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18. 철과 피, 그리고 대화
* * *
이제는 완전히 새까맣게 변한 밤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는, 따스한 불빛이 퍼져나오는 모닥불.
타닥거리며 튀어 오르는 모닥불의 불똥이 반딧불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는, 그런 밤이었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모험을 하면서 가장 좋아했던 순간이 있느냐' 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지금 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평화롭고 아늑한 이 순간을, 지금 이 상황을 좋아한다.
나는 지난 3년간의 모험 생활 중 언제부터인가, 이 시간이 찾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된 것이었다.
어쩌다 이런 지루한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냐고 물어온다면... 글쎄.
용사 파티에 속하면서 함께했던 3년이라는 긴 시간속에서,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 지금 이 순간밖에 없었기에.
활활 타오르는 이 모닥불에 내 무거운 마음의 짐을 장작삼아 태우면...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질까, 하는 생각에.
하지만 언제나 모닥불 앞에서 엉덩이를 들 때면, 불은 내 마음의 짐을 채 태우지 못하고 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남는 것은, 미처 타지 못한 채 조금 그을려 버린 내 마음 이었다.
마치 상처를 불로 지져서 출혈을 막듯이.
그랬기에, 아마 더 힘들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제는...
“...따듯하다...”
그저 이 모닥불의 열기가 손바닥으로 느껴 지는 것에, 나는 만족했다.
손을 적시는 모닥불의 주홍빛 불빛과 따스한 열기를 느끼면서, 고개를 조금만 들면 빽빽하게 하늘을 수놓은 별빛들이 내 눈에 가득 들이차는, 이런 낭만적인...
“그대의 사지를 가를 때가 기대되는구나, 추악한 존재여. 내게 감미로운 비명을 들려주길 바라겠다.”
......아주... 아주 낭만적인, 그런 풍경.
이런 배경을 이불삼아 따스한 천막안에 몸을 누이면, 얼마나...
“흥... 나는 그딴 유치한 협박에 굴하지 않는다.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아라. 거짓된 우상을 믿는 어리석은 사제여.”
얼마나... 씨발, 까먹었네.
“...지금까지... 감히 정의로운 빛을 모독하는 존재들은, 모두 이 손으로 직접 흙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각오는 되어 있는가, 추악한 존재여.”
아무튼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불쏘시개가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고 고대하던 저녁 식사 라는 것이렸다.
...
...?
어째 정신이 오락가락 하네.
방금 한 말은, 잊어 주길 바란다.
아무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쩝. 늑대개구리 꼬치 먹고 싶다.”
“아...! 그 늑대개구리 꼬치 라는 것은... 저도 아카데미 근처 시장 거리에서 몇 번인가 먹어 본 기억이 있네요. 확실히 맛있었죠.”
“그쵸?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데, 제가 들은 소문으로는... 용사님은 늑대개구리 꼬치를 드셔보신 적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뭐, 개구리는 도저히 못 먹겠다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하는 인간은 감정이라는 것이 없는 미친놈 이거나,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그런 사람들 뿐 일 것이다.
갑자기 횡설수설을 하는 바람에 말에 두서가 없었지만, 결국 이 또한 내 앞에서 고즈넉하게 타오르는 모닥불과, 저 밤하늘의 별빛들이 내 감수성을 폭발시켜 버린 탓이겠지.
그냥 이대로. 이대로...
"크윽... 보아하니 아직 어린 모양이다만, 내가 누군지나 알고 이러는 것이냐?"
"죄... 죄송해요...! 그치만, 오스틴 형이 시킨 일인걸요... 아! 너무 날뛰지 마세요! 그러다 손목에 상처나요!!"
...이대로 시원한 에일이나 한잔 탁 때리고 싶다. 개 같은 거.
우수에 젖은 눈으로 모닥불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맥스가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저... 오스틴 형. 준비 다 됐어요...”
“...어? 어... 그래. 수고했다.”
지금 이 평온한 순간을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다. 뭐, 일단 눈앞의 골치 아픈 일부터 치워야겠지.
나는 엉덩이를 훌훌 털고 일어선 뒤, 두 팔과 다리가 묶인 채 씩씩대는 데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갑옷을 벗으니 드러난 데팔의 탄탄하지만 유연한 몸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하체와 상체.
“갑옷을 벗으니까 이제야 좀 여자 체형 같네. 저런 무겁기만한 갑옷을 입고 다니니까, 남자인 줄 알았다니깐...”
“...닥쳐라, 애송이... 연막같은 비겁한 방법을 쓰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정정당당하게 싸울 생각은 안 하고 기습이나 하던 년이 할 말이냐?”
“...그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철제 머그컵을 내려놓은 뒤, 데팔의 앞에 앉아 잠시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데팔의 시선에 비웃어 주고, 손뼉을 짝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대화를 시작해 볼까?"
참고로 나는, 심문 점수를 만점을 받고 레인저에 입대했다.
* * * * *
“그래서... 우선 이름과 소속은?”
내가 적을 심문하거나 대화를 시도할 때,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것이 바로 적에 대한 정보와 신상이다.
일단 적의 이름과 소속을 듣고 난 뒤, 내 머릿속에 꽉 들어찬 적들에 대한 정보와 대조해 싸울 만한 상대인지 판가름 하기 위해서.
이번 경우에는 이미 데팔의 신상에 대해서는 대충 알지만, 그래도 내 첫 질문은 일종의 루틴처럼 항상 이것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데팔에게 이미 알고 있는 정보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나를 알면서도 그런 것을 물어보는 건... 나를 조롱하기 위함인가?”
아무래도 조금 오해를 산 모양이다.
초장부터 분위기가 씹창이 나버리면, 이후의 대화에 차질이 생기는데.
나는 급히 손사래를 치며 데팔의 질문을 부정했다.
“하하... 아냐 아냐. 이건 뭐랄까... 심문을 할 때 가장 먼저 물어 봐야 하는... 일종의 루틴? 고정 질문? 이라고 해야 되나. 그런 거야.”
다행히도, 내가 굳이 조롱을 할 이유는 없다고 느낀 모양인지, 데팔은 나를 째려보던 눈길을 조금 누그러뜨린 채 턱을 까딱였다.
분위기가 씹창이 나버리는 것은 피했군.
“뭐... 롬팔리아 습격대 대장, 데팔. 아가일이 직접 창조한 두 명의 인조 인간 중 하나... 창의 인형 데팔, 아가일의 손톱 데팔... 창을 이쑤시개처럼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푸흡...!”
염병, 별것도 아닌 부분에서 웃음이 터져 버렸다.
“이... 이쑤시개... 크흐흐...”
“...감히... 비웃는...”
내가 계속해서 실소를 흘리자, 데팔은 얼굴이 푹 익은 채로 나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데팔 역시, 이쑤시개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소문은 부끄러운 모양이다.
“아니. 씨발... 흡... 비웃은 게 아니라. 그, 뭐냐... 푸흡... 푸하하하!!!”
아니, 이쑤시개처럼... 흐흡... 이라는 부분이... 왜 이렇게 웃긴 지 모르겠다.
왜, 다들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별것도 아닌 부분에서 혼자 터져 버리는, 그런 상황이... 하필이면 지금 찾아와 버렸다.
“흐흐흐... 켈록! 켈록!! 아니... 크흠... 그, 갑자기 웃긴 생각이 떠올라서 그만... 미안 미안.”
“...여기서 풀려 나면, 가장 먼저 죽여주지.”
“거 미안 하다니까. 아무튼, 다음 질문.”
잠시 좋지못한 일이 있었지만, 이럴 때는 얼렁뚱땅 넘어가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 흐흠... 보급 부대를 습격하라고 지시한 자는, 아가일인가? 아니면 마왕인가?”
“...흥.”
“...대답하기 싫어?”
내 질문에도, 데팔은 이미 단단히 삐져 버린 것인지 입을 앙다문채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이쑤시개로 터져 버린 것이 앙금으로 남은 모양이다.
늙은이들과 여자들은 한 번 삐지면 오래간다는데, 씨팔 곤란하게 됐다.
“그래, 뭐... 다음질문. 아가일은 또 다른 인조 인간을 만들고 있는가?”
“...”
그래. 이미 분위기가 씨발이 된 판에, 굳이 신경 써서 말을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쭈구리. 대답 안 할 거야? 이쑤시개의 인형 데팔씨.”
계속해서 입을 열지 않기에 조금 성질을 건드리자, 별안간 퉤 하는 소리와 함께 데팔의 입이 열렸다.
철퍽
“......”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네놈은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나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손을 움직여, 품속에서 꺼낸 천 조각으로 내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닦았다.
이 미친년이, 좀 놀렸다고 침까지 뱉네.
“...안 되겠다. 로이먼.”
“예, 형제님. 부르셨습니까?”
“...?”
로이먼이 불쑥 다가오자, 데팔은 몸을 흠칫 떨며 대체 무엇을 할 작정인지 궁금하다는 눈빛을 보내 왔다.
나는 그런 데팔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손날을 들어 데팔의 오른팔과 왼팔을 써는 시늉을 했다.
“여기 싹둑하고... 여기도 썰어제끼고... 다리는... 냅둘까? 아니, 다리를 써는 게 나을려나?”
“...이봐, 무슨...”
“흐음... 제 좁은 식견으로 말씀 드리자면, 팔 보다는 발목부터 자르는 것이 좋다고 사료됩니다.”
“역시 그렇지? 일단 도망치면 안 되니까.”
그제야 우리의 말에 담긴 저의를 알아챈 데팔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는 눈으로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 대화를 하려던 게...”
“사지절단 박제는 안 되지만, 뭐... 그래도 이 정도로 만족해라.”
“성에 차지는 않습니다만... 어쩔 수 없지요.”
절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로이먼의 오른손에는 플레일이 들려 있었다.
“...칼로 자르는 게 더 나을 텐데?”
“뼈가 가루가 되도록 뭉개버리면, 알아서 떨어져 나갑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나와 로이먼의 섬뜩한 대화를 들은 데팔은, 눈알을 미친 듯이 굴려대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인조 인간 이라고 해도, 감정이라는 것은 있나보다.
“뭐,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아가일은 또 다른 인조 인간을 만들고 있어?”
“나, 나는... 모르...”
“쓰읍... 아직 입을 열 생각이 없나보네. 로이먼!”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로이먼은, 곧 맡게 될 피 냄새가 기대된다는 듯, 거칠어진 호흡을 하고 있었다.
“비록 팔은 거두지 못하겠지만... 그 다리, 가져가겠다.”
로이먼의 팔이 천천히 들리고, 플레일의 사슬에 달린 오리하르콘 추가 절그럭 거리며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하... 설마, 정말로 할 생각은... 아니겠지? 네놈... 설마”
아무래도 데팔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린듯하다.
나는 로이먼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얼른 찍어 버리라는 손짓을 날렸다.
“찍어.”
후웅 하며 바람을 뭉개버리는 소리와 함께, 오르하르콘 추가 정확히 데팔의 발목을 노리며 빠르게 강하하자, 데팔은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마... 말할게요...!! 말할게요!!!”
쾅!!
데팔의 입이 열리자마자, 나는 로이먼의 팔을 슬쩍 밀어 플레일의 궤도를 바꾸었다.
로이먼의 플레일이 데팔의 발목 바로 옆의 땅을 찍어 버리고, 그 여파로 인해 흙먼지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음. 뭐, 다행히도 막판에 생각을 바꿨네. 현명한 선택이야. 안 그랬으면 진짜로 찍어 버렸을 거거든.”
“...헤끅”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고 딸꾹질을 하는 데팔을 향해, 나는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협조할 거지?”
내 질문에, 데팔은 그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