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23. 인생은 아름다워
* * *
“그... 그레이시... 정말 이런 짓을 해도 괜찮은걸까?”
앞장서서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그레이시를 보며, 용사, 이유정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재차 물어왔다.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스틴을 영영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레이시의 자신만만한 대답을 들으며, 이사벨의 옆에서 그레이시를 따라 걸어가던 마야는 그녀들의 귓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좆된 것 같은데.”
“좆된 것 같네요...”
문득 옆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탄식에, 마야는 조금 놀란 눈을 하고 이사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사벨 역시 마야의 중얼거림을 들은 듯, 토끼눈을 뜨고 마야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이 답도 없는 일행들 중에서 오스틴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이사벨.”
“...마야.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죠.”
그나마, 모든 파티원들이 빡대가리는 아니라는 것에 안도해야 할까.
“아마 오스틴은 지금쯤 새장에 갇힌 카나리아 신세일 터이니, 우리는 여유롭게 우리가 맡은 바를 완수하면 되는 일이다. 어려울 것 없지. 비록 척후 없이 아가일을 상대해야만 하겠지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영주를 겁박하고, 오스틴을 퀼른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족쇄를 채워 버렸다.
이 정도 수준이면, 이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다.
지능을 의심해 봐야 할 수준이 아닐까?
“어... 그런가...? 이러면 역효과만 날 것 같은...”
“용사, 날 믿어라. 아마 지금쯤이면, 오스틴은 땅을 치며 우리의 필요성을 몸소 느끼고 있을 것이니.”
여전히 당당한 그레이시의 태도를 보며, 마야는 자신의 고깔 모자의 챙에 얼굴을 숨기며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이미 좆된 것. 같은데...’
하지만 이미 그레이시가 일을 저질러 버린 이상,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과를 하러 간다고 한들, 얼굴이라도 보이면 다행일 것이다.
‘...애초에, 내가 한 짓도 아니구.’
마야에게 책임이 있다면, 그레이시의 멍청한 짓을 사전에 막지 못한 것이 아닐까.
“...오스틴. 보고 싶다...”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용사의 얼굴에 절로 한숨을 내뱉으며, 마야는 또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그 총명하고 푸르른 눈을 본다면, 이런 잡념들과 걱정거리가 전부 씻겨져 내려갈텐데.
하지만, 그것은 이미 너무 먼 미래의 일이 되었다.
앞에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걸어가는, 저 앙큼한 여기사 때문에.
그렇게 퀼른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가기 위해 성문으로 향하려던 그녀들의 곁으로, 퀼른의 수비대로 보이는 병력들이 허겁지겁 달리며 스쳐 지나갔다.
“...뭐지? 불이라도 났나?”
아드리엔이 눈을 얇게 뜨고, 이미 저 멀리 작아지는 병사들을 쳐다보며 말하자, 용사 역시 자신들을 스쳐 지나간 병사들이 달려가는 방향을 가늠해 보며 입을 오물거렸다.
“불이 났다고 하기에는, 연기가 안 보이는데... 저쪽은 중앙 구역쪽 아닌가...? 저기요!”
용사는 황급히 달려가는 또 다른 수비 대원중 한 명을 붙잡았다.
그녀에게 붙잡힌 병사는, 숨을 돌리기 위해 헉헉 대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허억... 허억... 예...? 용사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저희가 조금 바빠서...”
“아... 아뇨. 별다른건 아니구요. 무슨 일 이라도 있나요? 아까도 다른 수비대 분들이 굉장히 허겁지겁 달려가던데.”
“그... 그게... 잠시, 숨 좀...”
장기까지 토 해낼 기세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병사는, 이윽고 호흡이 안정되자 이마의 땀을 쓱 훔치며 용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역참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갑자기 웬 괴한들이 들이닥쳐서,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가, 마차를 훔쳐서 달아나고 있다고...”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방금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레이시는,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며 수비 대원을 향해 물었다.
“...혹시, 그 괴한들에 대해 자세한 정보는 없나?”
“어... 두목으로 보이는 놈이 쇠뇌와 숏소드를 쓰고 있었다고 하던데요. 덩치 큰 남자 한 명과, 여자 세 명을 데리고 역참을 털었다는... 어... 어?! 이봐요!”
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느새 그녀들은 온 힘을 다해 퀼른의 중앙 구역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오스티이인!!!!!!!!!!”
오스틴. 이 미친놈이, 이제는 아예 막 나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 * * * *
“자 자. 손 번쩍 번쩍 드세요. 마차 한 대만 얌전히 가져 갈 테니까, 허튼 수작 부리지 마시고... 야! 너 씨발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 안 했어! 내 말이 장난같아!!!”
“히... 히익...!!! 죄송합니다...! 화장실이 급해서...”
“니미... 쯧. 갔다 와! 너 3분 내로 안 텨 오면 뒤져 진짜로.”
“ㄴ... 네헷!”
정수리가 반짝거리는 뚱땡이 아저씨가 화장실로 황급히 달려가고, 나는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각양각색의 마차들, 그리고 그 마차를 이끄는 말과 마수들.
성공이다...! 솔직히 나도 이 방법을 생각했을 때만 하더라도 미친 생각 인 것 같아서 포기하려 했지만, 영주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아무래도 왕실 근위대의 대장인 그레이시의 협박 때문에, 일개 변경백이 그녀의 말을 거스르고 대놓고 나를 보내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서로 짜고 치는 판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곧바로 알비온 백작에게 내 계획을 말해 주었고, 알비온 백작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알비온 백작도 나름의 체면도 있고 사정이 있으니, 대놓고 도와 준 게 아니라 내가 마차를 훔쳐 달아났다고 하면, 서로 윈윈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나는 대놓고 퀼른의 역참을 털러 왔고, 알비온 백작은 수비대 대장에게 체포하려는 척만 하라며 비밀스럽게 귀띔을 해 주었다.
수비대가 허수아비라면, 무서울게 없다.
“너희들은 손 들고 있어!!! 내 말 듣기 싫으면 덤벼 보던가! 근데, 나한테 덤비면 많이 재미없을 거야!”
나는 로이먼과 루나, 로빈에게 역참 내부의 인질들을 맡겨둔 채, 알렉시스 공녀와 함께 카운터 뒤쪽의 보관함을 뒤져 마차의 열쇠들을 찾아 내었다.
“캬...! 아주 그냥 번쩍거리는 열쇠들이 수북 하네요. 알렉시스 공녀님, 뭐 따로 마음에 드시는 마차라도 있으십니까?”
“오... 오스틴...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이러다 잘못되면...”
“어허. 씁. 알비온 백작님께서 눈감아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수배가 내려질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으니, 저희는 적당히 마차 한 대만 쏙 빼서 신나게 째끼면 되는 겁니다.”
“으음... 그래도...”
아무래도, 알렉시스 공녀는 우리가 이런 나쁜 짓을 한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니... 아무런 처벌 없이 나쁜 짓을 할 절호의 기회잖아. 우리가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도 아니고. 물론, 마차 주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그것 역시 알비온 백작이 피해자에게 배상해 주겠다고 하였으니,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니까, 저희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너무 염려 마세요.”
“그렇다면야... 알겠어요.”
그렇게 알렉시스 공녀의 표정이 조금 풀린 것을 확인한 나는, 열쇠가 담긴 함을 안고 마차 사이를 돌아다니며 튼튼하고 편안한 마차를 고르기 시작했다.
“...오. 이거 괜찮은데요?”
이윽고 눈에 들어온 것은, 옻칠이 잘되어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나무와 백금으로 장식된 마차였다.
크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깔끔하게 잘 가공된 나무와 드문드문 반짝거리는 백금의 조화는 실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내부는 일행들 모두가 넉넉히 앉을 수 있을 만큼 넓고, 시트는 푹신하고 부드러우니 내 마음에 쏙 드는 마차였다.
물론, 여기서 다섯 명이 자기에는 너무 좁으니, 밤에는 야영을 해야겠지만...
내가 고른 마차를 본 알렉시스 공녀도 잠시 마차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으니, 말 다 했다.
공작가 영애를 만족시킨 마차. 품질은 말할것도 없지. 이게 바로 품질 보증서니까.
마차에 걸린 패의 숫자와 맞는 말을 데려온 뒤, 열쇠를 꽂아 돌리니 철 기둥에 걸려 있던 자물쇠가 철컹 하며 떨어져 나갔다.
말도 근육이 꽉 들어찬 흑마 두 마리가 이끄니, 아마 문제없이 잘 나갈 것 같다.
그렇게 마차를 준비시키고 로비로 돌아오니, 아까 화장실에 간 남자의 상판이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야. 방금 화장실 간 놈 어디 갔어? 뭐 똥통에 빠졌나?”
내가 로이먼을 향해 묻자, 로이먼은 손에 들고 있던 플레일을 꽉 움켜쥐며 화장실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1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 화장실에서 나온 로이먼은, 이내 채찍을 돌돌 말며 내게 다가왔다.
“화장실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른 분들의 말씀을 들어 보니, 아마 저희가 한눈을 판 사이에 수비대에 연락하기 위해 도주한 듯 하군요.”
“...그 새끼는 내 눈에 띄면 먼지나게 패버려야겠네. 됐고, 마차 골랐다. 와서 타.”
일행들이 마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 나는 인질들을 향해 겨눈 쇠뇌를 내리지 않았다.
마차를 바깥으로 내 보내기 위해 커다란 문 앞으로 다가서니,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운 것이 느껴졌다.
아마 수비대가 달려온 모양이다. 아까 그 뚱땡이 새끼, 그냥 바지에 지려 버리게 하는 건데.
나는 마부석에 앉은 로이먼을 향해 문이 열리면 바로 뛰쳐나가라는 손짓을 주고,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었다.
“...셋! 달려!!!”
그대로 빗장을 밀어 열어 재끼자, 동시에 로이먼이 이끄는 마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열린 문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마차가 내 옆을 지나치는 순간, 그대로 마차의 손잡이를 잡고 뛰어올라, 로이먼이 앉아 있는 마부석 옆의 빈자리에 올라탔다.
“나... 나왔다!”
“모두 진을 갖춰라!! 이봐! 지금 당장 무기를 버리고 마차를 멈추... 으아악!”
어설프게 창을 휘적이며 주춤거리는 수비대들을 제치고, 마차는 정신없이 덜컹거리며 동쪽 성문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흐... 흐흐... 크하하하하!!! 진짜 털었다!!! 씨발 기분 째지는데!!!”
“형제님! 위험합니다! 자리에 앉아계십시오!”
“캬하하!!! 달려 달려! 씨발 아무도 못막아!!!”
바퀴가 부서질것처럼 덜컹거리며 길을 달리다 보니, 별안간 저 앞쪽에서 몇몇 사람들이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잠깐만. 그런데 저거...
“오스틴!!!! 이 미친놈아! 당장 멈춰!!!”
용사와 똘마니들이 내게 힘껏 소리지르며 마차를 막아서는 모습을 보니, 그 꼬라지가 퍽이나 우스웠다.
“좆까! 나는 이제 내 마음대로 살 거야! 너희들은 마왕잡으러 뺑이나 까라!”
“오스틴!!!”
나는 곧바로 로이먼에게서 고삐를 건네받고, 있는 힘껏 방향을 틀었다.
대로 한가운데를 막아 서고 있던 그녀들의 오른쪽으로 바람처럼 지나가고, 나는 더욱 신이 나 고삐를 힘껏 내려치며 속도를 높였다.
“아~! 달다 달아!!! 인생은 아름다워! 씨발 다 비켜!!!”
우리를 멍하니 쳐다보는 용사와 똘마니 년들을 뒤로하고, 마침내 우리의 마차는 알비온 백작 덕분에 텅 비어 있는 성문을 빠르게 통과할 수 있었다.
“드디어 해방이다!!!”
가자, 메텔하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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