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25. 강철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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퀼른을 떠난 지, 벌써 4일이나 지났다.
낮에는 적당히 빠른 속도로 마차를 몰고, 밤에는 천막을 치고 말먹이를 주며 여정을 이어나간 우리는 퀼른을 떠난지 4일 만에, 지도로 점찍어 두었던 중간 목적지인 성채도시 벨리온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가... 강철의 도시, 벨리온.”
메텔하임에서 곧바로 멜데른 숲으로 간 것이 아니라 3년 동안 전선에서만 싸워온 통에, 나 역시도 벨리온에 대한 이야기는 소문으로만 들어 봤었다.
퀼른에서 동남쪽으로 4~5일 정도 되는 거리에, 철이 무진장 많이 나오는 광산 도시가 있다더라.
메텔 왕국 철강 생산량의 2할가량은, 이곳 벨리온에서 나온다더라.
철이 얼마나 남아도는지, 성문과 성벽 외부를 전부 강철로 덮어 씌웠다더라.
머나먼 과거, 대륙 중부에서부터 송곳 산맥까지 이르는 거대한 지역을 호령했던 드워프들이 세운 고대의 성채 도시.
“와. 진짜 감탄밖에 안 나온다. 이렇게 거대한 도시를, 어떻게 그 까마득한 옛날에 세울 수가 있었을까?”
웅장한 산맥 사이에 지어져 있는 거대한 강철의 성벽에 감탄하며 말하자, 나와 함께 마부석쪽 창문에 찰싹 붙어 있던 로빈이 입을 열었다.
“드워프들이 그렇죠. 손재주 빼면 시체인데.”
“...너 도시 안에서도 그렇게 말 하면, 아마 자는 사이에 망치로 골통이 깨질지도 몰라.”
“제가 옛날에 드워프 대장장이한테 사기를 당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드워프들만 보면 별로 좋은 생각은 안 드네요.”
“말은 그렇게 해도, 성벽에서 눈을 못 떼는 구만.”
“...딴건 몰라도, 저 성벽 만큼은 인정. 세상에, 어떻게 저런 도시를 지었대.”
성문 앞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마차들의 행렬의 끝자락에 마차를 세운 우리는, 산자락 사이에 껴 있는 강철의 도시, 벨리온을 바라보며 너 나 할 것 없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벨리온 특유의 옥빛 강철로 덮어 씌워진 성벽은, 산등성이 너머로 떠오르는 아침의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벨리온산 강철이 옥빛을 띄는 이유가, 벨리온에 뻗어져 있는 광맥들이 마나를 머금고 있어서 그렇다죠?”
내가 고개를 돌려 알렉시스 공녀를 바라보며 묻자, 알렉시스 공녀 역시 로빈과 마찬가지로 도시에서 눈을 못 떼고 있었다.
“광맥 자체가 자연적으로 마나를 머금고 있어서, 마나 감응력이 높아 재련할 때 마나를 주입하기도 무척 쉽다고 들었어요. 저도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요.”
대체로 일반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은 신용하기 힘들지만, 이번 만큼은 진짜였나 보다.
알렉시스 공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려보니, 마찬가지로 창문에 딱 붙어서 도시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루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신기하냐? 하긴, 나도 신기한데 너는 오죽 하겠어.”
“어떻게 저런... 인간들에게 이 정도의 기술력이 있었단 말인가? 저 정도 기술력은 마왕군에도...”
“어... 정확히는 고대 드워프 들의 기술력인데.”
“아... 아무튼, 놀랍다! 고작 해야 퀼른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건만... 어서 들어가보고 싶다!”
“그건...”
문을 살짝 열어 고개를 빼꼼 내밀면, 정말이지 끝도 없이 늘어선 마차들의 행렬이 눈에 들어온다.
이래서야, 늦은 점심때는 돼야 들어갈 수 있겠는데.
“...거 존나게 막히네. 마차 검문이라도 하고 있나?”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햇볕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벨리온의 성벽을 바라보며, 우리는 끝없이 늘어서 있는 마차의 행렬 속에서 우리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 * * * *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고 어느덧 해가 뉘엿 뉘엿 질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벨리온의 성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아니. 우리가 범죄자도 아니고, 무슨 마차 검문이 10분이 넘게 걸려?”
해질녘에 빛나는 벨리온의 모습도 참으로 가슴이 웅장해지기는 했다만, 예상보다 시간이 훨씬 더 지체되고 말았다.
내가 애꿎은 수비대 병사를 흘겨보며 투덜거리자, 로빈이 조금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선배님. 우리 범죄자 맞거든요...”
“야. 그건 알비온 백작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잖아. 따지고 보면, 알비온 백작님께서 영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게 문제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그런 억지가...”
“아, 몰라. 알비온 백작님이 주범이야. 난 모르는 일이야.”
...어째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일행들의 시선이 내 옆통수를 쿡쿡 찔러대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그녀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무튼, 내가 그렇게 지랄판을 벌여놓고 퀼른에서 탈출 했으니까, 아마 용사와 다른 파티원들이 나를 찾으려고 어떤 개 같은 수를 써 놨을지 몰라. 메텔하임으로 가는 동안에는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지나 가자고.”
여기서 덜미를 잡히는 건 사양이니까 라고 말하며, 나는 마부석쪽에 앉아 있을 로이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이먼. 우리가 머물 여관은 너무 구석탱이만 아니면 괜찮으니까, 다른 상점가와 적당히 가까운 곳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로이먼 역시 벨리온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나는 천천히 마차를 몰고 있는 로이먼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평판이 가장 괜찮은 여관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쓰읍... 약도를 발로 그렸나. 이건 너무한데.”
지나가는 행인에게 건네받은 약도를 보며 길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건네받은 약도가 개발 새발로 그려진 탓에 우리는 여관으로 향하는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이 괴상한 문양은 뭘 뜻한단 말인가. 벨리온은 초행길이니, 알 턱이 있어야지.
로빈과 머리를 맞대고 한참 동안 약도를 노려보았지만, 결국 마왕군의 암호문에 버금가는 약도를 해독하는 것을 포기한 나는 마침 우리 쪽을 지나치는 곡괭이를 짊어진 드워프를 향해 소리쳤다.
“저기요! 거기 드워프 아재! 혹시 주정뱅이 늑대 여관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
내가 소리치자, 피곤한 눈을 흘기며 나를 잠시 쳐다보던 드워프는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다시 제갈길을 가기 시작했다.
내 말을 못 들었나? 아니, 분명히 내가 소리치는 것을 듣고 나를 쳐다봤는데.
“저기요! 잠깐 길 좀 물읍시다!”
결국 마부석에서 내려 조금 전 내 말을 무시한 드워프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니, 드워프는 그제야 치렁치렁한 수염을 출렁거리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뭔데.”
근데, 이 씨발련이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이 ㅆ... 아니... 다름이 아니라, 혹시 주정뱅이 늑대 여관이라는 곳이 어디 있는지 아시는지...”
순간 육두문자와 함께 주먹이 뻗어 나갈 뻔했지만, 내 처지를 생각해서 간신히 참아낼 수 있었다.
용사 파티로 돌아가는 건 절대 사양이다. 절대로.
“...주정뱅이 늑대 여관.”
“네 네. 주정뱅이 늑대 여관이요. 듣자 하니, 그 여관이 그렇게 좋다면서요? 1층에서는 술도 팔고, 상점가도 가깝고.”
“...내가 왜 알려 줘야 되는데.”
참아라, 오스틴. 참아.
너는 지금, 이래나 저래나 도망자 신세야. 눈에 띄는 짓을 했다가 만에 하나라도 용사와 똘마니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상황이 귀찮게 된다고.
이마에 솟아오른 핏줄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간신히 억누른 나는, 스스로의 인내심에 내심 대견해하며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하하... 재미있는 농담이네요. 그러지 마시고,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멍청하긴... 고작 그런 걸로 불러 세운 거야? 귀찮게.”
어쩐지, 로빈이 가지고 있던 드워프들을 향한 편견이 나의 내면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는 것 같았다.
참아라, 오스틴. 레인저 시절에 나를 좆같이 굴려댔던 뺀질이 선임도 잘 참아 냈잖아.
“조금 예민하시네. 하하... 그냥 위치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예?”
“나는 몰라. 바쁜 드워프 붙잡지 말고, 너처럼 시간이 남아도는 얼빠진 놈들한테 물어보던가.”
모르면 처음부터 그냥 모른다고 하라고. 이 난쟁이 새끼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문 노력 덕분에 간신히 얼굴의 미소를 내리지 않을 수 있었다.
내게 매섭게 쏘아 붙인 드워프는, 내 손길을 뿌리치고 어깨를 툭툭 털며 제갈길을 가기 시작했다.
...죽일까.
죽이자.
내가 천천히 멀어지고 있는 드워프를 향해 한 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마차에서 내린 로빈과 루나가 내 허리를 껴안으며 나를 멈춰 세웠다.
“선배님. 일단 칼은 집어 넣으세요.”
“...놔.”
“참아라, 오스틴. 드워프라는 족속들은 원래 신경질적이지 않나. 소란을 피우면 우리만 손해다.”
“알겠으니까, 이거 놔.”
루나와 로빈이 사정 사정을 한 덕분에, 나는 조금씩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마차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분 개 좆같네. 드워프들은 원래 저렇게 싸가지가 없나?”
내가 로이먼의 옆자리에 앉으며 성질을 부리자,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알렉시스 공녀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오스틴. 저희 아카데미의 대장간에 계신 드워프 장인님도 조금 예민하세요.”
“원래 저런 족속들 이라는 거네. 왜 나한테 저렇게 꼬라지를 부리는 건가 했어.”
“선배님... 아까는 저한테 편견 가지지 말라고 하시더니.”
“아니, 나는 드워프를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랬지.”
메텔 왕국에서 용사의 파티원을 뽑을 때 드워븐 왕국에서도 지원자가 왔었지만, 대진표에서도 맞붙었던 경험이 없는 나는 오늘 드워프를 처음 봤다.
드워프들의 첫 인상이 저 지랄이니, 내 머릿속의 드워프들에 대한 평가는 이미 바닥을 기고 있었다.
“어차피 식량이나 생필품만 사려고 들른 거니까, 3일 정도만 쉬고 가자.”
다행히, 다음번에 길을 물어본 사람은 우리에게 친절히 길을 알려 준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주정뱅이 늑대 여관 뒤에 마차를 세울 수 있었다.
며칠간의 마차 여행으로 피곤했던 우리는, 마차 바퀴를 자물쇠로 단단히 잠그고 말을 마굿간에 넣은 뒤, 여관의 문을 힘없이 밀었다.
이제 드워프들을 볼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왁자지껄한 여관의 1층은 주점으로 되어 있었고,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는 테이블들 사이로 수염이 덥수룩한 키 작은 아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제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 쪽을 돌아보는 드워프들의 시선에, 나는 순간 다리가 풀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었다.
누가 나 좀 죽여 줘.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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