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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22화 (22/106)

〈 22화 〉 22. 개가 짖어도 마차는 달린다

* * *

데팔의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던 우리는, 이른 점심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오늘은, 퀼른의 영주를 만나서 로빈이 받았던 의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날.

정갈하게 몸단장을 하고, 여관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을 때운 뒤, 루나가 쓰던 갑옷과 부러진 창을 챙긴 우리는 곧바로 영주가 머무는 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 오스틴... 정말 괜찮은 건가...?”

“아, 문제 없대도. 걱정 꽉 붙들어매셔.”

“하지만...”

당연하게도, 의뢰의 목표였던 루나는 영주의 성으로 향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고.

“괜찮다니까? 영주님 앞에 서게 되면, 그냥 얌전히만 있어. 그래도 로빈은 영주님과 일면식이 있는 사이니까... 나랑 로빈이 어떻게든 둘러 대 볼게.”

“으응...”

이번에 새로 잡은 여관은 퀼른의 중심가로부터 별로 멀지 않았던 터라, 우리는 30분 정도를 걸어 성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웅장한 성의 모습에 감탄하며 거대한 문 앞으로 다가가니, 보초를 서고 있던 경비병이 우리를 막아섰다.

“멈추십시오. 신원이 확인되신 분들만...”

“영주 님께서 지명해주신 의뢰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여기, 의뢰서 입니다.”

로빈에게서 건네받은 의뢰서와 우리를 번갈아 가며 힐끗거리던 경비병은, 이내 막사에서 밀랍 도장을 가져와 찍어 주곤 다시 로빈에게 의뢰서를 돌려주었다.

“영주님의 손님이셨군요. 환영합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예. 수고하십쇼.”

빗장이 빠진 성문이 열린 성 문을 통과하니, 곳곳에서 분주하게 병장기를 나르고, 무기를 휘두르며 훈련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퀼른 코앞까지 들이닥친 아가일의 7군단 때문에 모험가들과 용병들을 싸그리 긁어 갔다더니, 확실히 길드에서 몇 번 본적이 있는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바빠 보이네. 아니, 용사는 대체 뭘 하고 있는거야? 이거 직무유기 아니야?”

“...선배님께서 하실 말씀은...”

“야 임마. 나는 이유가 있어서 나온 거잖아.”

땀을 흘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영주의 사병들과 일꾼들을 지나쳐 걸어가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한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상급 기사, 레인 입니다. 영주 님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짤막하게 소개를 마친 레인은 성격이 과묵한 탓인지, 입을 꾹 다문 채 우리를 응접실로 묵묵히 안내해주었다.

별 복잡한 절차를 걸쳐 드디어 응접실 앞에 당도하니, 레인이 응접실의 문을 두드렸다.

“알비온 백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 들어와도 좋네.

안쪽에서부터 문이 스르륵 열리자, 퀼른의 영주인 알비온 백작이 차를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상당한 악성 곱슬로 보이는 금발의 머리칼과, 마치 돋보기처럼 두터운 안경을 쓴 알비온 백작은 우리를 보곤 사람좋은 미소를 띄우며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환영합니다! 자나깨나 여러분들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자. 어서 자리에들 앉으세요.”

여기서 야부리만 잘 털면, 바로 메텔하임으로 갈 수 있다.

알비온 백작, 내 세치혀로 구워삶아주마.

* * * * *

그 시각, 그레이시로부터 오스틴이 본래 묵던 여관에서 짐을 뺐다는 소식을 들은 용사와 일행들은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여... 역시... 오스틴은 이제... 나 따위는 꼴도 보기 싫은 거야...”

금세 눈물을 글썽이며 무릎을 끌어안은 용사의 모습을 보며, 그레이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흐음... 비록 오스틴이 얄팍한 수를 썼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용사의 칭얼거림을 밤새 받아낸 탓에 예민해진 아드리엔은, 자신도 모르게 따가운 말투를 쏘아붙였다.

평소라면 그런 아드리엔의 태도를 지적했겠지만, 그레이시는 그저 입꼬리를 슬쩍 올린 채 말을 이어나갔다.

“이래 봬도, 왕실 근위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몸이다. 조금 비열한 방법이긴 하지만... 어젯 밤, 영주에게 손을 조금 써 놨지.”

그레이시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하자, 마야 역시 의문을 표하며 그레이시에게 반문 해 왔다.

“손을. 쓰다니...?”

“음... 전부 말 해 줄 수는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흠흠­ 하고 잠시 목을 가다듬은 그레이시는, 그녀에게 집중된 눈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스틴은 우리 파티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상, 퀼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녀의 발언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진 상황에서, 오직 마야만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좆... 됐네.'

아마, 오스틴과 화해하는 것은 더 먼 미래의 일이 될 것 같다는 사실을.

* * * * *

“아... 알비온 백작님. 그게 무슨 말씀 이신지...”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자, 알비온 백작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려 안경을 고쳐 썼다.

“허허... 그것이... 오스틴 님께서 용사님의 파티에서 나오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제 입장이 조금 곤란해져서 말입니다. 데팔을 토벌한 보상은 드릴 수 있지만, 당분간 퀼른에서 벗어나실 수 없습니다.”

“...아, 뒷골 땡겨.”

데팔을 토벌한 보상은 줄 수 있지만, 당분간 퀼른에서 움직이면 안 된다니. 이게 무슨 개 좆같은 소리란 말인가.

세치혀로 구워삶기는, 염병. 아무래도 그 전에 내가 혈압올라 뒤져 버릴 것만 같았다.

“제가 원하는 보상은, 메텔하임까지 곧바로 갈 수 있는 게이트를 이용하는 것을, 알비온 백작님께서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건 조금 곤란합니다만... 그래도, 달리 원하시는 보상이 있으시다면 제가 최선을 다해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렇지! 혹시, 금전적인 보상에는 관심이 있으신지...”

내가 뒷목을 붙잡으며 눈을 까뒤집자, 알비온 백작은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황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하... 하지만! 오스틴 님께서 용사님의 파티를 나가고 싶다고 하셔도,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용사님의 동의도 얻어야 하고, 하다못해 다른 신원이 확인된 분의 신원 보증이 있어야...”

우물쭈물 거리며 내 눈치를 보는 알비온 백작을 앞에 두고, 나는 끓어오르는 혈압을 애써 가라앉히며 가까스로 입을 열 수 있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게이트는 포기하도록 할 테니, 마차 한 대만 준비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마차는 어디에 쓰시려고...”

“당연히 메텔하임까지 마차를 타고 가기 위해서죠. 몰라서 묻습니까?”

내가 도끼눈을 뜨고 날카로운 말투로 대답하자, 알비온 백작이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어째 입을 우물거리는 것이,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은데... 설마...

“오스틴 님... 아니, 오스틴 경...?”

“네. 말씀하세요.”

“커흠... 말씀드렸듯이, 당분간 퀼른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셔서는 안 됩니다. 제가...”

­ 쾅!!

알비온 백작의 말을 채 듣기도 전에, 그 뒷 이야기를 얼추 예상한 내가 테이블을 발로 차 버리자, 알비온 백작과 그 뒤에 서 있던 레인까지 모두 뻣뻣하게 몸이 굳었다.

이 씨발, 하다못해 마차는 이용하게 해 줘야 될 거 아니야.

그대로 창문턱까지 밀려 나간 테이블이 벽에 부딪치며 다시금 큰 소리를 내자, 알비온 백작은 놀란 듯 몸을 크게 움찔거리더니,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제... 제가! 그동안 저희 성에서 편안하게 머무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 주시길...”

...이 새끼, 아까부터 이상하게 안절부절못하는 태도가 마음에 걸린다.

자신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렇게까지 내게 죄송해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알겠습니다. 알비온 백작님의 말씀은 아주 잘 알아먹었으니, 앵무새마냥 더 쫑알 거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답지 않게 침착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 하자, 알비온 백작은 눈에 띄게 안도하는 태도로 한숨을 푹 내뱉었다.

“하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처지를 이해해주시다니, 역시 오스틴 경 께서는 듣던 대로 정의감 넘치고 선량하신...”

“그것보다 말입니다, 알비온 백작님.”

나는 손수건을 꺼내 들어 땀을 닦는 알비온 백작의 말을 끊으며,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던 부분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제가 용사 파티를 나온 것은...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내 질문에, 알비온 백작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아까부터 무언가 마음에 걸렸는데, 그게 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이 새끼가 대체 어떻게 내가 용사 파티를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물론 근거 없는 의심 일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토끼눈을 뜨고 굳어 있는 알비온 백작의 태도로 보아서는, 정곡을 찌른 듯하다.

“그... 그것이...”

“쓰읍... 요즘 사람 모가지를 못 썰어서 그런가... 제 숏소드가 피좀 먹여 달라고 징징거리는 통에, 요즘 잠을 못 자네요.”

“...딸꾹!”

“말씀 하시기 싫으시다면야... 제 숏소드 목좀 축여도 될까요?”

“마... 말 하겠습니다! 일단 진정 하십시오!”

내 허리춤에 매달린 칼집에서 살짝 끌러져나온 숏소드를 본 알비온 백작은, 황급히 나를 말리며 자리에 앉혔다.

“어디 말씀 해 보세요.”

“사... 사실은... 어젯밤에 그레이시 대장님께서...”

“오케이, 거기까지.”

그럼 그렇지.

뭐 절차가 어쩌느니, 마음대로 파티를 나오면 곤란하다느니, 신원 보증서가 필요하다느니 하는 것은 죄다 개 헛소리 였다.

그레이시. 이 미친년이, 이제는 내 발목을 자르기 위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영주를 은근히 협박했던 것이다.

“알비온 백작님의 사정은 대충 잘 알겠습니다.”

내가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부드럽게 말하자, 알비온 백작은 몸을 축 늘어뜨렸다.

“가... 감사...”

“그러면... 알비온 백작님께서는 오늘 저를 보지 못한겁니다.”

“네... 네? 그게 무슨...”

보통 사람들 이라면 곧장 그레이시에게 달려가서 사정을 하거나 손가락만 쪽쪽 빨며 기다리겠지만, 나는 다르다.

그레이시. 네년이 그따위로 나오겠다면, 나도 다 방법이 있다.

개가 짖어도 마차는 달리는 법.

“알비온 백작님. 역시 보수는 마차로 받아야겠습니다.”

* * * * *

퀼른의 중앙 구역에 자리를 잡은, 메텔 왕국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역참.

변방의 소도시였던 퀼른을 단번에 상업 도시로 뛰어오르게 만든 일등공신인 이 역참의 말단 직원인 아일라는, 오늘도 변함없이 지루한 일과에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하아... 지루해... 나도 식당이나 열 걸 그랬나...”

이웃집에 사는 소피는, 전쟁통에 몰려든 모험가들과 용병들로 인해 식당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던데.

자신은 밋밋한 업무복을 입은 채 몰려드는 마차들을 말 먹이를 먹이고, 마차표를 관리해야만 했다.

“나도 멋진 서방님 만나서 인생 좀 펴고 싶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마차표를 작성하며, 언젠가 자신을 데리러 올 백마 탄 왕자님을 상상하고 있자니, 별안간 역참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 쾅!!!!!!

“뭔데?! 무슨 일이야?”

“꺄악! 이게 무슨 소리야?!”

문이 박살 난 채로 저 멀리 벽까지 날아가 처박힌, 어안이 벙벙해지는 상황 속에서, 이내 박살 난 문 너머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저것들은...?”

큰 소리에 황급히 달려온 역장이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며 내뱉은 한마디에, 아일라는 자욱한 먼지 속에서 그들을 살펴 보기 위해 눈을 찡그렸다.

하나같이 밤색의 로브를 꽁꽁 둘러 싸매고, 얼굴을 전부 가릴 만큼 커다란 가면을 쓴 다섯 명의 사람들.

맨 앞에 서서 역참 내부를 둘러보던 괴한은, 이윽고 역참 내부의 사람들을 향해 쇠뇌를 겨누며 소리쳤다.

“동작 그만!!! 이 씨발년들, 뒤지기 싫으면 전부 엎드려!!!”

바야흐로, 마차 도둑 오스틴의 화려한 데뷔전 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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