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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26화 (26/106)

〈 26화 〉 26. 화는 만병의 근원

* * *

“이봐! 거기 방금 들어온 애송이! 잠깐 일로 와봐라!”

“...아. 골땡겨.”

여관으로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우리에게 시선을 돌린 드워프 무리들 중 한 놈이 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21년 인생 중에서, 처음 조우한지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은 드워프라는 족속들에 대한 내 평가는 이미 바닥을 기다 못해 지표면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이 씨발년들은 벨리온에서 대체 어떻게 인간들과 더불어 살아가는걸까.

심지어 지금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는 드워프들의 무리 속에는, 불과 한 시간 전 길거리에서 싸가지없게 대답하던 드워프도 있었다.

너 여기 어딘지 모른다며. 이 씹년아.

내가 못들은 체 하며 무시 하자, 나를 부른 드워프는 술에 취해 빨갛게 달아오른 코로 콧김을 뿜어대며 쉴 새 없이 수염을 움직였다.

“이봐! 거기 너! 내가 부르는데 빨리 안 오고 뭣하는 거야!”

무시하자. 무시가 답이다.

나는 그대로 드워프들을 무시하고, 여관 주인에게 방값을 건넨 후 열쇠를 받아 일행들과 함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본디 내 성질머리 대로 였다면, 이미 로이먼에게 인근에서 시체를 묻을 만한 조용한 야산을 알아보라고 시켰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조용히 쉬다가, 조용히 나가야 하는 처지다.

나는 화를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가뜩이나 길거리에서 싸가지를 갈아 마셔버린 난쟁이 새끼를 만나는 바람에 기분이 바닥이었는데, 이제는 대놓고 시비를 거는 땅딸보 새끼들 때문에 내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즐거운 생각을 하자. 내 인생에서 즐거웠던 시절을.

레인저에서 처음으로 만발을 쐈을 때.

나를 이유도 없이 갈궈대던 선임 레인저를, 전선에서 슬쩍 묻어 버렸던 상쾌한 추억.

불과 며칠 전, 퀼른을 탈출하던 도중 용사와 똘마니 년들을 대놓고 엿 먹였던...

“...크흐흐.”

뜨거운 스튜처럼 부글거리던 속 위로, 그간의 행복했던 추억들이 중화제가 되어 미적지근하게 식혀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나를 보고 겁쟁이라며 시시덕대는 땅딸보 새끼들을 무시한 채, 우리는 남녀로 나뉘어 각자의 방에 짐을 풀고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와... 선배님. 저는 선배님이 이렇게 화를 잘 참으실줄은 몰랐어요. 다시 봤어요. 정말.”

나도 화 참느라 돌아가시는 줄 알았단다. 로빈.

“억지로 화를 참으면 몸에 좋지 않다. 3일 씩이나 쉬다 갈 필요도 없으니, 필요한 물건들을 보충하는 대로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군.”

“그래 그래. 고맙다. 역시 루나밖에 없네.”

내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충 고맙다는 말을 하자, 루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곤 내 옆으로 슬쩍 다가와 앉았다.

“...알면 됐다. 아둔한 놈.”

“너는 왜 또 삐지고 그래?”

“그렇게 대충 대답하면, 누구라도 기분이 안 좋아 지는 법이다.”

대충 대답한 게 들켰나. 예리하긴.

“...어찌 됐건, 이제 다들 지도에 집중해 줘. 루나의 말마따나 3일 씩이나 쉴 필요는 없어 보이니까, 지금 미리 다음 행선지를 짜 두는 편이 좋아.”

나는 바닥에 놓인 지도를 탁탁 두들기며 흐트러진 시선들을 다시금 한 곳으로 모았다.

“잘 봐. 우리는 퀼른에서부터 4일 정도 되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강철의 도시 벨리온에 있어. 위치는... 여기.”

우리가 지금 위치 해 있는 벨리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모두 내 손가락으로 시선을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바로... 여기. 메텔하임.”

그대로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쭉 옮겨, 메텔 왕국의 동부에 위치한 메텔 하임을 가리킨다.

“로빈은 어차피 따로 갈 곳도 없으니 나와 함께 다니고 싶다고 했고, 루나도 마찬가지잖아?”

“음... 그 말이 맞다.”

“그렇지? 알렉시스 공녀님 께서는 아카데미의 방학 기간이 얼마 남지 않으셨고... 로이먼은 따로 목적지가 있어?”

“사악한 존재들을 섬멸할 수만 있다면, 목적지가 어디든 개의치 않습니다. 저도 형제님과 동행하고 싶군요.”

“음. 수도까지 가는 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을 테니까, 전력은 강할 수록 좋지.”

퀼른에서 정기 운송편 마차를 탔다면 조금 더 순탄한 여행길이 되었겠지만, 이렇게 따로 소규모의 인원으로 마차를 이용하게 된다면 도적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비록 거렁뱅이 도적 새끼들이 우리들의 상대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로이먼이 있다면 훨씬 든든해진다.

“그러니까, 다음 목적지는... 여기.”

다시 손가락을 왼쪽으로 밀어내리며, 벨리온에서 마차로 5일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도시를 가리켰다.

“상인들의 도시, 하르만. 다음 목적지는 여기다.”

* * * * *

어두컴컴한 방 안.

창문 위로 강박적으로 쳐져 있는 암막은, 단 한줄기의 빛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돋보인다.

­ 끼익

별안간 깜깜한 방 안으로 눈이 부실만큼 들어차는 빛줄기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 미동도 하지 않던 용사, 이유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시야를 가렸다.

“또 이렇게 불도 안 켜고... 용사.”

“...난 용사같은 게 아니야.”

“하아...”

여전히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무릎에 머리를 파묻은 용사를 보며, 아드리엔은 한숨을 내뱉으며 손에 들린 바구니를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Flóga(불꽃).”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마법 영창 방식인 룬 문자가 아드리엔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곧이어 아드리엔의 손바닥 위로 작은 불꽃이 일렁였다.

창문위로 음침하게 늘어져 있는 암막을 걷어낸 아드리엔은, 곧이어 손바닥의 불꽃을 촛불의 심지로 옮겨 붙이며 입을 열었다.

“용사. 오스틴이 떠나서 이렇게 침울해진 건 이해하는데,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오스틴은 아가일을 토벌한 뒤에 찾아도 늦지 않으니까...”

“나는 용사가...”

“그 말은 이제 그만해!”

오스틴이 퀼른을 떠난 지, 벌써 3일이나 지났다.

오스틴이 마차를 훔쳐 달아나는 미친짓을 감행한 날 이후로, 용사는 매사에 의욕을 잃은 채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나날을 이어가고 있었다.

침울해지다 못해 흘러내릴 것 같은 용사의 태도에, 아드리엔은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용사... 네가 왜 갑자기 오스틴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우리가 오스틴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는 것은 나도 잘 알아.”

“......”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있잖아. 오스틴도 네가 이렇게 축 늘어져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걸 바라지는 않을 거야. 응?”

아드리엔의 상냥한 말투에, 용사는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을 들어 올려 아드리엔을 바라보았다.

‘...조금 심하네.’

여기저기 말라 붙은 눈물 자국은 그녀의 모습을 더욱 초췌하게 만들고 있었고, 너무 울어 부어 버린 눈가는 그녀가 흘린 눈물을 어림잡을 수 없을 만큼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아드리엔. 너는... 미안하지도 않아?”

“그건...”

“오스틴은 우리 때문에 파티를 떠난 거야. 우리가 그런 태도로 오스틴에게 상처를 줘서... 너는 앞으로 평생 오스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

용사의 말에, 아드리엔은 잠시 눈을 감고 오스틴의 얼굴을 떠올렸다.

밝은 갈색의 머리와 푸른 눈동자... 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어...?”

그게 전부였다.

어느새, 아드리엔의 머릿속에서는 오스틴을 천천히 지워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왜? 갑자기?’

오스틴의 얼굴을 본 세월만 3년. 그 3년 동안, 그녀는 오스틴과 함께 울고 웃으며 모험을 이어나갔다.

3년. 무려 3년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드리엔의 머릿속에서는 오스틴이라는 존재는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지워져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는 그의 얼굴.

분명 3일 전까지만 해도 단번에 떠올릴 수 있었던 그의 얼굴이, 불과 며칠만에 눈과 머리카락만을 남긴 채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오스틴이, 어떻게 생겼더라...?

애초에, 나는 파티에서 왜 오스틴을 구박했더라?

내가 원래 쇠뇌를 쓰는 사람을 싫어했었나?

“아드리엔...? 너, 눈에...”

별안간 허벅지를 차갑게 두들기는 감각에, 아드리엔은 상념에서 짜져 나올 수 있었다.

“어... 어...? 내가 왜 울고 있...”

무언가 이상하다.

“요... 용사! 나 잠깐 마야좀 찾고 올게!”

다급하게 눈물을 훔친 아드리엔은, 용사의 대답도 듣지 않고 황급히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젠장... 느낌이 안 좋아.’

조금... 아니, 무언가 많이 이상하다.

머릿속을 헤집는 위화감에 메스꺼워진 아드리엔은, 간신히 구역감을 삼키며 길을 내달렸다.

마야라면, 이 상황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 * * * *

이곳 주정뱅이 늑대 여관에서는 1층에서 음식과 술도 판다고 했으니, 굳이 식당까지 나갈 필요도 없이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편의 시설은 가격에 비해 참 좋다. 상점가도 가깝고... 여관을 잘 고르긴 했는데...

“내가 부르는데 감히 무시하고 그냥 가?! 간땡이가 부었구만!”

“아하하... 일단 진정하시구요. 제가 귀가 안 좋아서 그랬습니다. 용서 해 주시죠.”

“귀가 안 좋은 건 내 알 바 아니고! 네가 내 말을 무시했다는 게 중요한 거야!”

이 씨발 말도 안 통하는 건방진 드워프 새끼들은,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꽤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말뚝을 박고 술을 퍼 마시고 있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우리를 발견한 드워프 새끼들에게 붙잡힌 나는, 눈물을 삼키며 그들의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놈 표정이 왜 이래? 야! 내가 말하는 게 아니꼬운 거야!”

“아... 아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 근데, 저희도 이제 밥 좀 먹으면...”

“안 돼 안 돼. 너 같은 놈은 밥을 먹을 자격이 없어.”

이 씨발 꼰대 새끼가...

아니지. 참아라, 오스틴.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

그리 생각하며 심호흡을 하고 있으니, 입꼬리를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분노를 억누를 오스틴의 등으로 시선이 모였다.

“오호... 너, 답지 않게 쇠뇌를 쓰나 보군?”

“예? 아­ 제가 활은 잘 쏘지 못해서 말입니다. 쇠뇌가 쓰기도 편하고...”

“잠깐 봐줄게! 이리 줘 봐!”

채 거절하기도 전에, 내가 가장 애용하는 쇠뇌는 이미 털북숭이 드워프들의 손에 넘어간 뒤였다.

“야이 ㅆ...”

이 씨발, 사람 허락도 안맡고 낼름 쳐 가져가?

언제나 정성스레 손질하고 관리했던 내 쇠뇌가, 저 싹퉁바가지 없고 마음에 안 드는 드워프들의 손에 더듬거려진다고 생각하니, 절로 눈깔이 휘까닥 돌아갈 것 같았다.

“흐음... 미스릴 합사를 사용한 건가? 솜씨가 굉장한데.”

“어디! 나도 보여 줘 봐!”

이번에는, 길거리에서 나를 대놓고 무시했던 드워프의 손에 넘어갔다.

근데, 저 새끼 손에 꼬치 양념이 덕지 덕지 묻은...

­ 뚝.

“...야.”

“으흠... 상당히 견고하게 만들어졌... 응? 나?”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내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간 채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로이먼. 가서 문 잠궈.”

“예, 형제님.”

로이먼이 벌떡 일어나 여관의 출입구로 뚜벅 뚜벅 걸어 나가고, 눈치가 좋은 로빈은 어느새 여관 주인에게 입막음 비용을 건네주고 있었다.

“방금 내 쇠뇌 만진 새끼들. 거수.”

“...뭐라는 거야? 야! 그만 만지고 나도 좀 줘 봐!”

나는 정말로 화가 나면, 오히려 웃음이 나오는 편이었다.

“숨지기 싫으면 내 쇠뇌 내놔. 이 씹만할련들아.”

술자리에서, 싸움이 빠져서는 안 되거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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