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24. 행복은 멀지 않은 곳에
* * *
“후우... 후윽... 카학...! 화... 확실히, 대단하군 그래... 흐흐...”
“...글쎄.”
기사의 오른팔이 한 번 휘둘러지면, 밤하늘처럼 까맣고 투명한 검의 칼날에서 핏물이 잔뜩 배어져 나왔다.
“인과율을 어지럽히는 존재에게, 영생은 허락되지 않았다.”
“크흐흐... 콜록!...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그래... 그 재수 없는 계집이... 그리 말 하던가...?”
“...태초부터 이어져온 진리. 무지는 죄다. 어리석고 오만한 존재여.”
“하아... 쿨럭! 네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예정된 결말을 뒤틀수는 없었나...”
예정된 결말.
예정된 결말?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말이다. 예정된 결말 이라니.
“그따위 망상을 신뢰한 것 역시, 무지의 편린이라고 할 수 있겠지. 주제를 알도록 해라.”
기사의 말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방금까지 이어져온 격전이 거짓말인 것처럼 차분한 기사의 호흡과 망설임 없는 움직임은, 그의 앞에 힘겹게 서 있는 남자에게 어떠한 감정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두려움.
공포.
그리고 경외.
인간을, 필멸자라는 틀을 깨뜨렸다. 한계를 초월했다.
이 정도라면... 전선파괴자와 정면에서 맞서 싸워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 않을까.
“...놀랍도다, 인간을 초월한 기사여. 삼라만상을 초월한 내 눈에도, 오직 그대의 미래 만큼은 보이지 않는구나.”
이제는 한쪽만 남은 눈을 부릅뜬, 마왕군의 제 2 군단장 칼라스는 기사의 앞에 무릎 꿇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차원을 찢어 버리던 오른눈은, 이미 기사의 검에 거두어진 지 오래였다.
삼라만상을 꿰뚫어 보던 왼눈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기사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 안을 들여다보려 하면.
“칠흑 같은 밤이로다. 태양을 삼켜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군.”
실수다. 완벽한 실수다.
그는 모든 것을 초월한 눈을 가졌으나, 그 자신은 초월하지 못했다.
“나를 이긴 네놈에게, 특별히 조언 하나 해 주지.”
“...말 해 봐라.”
시체수집가 헌틀리에게 뒤를 맡겼지만, 이제는 그 헌틀리 조차도 칼라스를 되살릴 수 있을런지 의문이었다.
한계를 초월한 존재에게 맞서는 것은, 그런 법이다.
“태양을 가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별의 기사여. 모든 존재들은 제각기 그들의 분수에 맞는 위치가 있는 법이니.”
“...용사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리 말하며, 기사는 칠흑 같은 장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크흐... 오만하구나. 정녕 마왕님께 칼끝이라도 닿을손 싶으냐? 네놈은 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오만하다라.”
칼라스의 말을 들은 기사는, 문득 손가락을 들어 올려 별이 빽빽하게 들어찬 밤하늘을 가리켰다.
“네놈이 간과한 것은, 단 한 가지.”
“...간과했다니. 무슨...”
“별은 하늘에 있고.”
서걱!
“손바닥으로는, 하늘을 가리지 못한다.”
단 한 번. 칼날이 번개처럼 내려감과 함께, 어느덧 칼라스의 머리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바닥을 굴렀다.
“...태양.”
덤덤한 말투로 중얼거린 기사는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어느덧 동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얼핏 들은 소식으로는, 태양을 쫓아 여정을 떠났다지.
기사가 되고 싶다며 가르침을 부탁하던 말괄량이 같은 아이는, 어느새 어엿한 성인이 되어 근위대의 요직을 꿰찼다고 들었다.
딸같은 아이.
비록 그분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아니지만, 그녀는 기사에게 딸과 같은 존재였다.
피가 이어지지 않은 딸.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도록 할까.”
비슷한 시기, 또 다른 가르침을 청했던 맑은 눈의 남자아이도 볼 겸.
* * * * *
퀼른을 탈출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 너무 신난 나머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통에, 급 피곤해진 나는 로빈에게 길안내를 맡긴 채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딱 알맞은 기온과,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맞춰 파도처럼 일렁이는 드넓은 초원.
아. 너무좋다.
이게 힐링이지. 이게 인생이다.
행복? 별거 없다. 그냥 내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아가면, 행복은 자연스럽게 굴러들어 오기 마련이거든.
적어도 그렇게 살면 손해는 안 본다.
“음... 이쪽이 맞는 것 같은데... 아닌가?”
끙끙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부터 지도를 보고 있는 로빈이 머리를 긁적이며 긴가민가 하고 있었다.
“잘 안 보여... 우씨...! 선배님! 지도에 무슨 낙서를 이렇게 많이 해 놓으신 거예요!”
“...어휴. 이리 줘 봐.”
별로 더럽지도 않구만, 오바 떨기는.
툴툴거리는 로빈에게서 지도를 낚아채듯 받아보니...
...좀 더럽나?
“이건, 그... 그거야. 그거.”
“...그거요?”
“아니, 왜... 있잖아. 용사 파티에 있을 때는 마땅히 메모할 종이나 양피지도 없었다고. 그래서 지도에 중요 거점들도 표시 할 겸, 이렇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하잖아요! 지도가 보이지 않을 정도 라구요! 게다가, 얼마나 지우고 쓰고를 반복했길래 종이가 이렇게 너덜 너덜...”
“그래그래. 그냥 내가 길 안내 할 테니까, 너는 쉬고 있어라.”
나는 여전히 입을 삐죽 내민 채로 무어라 궁시렁대고 있는 로빈을 애써 무시하며, 지도를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
덜그럭 덜그럭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
불과 몇 시간 전에 대탈출을 행했던 것으로 인해 심적으로 지쳤는지, 마차의 문에 기대고 누워 있는 알렉시스 공녀와 루나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마차의 바퀴가 흙길을 굴러가는 소리와 규칙적으로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마차 안을 조용히 채워나가고 있었다.
“...선배님.”
기분이 나른해지는 일상의 선율을 깨고 들어오는 로빈의 말에, 나는 짐짓 찌푸렸던 미간을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왜.”
“선배님은... 어쩌다가 파티에서 나오신 거예요?”
“...내가 말 안해 줬던가?”
“나중에 알려 준다고만 하셨지, 정작 여태까지 입 밖에도 안 꺼내셨거든요.”
내가 너무 무신경 했던 걸까.
나를 향해 귀엽게 성을 내는 로빈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글쎄. 자세히 얘기하자면, 지난 3년간의 일을 전부 얘기해야 하겠지만...”
“엄... 생각해 보니, 굳이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야이 씹... 아니, 그냥 짧게 얘기하자면.”
내가 왜 파티를 나왔냐고?
“...그냥, 서로 안 맞았던 것뿐이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거면 된다.
그녀들과 나는, 마치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서로에게 상극 이었다.
크게 의식주 에서부터 시작해서, 전투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의견 차이도 컸고, 전투 방식도 다르고... 안 맞았어. 그냥... 원래 인간 관계 라는 게 그런 거지.”
마치 운명의 신이 점지해 준 것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어느 경계에서도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악연도 있는 법이라고.
이제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척후를 찾을 것이 아니라 잡일 담당을 찾았어야 했다.
“언제부턴가 나한테 잡일을 죄다 떠맡겨 버리고, 내가 정찰하러 갈 때면 구박이나 해대고... 어...”
밥 지어라. 빨래 해라. 너는 대체 하는 게 뭐냐.
“...갑자기 성질 뻗치네, 씨팔. 애미 뒤진 년들 아냐.”
용사 파티에 몸을 담고 있었던 시절을 떠올릴 수록, 점점 골이 땡기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원래 이렇게 험한 입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진짜다.
“어... 대충 알 것 같아요.”
“알았으면 됐고.”
내 이야기를 들은 로빈은,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그런데... 이렇게 멋대로 파티를 나와도 되는 건가요? 아무리 그래도, 마왕을 처리하는 건 국왕 폐하의 명을 받고...”
“몰라. 뭐, 폐하께서 꼬우시면 나를 체포하시던가 하겠지. 나는 이제 온전히 나를 생각하면서 살아갈 거다.”
“...애초에 용사 파티에는 왜 들어 가셨던 건데요?”
조금 날카로운 질문인걸. 역시 내가 직접 가르친 사냥개 다워.
“글쎄. 세상을 이곳저곳 돌아다녀보고 싶다던가, 레인저의 대원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모험을 떠나보고 싶다던가... 이유라면야 여러 가지 있는데, 제일 중요한 건... 이거지 이거.”
내가 검지와 엄지를 말아 보이자, 나를 바라보는 로빈의 시선이 조금 차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고작 돈 때문에 그러셨다구요?”
“고작 돈이라니. 너는 인생에서 돈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르는구나?”
내가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별안간 마부석쪽에 달린 창문을 통해 로이먼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형제님... 옛날부터 말씀 드렸지만, 형제님께서는 진정으로 신앙심을 가져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과도한 욕심은 결국 칼이 되어 돌아온다는 저희 교의 교리는...”
또 저 얘기야. 또.
7살 때, 흙투성이가 되어 버린 내 꼴을 본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던 심정 이랄까.
로이먼이 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틀에 박힌 구시대적 사고 뿐이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형제님. 듣고 계십니까?”
“어... 어? 듣고 있지. 그럼. 계속 말 해.”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선, 저와 함께 교회에 다니며 신앙심을 기둥으로 삼는 것을 시작으로...”
“로이먼... 뭘 모르는구나.”
아무래도, 이 친구들은 하나같이 돈을 길가의 돌멩이 정도로 보는 모양 이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말이야. 돈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내 말이 틀려?”
“그건... 아니, 맞습니다. 예.”
“로빈. 너도 뼈에 새겨둬.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이야. 내 인생의 좌우명 이기도 하지.”
“...선배님은 참. 인생 올곧게 살아 오셨네요.”
“내가 좀 멋있게 살아오긴 했지.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런 실없는 소리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내 마음 한 켠에는 로이먼과 로빈, 루나, 알렉시스 공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게 진짜 동료라는 것이 아닐까.
어느 해질녘이 된 지평선 너머로는, 로빈의 머리색 같은 주홍빛이 하늘을 적시고 있었다.
메텔하임에 도착하면... 레인저에 있는 교관 누나한테 먼저 들러야지.
“...그러고 보니, 그 아저씨는 뭘 하고 있으려나...”
별을 쫓아 온 세상을 돌아다녀 봤다는 해괴한 소리를 하며, 멋들어진 검술 실력을 보여주었던 한 기사 아저씨.
홍조를 띄운 채 천천히 사라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리운 과거의 추억에 잠기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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