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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21화 (21/106)

〈 21화 〉 21. 달빛으로 빚어낸 여자

* * *

퀼른에 도착한 우리는, 로빈이 챙겨두고 있던 의뢰서 덕분에 혼란스러운 시국에도 프리 패스로 퀼른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 이곳이... 인간들의 도시...”

“야 야. 침 떨어지겠다. 입 좀 닫아 일단.”

칙칙한 전장에서 아가일의 손에 만들어진 데팔의 눈에는, 나름 메텔 왕국의 상업적, 군사적 요충지로 자리 잡은 퀼른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나 보다.

어울리지도 않는 격한 전투와 편치 않았던 잠자리로 인해 축 늘어진 맥스는, 나를 향해 힘없이 작별의 인사를 건네었다.

“오스틴 형.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어, 그래. 수고하고. 나중에 꼭 수도에서 보자.”

데팔의 벌어진 입을 손수 닫아주고, 모험가 길드로 돌아가 보겠다는 맥스를 배웅해준 뒤, 우리는 나와 알렉시스 공녀가 묵고 있는 여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야에게 내가 묵고 있는 여관의 위치를 들킨것도 있고, 로빈과 데팔의 여관도 함께 잡고 싶었기 때문에, 나와 알렉시스 공녀는 원래 묵고 있던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여관으로 짐을 옮겼다.

“자... 그럼, 로빈도 원래 묵고 있던 여관에서 짐을 빼 와야 할 테고... 로이먼 너도 교회에 잠깐 들렀다 와야 하지 않아?”

“그분을 위한 전리품을 영구보존 시키기 위해서는... 그렇습니다.”

로이먼은, 아직도 허리춤에 대롱대롱 메달린 라이칸슬로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난 네가 이번 교회에서는 얼마나 버틸려나 궁금하다.”

“휴고 목사님께서는 아직 진정한 성전의 의미를 깨우치지 못하신듯 하여, 저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하여튼 갔다 와. 교회에서 배도 좀 채우고 오고.”

그렇게 우리는 각자 나름의 휴식 시간을 가지고, 늦은 점심 식사로 배를 든든히 채운 뒤 내가 새로 묵게 된 방에 옹기 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데팔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그녀의 신상을 어떻게든 가려야 할 테니까.

“일단, 데팔의 이름부터 새로 지어야 할 것 같은데... 데팔은 뭐 따로 원하는 이름 있어?”

토끼처럼 눈을 반짝이며 주스를 홀짝이던 데팔은, 내 말을 듣고 도리질을 쳤다.

“으음... 딱히 생각해 둔 이름은 없다.”

이렇게 되면, 이름을 우리가 지어 줘야 할 텐데...

문제는, 나는 이런 창의성이 필요한 일에는 잼병이라는 것이다.

“그런고로, 데팔의 새로운 이름 공모전을 개최하겠습니다!”

“...갑자기 뭐야, 로빈. 너는 따로 생각해 둔 이름이라도 있어?”

“에헴... 저도 딱히 생각해 둔 이름이 있는 건 아니지만...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 보면, 나름 예쁜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요?”

“확실히...”

내가 아무리 이런쪽은 재능이 없다지만, 그래도 대가리가 다섯 이나 모여 있는데, 괜찮은 이름 하나쯤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내 동의를 얻은 로빈은, 손뼉을 짝­ 마주치며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좋아요! 그럼... 다들, 괜찮은 이름 하나씩 말해 주세요!”

그렇게, 데팔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한 공모전이 개최되었다.

잘... 되겠지?

* * * * *

“그레이시... 오스틴은 아직 안 돌아왔어?”

용사가 힘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으나, 그녀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레이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 하더군. 오늘 아침 일찍 마야가 알려 준 여관으로 가 보았지만, 주인장의 말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나... 나 때문일까? 나 때문일 거야...”

“...그런 힘없는 소리 하지 마라, 용사. 단순히 숲속에서 야영한 것일지도 모르잖나.”

“그치마안... 흐끅... 나 때문에 그런 걸거야... 내가 꼴도 보기 싫어서, 아예 도시에도 들어오지 않은 거야...”

“하아...”

이미 퉁퉁 부어 버린 눈가로 다시금 눈물을 흘려보내는 용사의 모습에, 그레이시는 한숨을 푹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오겠다. 이사벨, 마야와 함께 식료품을 사와 줄 수 있겠나?”

“응... 이사벨, 가자.”

마야와 이사벨이 손을 맞잡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드리엔은, 용사를 일으켜 세우며 문으로 향했다.

“후우... 나랑 용사는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알았다.”

아드리엔의 손에 비틀거리며 일어난 용사마저 바깥으로 나간 뒤, 혼자 남게 된 그레이시는 허리춤에 찬 칼의 폼멜을 매만지며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레이시 역시 오스틴에게 미안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지식한 왕실 근위대의 대장이자 기사인 그녀로서는, 오스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장 마왕이라는 사악한 절대악 토벌하기 위해 모인 파티에서, 사사로운 개인적인 감정은 묻어두는 것이 맞다고,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틴에게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과, 그런 오스틴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하지만, 내가 잘못한 건 사실이니까...'

자신의 잘못은 알아채는 즉시 사과하고, 해묵은 감정은 마음속에 묻어두지 않는다.

단체생활중 생긴 갈등은, 당사자들끼리 곧바로 해결하는 것이 최고이다.

극단적인 실리주의자이자, 중요한 일에서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강철 같은 정신력.

오죽하면, 왕실 근위대 내부에서조차 '목석같은 그레이시' 라고 불렸겠는가.

그레이시는, 그런 여자였다.

오스틴을 만나게 되면 다시 한번 사과해야겠다고, 만약 파티에 돌아온다면, 이전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겠다고.

그리 다짐한 그레이시는, 어느덧 도착한 오스틴이 머물고 있는 숙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문 앞에 서서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은 그레이시의 손이 문을 누르자, 기름칠이 잘 되어 있는 경첩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며 그레이시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어서 오세... 또 오셨습니까?”

그레이시가 오스틴을 찾으러 여관에 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미 그레이시의 얼굴을 기억한 여관 주인은 심드렁한 태도로 그녀를 맞이 해 주었다.

“크흠... 혹시, 알렉시스 공녀라는 사람과 오스틴...”

“그 두 분이라면, 점심즈음에 돌아왔습죠.”

별 기대없이 물어본 질문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 정말인가? 오스틴이 돌아왔다고?”

“예. 돌아오긴 했는데 말입니다... 어디 보자... 이미 방을 빼셨는데요?”

곧바로 계단을 오르려던 그레이시의 몸이 순간 뚝­ 하고 멈춰 섰다.

“...뭐... 방금 뭐라고...”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관 주인은 특유의 콧수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말을 이었다.

“으흠... 그러니까... 아, 여깄네. 한 시간 전 즈음에 짐을 바리바리 챙기시고 방을 빼셨습니다. 아마 다른 곳으로 이동... 이봐요! 사람이 말을 하는데...”

­ 우지직...

“...어... 참! 내 정신 좀 봐. 오늘 들어온 벌꿀주를 정리해야 하는데...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요. 하하...”

그레이시가 붙잡은 계단의 목재 손잡이가 쩌적­ 하며 갈라지자, 여관 주인은 목소리를 떨며 부리나케 주방으로 사라졌다.

“...오스틴. 이 자식이...”

흉흉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그레이시는,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여관을 빠져나왔다.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방법이 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그녀의 신념에, 금이 가고 있었다.

* * * * *

“으음... 서... 선배님...? 방금것도 별로인가요?”

“나는 이게 현실인가 싶다, 로빈.”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작명 공모전은, 처참한 결과물들을 끝없이 토해내며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니, 씨발. 솔직히 지금 이름도 이상한데, 너희들 진짜 얘 놀리는 거 아니지?”

“헤으으... 그... 그만해...”

농담같지도 않은 괴상한 이름들이 마구 배출된 탓인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새로운 이름에 잔뜩 기대감을 부풀리던 데팔은 힘없이 축 늘어져 내게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놀리다뇨... 저희는 진짜 진지하게 생각한 거라구요!”

“너는 제발 이름에 이상한 음식 이름좀 넣지 마라. 사람 이름에 왜 자꾸 음식 이름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건데?”

“그... 그치만...”

아마 미래에 로빈이 자녀를 가지게 된다면, 그 이름은 '버터 젤리' 나 '초록뿔 사슴 스테이크' 가 아닐까.

“알렉시스 공녀님. 공녀님 께서도 좀 더 쉬운 이름을 지어 주셔야지, 그런 난해한 이름들을 평소에 어떻게 부르고 다닙니까...”

“나... 난해하다니요... 그런...”

알렉시스 공녀가 내놓는 이름들은 하나 같이 뜻도 너무 추상적이고, 발음하기도 어려운 고상한 이름들밖에 없었다.

애초에 알렉시스 공녀의 이름인 오르엔도 희한한 이름에 속하는데, 귀족들은 대체 어떻게 저런 이름들을 서슴없이 부르고 다니는 걸까.

“...그나마 네가 내놓은 이름들이 제일 괜찮은 게 충격적이네.”

“형제님. 세례명을 약간 변형해서 지은 이름이니, 당연히 신성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들 내놓은 이름들이 하나 같이 형편없다 보니, 상대적으로 로이먼이 고안한 이름들이 제일 괜찮아 보였다.

“흐음... 로자리아니, 예리엘이니... 솔직히 데팔한테 그런 성스러운 이름들이 어울릴까 싶은데...”

그렇게 한참을 끙끙대며 고민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을 훌쩍 지나, 바깥은 깜깜해 진지 오래였다.

나는 답답한 마음을 토해내듯 한숨을 내뱉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늘어져 있던 데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야, 데팔. 너는 어떤... 이름이.......”

오늘이 만월이었던가.

열린 창문을 가득 채우며 은은하게 비춰 들어온 달빛이, 데팔의 투명하고 푸른 머리카락과 만나 오묘한 색을 자아내고 있었다.

푸른색이면서 하얀... 마치 투명한 바닷물 같은... 아니, 이건...

“...달빛...”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데팔의 모습에,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데팔을 바라보았다.

“...루나.”

먼 옛날, 달의 여신을 가리키던 이름.

“루나... 달의 여신. 확실히 그게 어울리네요...”

내 맞은편에 있던 알렉시스 공녀 역시 내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와 로빈은 서로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데팔. 일어나.”

“우웅... 다 됐나...? 나는 이제 슬슬 자고 싶은데...”

칭얼거리면서도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달의 여신 그 자체같았다.

“루나. 이제부터 네 이름은 루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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