명한 푸른빛이 감도네요. 이 정도 순도라면... 확실히 가품은 아닌 것으로 보여요."
"아...!"
알렉시스 공녀의 설명을 들은 로빈은, 감탄에 가까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대체 마나석에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느냐 하면... 마나석은 기본적으로 고급품 중에서도 초고급품 인 것이다.
보통 마탑이나 대대로 마법사 자리를 꿰차고 있는 귀족 가문들이 한 개에서 두 개 정도의 마나석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마나석에서는 마치 무한의 샘물처럼 마나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메텔 왕국 선정 마법사가 꼭 가지고 싶어 하는 물품 1위에 빛나는 물건이다.
마나석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순도와 마나석의 모양, 크기에 따라 제각기 값어치가 달라지지만, 데팔의 파우치에서 주먹 두 개만한 크기의 마나석이 튀어 나온 것이다!
공작가의 영애인 알렉시스 공녀의 눈이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나석... 그것도 진품이라니!
"데팔 이 새끼... 네 목숨만은 건질 수 있도록, 내가 영주님께 간청드리겠다..."
나는 아직도 혼절한 채 누워있는 데팔의 샐릿 투구를 아련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었다.
"오스틴 형제님. 마왕군의 잔당을 상대로 자비를 베푸시면 안 됩니다."
"너는 사지 자르고 산 채로 박제한다며, 이 미친 새끼야. 그거보단 낫지."
"...그것은 합당한 처벌이 포함되어 있는 처우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로이먼 저 또라이 새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다시금 마나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군단장의 오른팔이라면, 이런 고급품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지!
"서쪽 대륙은 마나석 광산이 있어서 그런가? 마나석이 우리 손에 넘어오는데, 아가일은 코빼기도 안비치네."
"마나석 광산이 있는 서쪽 대륙을 마왕이 점령한 것도, 전쟁이 힘들어진 원인중 하나라고 들었던 것 같긴 해요."
...이 정도 크기의 마나석도 가지고 있는데, 품 안에 더 값진 물건들이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로빈의 눈을 쳐다 보니, 로빈 역시 탐욕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데팔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로빈. 너 나랑 같은 생각 하고 있지?"
"...그냥 제끼죠, 선배님."
그래! 이건 값진 승리의 부산물이고, 정당히 우리의 몫으로 취할 수 있는 전리품이다!
로이먼이 마물들의 두개골이나 척추를 모으듯이 우리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가?
나는 고개를 가로 저어 잡념을 떨쳐 내곤, 곧바로 데팔의 갑주를 벗기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로이먼이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기는 한데, 철가면을 쓴 상태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갑주를 조이던 가죽끈을 풀자, 데팔의 건틀렛이 철커덩 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저렇게 무거운 창을 붕붕 휘두르면서, 팔이 생각보다 얇상한데?"
"그러게요... 역시 인조 인간은 적은 근육으로도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여 줄 수 있는 걸까요?"
"어째 피부도 새하얗고... 손가락 곱상한 거 봐라. 어떻게 굳은살 하나 없을 수 있지?"
갑옷을 입고 있을 때에는 정확한 체형을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건틀렛을 벗긴 뒤 드러나는 데팔의 여리 여리한 팔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팔을 주물러 보면, 물렁한 지방이 아닌 단단한 근육으로 빈틈 없이 꽉 차 있는 것이 손가락으로 느껴졌다.
"실전 압축 근육을...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이야."
그리 생각하며 건틀렛을 벗겨 내니, 로빈 역시 반대편 건틀렛을 낑낑 거리며 벗겨내고 있었다.
"끄응... 아니, 선배님. 이걸 대체 어떻게 빼내신거에요?"
"...넌 레인저에 있을 때도 말 했지만, 상체 근력을 조금 더 길러야 해."
"...저는 상체를 키우면, 이런 여리 여리한 몸을 유지할 수 없다구요. 저도 여자란 말이에요."
로빈과 잡담을 나누며 건틀렛을 이리저리 살펴보니, 과연. 건틀렛 역시 높은 강도로 만들어진, 아주 비싸 보이는 소재로 만들어 진 것으로 보였다.
새삼 서쪽 대륙을 통째로 차지한 마왕군의 재력에 감탄 하며, 나와 로빈은 뻑뻑한 데팔의 갑옷을 벗기기 위해 쉬지 않고 팔을 움직였다.
견갑을 벗기기 위해 로이먼과 맥스의 도움을 받고 나니, 확실히 성인 남성 치고는 좁은 어깨가 여실히 드러났다.
"...야. 얘 진짜 창 쓰는 애 맞냐? 이렇게 체격이 왜소한 남자가, 어떻게 그렇게 자유자재로 무거운 창을 휘두르지?"
설마 마나를 주입해서 신체를 강화한 타입인가?
마나를 몸속에 주입해서 인위적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것은, 대체로 마나를 능숙하게 다룰줄 아는 마법사가 아닌, 몸을 쓰는 기사나 전위 포지션의 전사들은 버티기 힘든 마법이다.
...역시, 마왕군의 기술력은 얕잡아 볼 수 없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벗겨낸 갑옷 파츠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고 보니, 어느덧 투구를 벗길 차례가 왔다.
"야... 이 새끼 얼굴은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 바커스는 질투가 날 정도로 잘생겼던데. 이거 인조 인간 아닌 사람들은 서러워서 살겠나."
"하나 둘 셋 하면 벗겨보죠! 자... 하나, 둘, 셋!"
데팔의 투구를 확 하고 벗겨내니, 가장 먼저 앙 다물린 붉은 입술이 눈에 보였다.
오뚝하게 솟아오른 코와 잘 정돈된 단발 머리, 촘촘하고 긴 속눈썹...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의 미인이다.
투구를 전부 벗기고 나니, 바커스처럼 아주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잘생긴 남자의... 얼굴...
...단발 머리?
"...어?"
"...어, 뭐..."
"...이게 무슨..."
나와 로빈을 비롯한, 주변에 모여 있던 다른 일행들 역시 우뚝 굳은 채 데팔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으응..."
가끔씩 미간을 움찔거리며 안 좋은 꿈을 꾸는 듯 신음을 내뱉는 데팔의 얼굴에서, 우리는 모두 눈을 뗄 수 없었다.
데팔이...
"...이 새끼 여자였어?"
데팔이 여자였다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