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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28화 (28/106)

〈 28화 〉 28. 장비는 소중히, 인연은 더 가까이

* * *

여느 때와 다르게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인 방 안에서, 남자는 간헐적으로 반짝거리는 수정구들을 바라보며 운을 떼었다.

“칼라스가 당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곧이어 각기 군단장들에게 연결된 수정구들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반짝이기 시작했다.

­ 칼라스가... 으음...

­ 칼라스가 당했다고? 아니, 아가일. 용사는 네가 붙들고 있다고 말 하지 않았어?

­ ...용사는 아직 퀼른에 있어. 이건 확실해.

몇몇은 헛숨 들이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몇몇은 저들끼리 되는 대로 입을 떠벌리는 통에 혼란이 가중 되고 있었다.

칼라스의 죽음을 보고한 아가토는 한숨을 내뱉으며, 8개의 수정구 중 빛이 들어오는 4개의 수정구를 둘러보았다.

“아니, 아니...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야? 칼라스가 뭐?”

평소답지 않게 평정심을 잃은 아름다운 미성의 목소리에, 아가토는 시선을 돌려 그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다시 말 해 줘야 되나?”

“...칼라스가 당했다고? 확실해?”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전선 뒤쪽에 있는 정화의 구덩이에서 칼라스의 생명 신호가 끊겼어.”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녀를 비롯한 다른 군단장들이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평소 칼라스의 신들린 예지 능력에서 비롯된 믿음 때문이었다.

까맣게 반짝이는 오른눈으로는 차원과 공간을 찢고, 하얗게 타오르는 왼눈으로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볼 수 있었던 칼라스의 죽음은, 참모장 아가토의 호출로 모인 군단장들을 동요 시키기에 충분했다.

평소 칼라스와 자주 투닥거리던 제 5 군단장, 애쉬는 붉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다시금 수정구를 반짝였다.

“아가토. 가까운 미래를 점지할 수 있는 칼라스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몇 안 돼. 우르간의 말마따나 용사가 저지른 짓도 아니라면, 대체 누가 칼라스를 죽였다는 건데? 나는 우상도 몇 개 안 남았단 말이야!”

“일단 다들 진정해. 안 그래도 말 해주려던 참 이었으니까.”

아가토의 힘이 실린 한마디 덕분에, 애쉬를 비롯해 혼란스러웠던 좌중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윽고 분위기가 완전히 진정된 듯 보이자, 아가토는 다시금 모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시기상으로 봤을 때, 별의 기사가 저지른 짓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

아가토의 입에서 별의 기사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순간 수정구들의 빛이 확 꺼지며 침묵을 드러냈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지고, 이번에는 애쉬의 수정구가 아닌 또 다른 수정구가 빛을 발하며 제 4 군단장, 우르간의 무겁고 낮은 음성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놈이 대체 왜 우리를 건드리는 거지? 칼라스가 놈의 반려를 건드린 적은 없던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 쪽 참모들도 자세한 원인은 몰라. 헌틀리가 시체를 수거하러 갔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명확한 내막이 드러날 거야.”

“놈의 행동은 정말이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군. 통제할 수도 없는 힘은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된다.”

“...동감이야.”

우르간의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구구절절 맞는 말에, 아가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상석에 위치한 수정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몬타. 네 생각은 어때?”

“...”

언제나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기는 하지만 입은 닫고 귀만 연 채로 묵묵히 앉아만 있는 몬타의 태도는, 회의를 주재해야 할 아가토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제 1 군단장, 벼락의 검 몬타.

마왕에게 거두어진 최초의 마족.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마왕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마왕에게서 직접 명령을 받는 몬타는 참모장인 아가토에게 명령을 받는 다른 군단장들과 격을 달리한다.

때문에, 그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옴에도 불구하고, 아가토는 그다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성실히 참석하는 게 어디야.’

“아무튼. 헌틀리가 시체를 수거하는 동안, 갈란이 헌틀리 대신 전선에 투입될 거야. 이의는 없지?”

그러자, 잠시나마 조용해졌던 수정구들이 다시금 떠들썩하게 빛을 반짝였다.

“갈란은 좀...”

“으음... 갈란이 전선에... 되도록 북쪽 전선으로 보내 주었으면 좋겠군.”

“으엑?! 야! 우르간! 너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어?! 왜 하필이면 북쪽으로 보낸다는 거야! 남쪽으로 보내!”

“이게 다 애쉬, 네가 있는 전선이 지지부진 하기 때문 아닌가. 명색이 불꽃의 잔재라는 마녀가, 고작 인간놈들 때문에 쩔쩔매는 꼴이라니...”

“야! 나는 부활한지 얼마 안 됐잖아! 너도 용사한테 죽었던 주제에 그렇게 나오는 거야?!”

바쁘게 반짝거리는 수정구들을 바라보며, 아가토는 이마를 짚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 * * * *

“아직 멀었냐?”

내가 모그단을 향해 쏘아 붙이자, 모그단은 움찔­ 하고 몸을 움츠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금만 더 걸어가면 돼... 요...”

“쯧... 나니까 이렇게 좋게 좋게 넘어가는 거야. 나 아니었으면 너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뒤져 버렸을 수도 있어.”

“고맙다... 요...”

“됐고, 빨리 가기나 해. 그 잘난 드워프 공방 구경 좀 해 보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시간을 조금 되돌려 보자면, 나는 내게 씻을수 없는 분노와 모욕감을 줬던 모그단을 줘 패고, 자발적인 배상금(?) 을 받아 먹으려 했었다.

“그래서, 돈으로는 못 주시겠다?”

그런데, 이 수염만 덥수룩한 새끼가 돈이 없다고 징징거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돈이 없습니다...! 오늘은 고트렉이 술을 사는 날이라, 돈은 한 푼도 들고 오지 않았습니다...”

“으흠... 곤란한데.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너를 납작한 빵 처럼 만들 수밖에 없어.”

“그... 그런...!”

안 되겠다. 이 새끼는 정말이지 갱생이 불가능한 놈이다.

“다음 생에는 꼭... 네 성깔 머리에 맞게 짐승으로 태어나렴...”

“잠시...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꾸드득­ 주먹을 움켜쥐고 들어 올리니, 모그단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도... 돈 대신! 다른 걸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여차 저차 하다 보니, 결국 우리는 모그단이 운영하고 있다는 공방에서 가지고 싶은 것들을 원하는 만큼 가져가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저 앞에서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모그단의 뒤를 따라 걷고 있자니, 로빈이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내게 다가왔다.

“선배님... 저는 이래도 괜찮을런지 모르겠네요.”

거참. 얘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솔직히 나도 어지간해서는 참으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굳이 왜 참아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

물론, 나도 처음에는 소란을 일으켰다가 용사의 귀에 들어가거나 수비대에게 붙잡히면 귀찮아질 것 같았기에, 조용히 사리다가 떠나려고 했었다.

“로빈. 너도 잘 알겠지만, 나는 내 성질을 벅벅 긁어대는 놈들은... 뭐. 어떻게든 참을 수는 있어.”

“네, 뭐...”

“그런데 말이야... 이 새끼들이 내 쇠뇌를 건드렸잖아. 그걸 어떻게 참겠냐고.”

“......아?”

내 옆에서 걷던 로빈, 심지어 우리 뒤에서 따라오던 알렉시스 공녀 마저도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에 익은 무기는 제 2의 심장이다.

내가 레인저에 몸을 담고 있던 시절, 뼈저리게 와닿았던 말 중 하나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두들겨 팼다면 문제가 됐겠지만, 수비대들도 어지간해서는 술집에서 벌어진 싸움은 관여하지 않는다고.”

사실 그것 말고도, 알렉시스 공녀의 뒷배를 믿고 신나게 두들겨 팬 것도 있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으니까.

아직도 여관에서 신음하고 있을 드워프들은, 뭐...

여관 주인에게 치료비까지 묵직하게 얹어 주었으니,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것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걷다 보니, 앞장서서 걷던 모그단이 깜깜해진 길목에서 랜턴 불빛이 반짝이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 여기가 네 공방이야?”

“...열쇠가 어디 있더라... 으음...”

나는 주머니를 뒤적이는 모그단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마력 코일의 등불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집을 향해 바삐 눈을 움직였다.

석재 벽돌과 잘 손질된 나무 기둥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집은, 문 위에 모루와 늑대 형상의 문양이 그려진 문패가 걸려 있어, 척 봐도 대장장이의 공방 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져 왔다.

“끄응... 지금은 손님을 받는 시기가 아니지만... 읏... 차!”

­ 철컹

단단하게 걸어 잠긴 자물쇠가 풀리고, 건물에 비해 상당히 커다란 문이 육중하게 끌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들어오쇼! 거참... 청소도 안 했는데...”

이 새끼가 어쩐지 아까부터 불안 불안 하더라니, 기껏 교정해 두었던 주둥이가 어느새 반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무래도, 장기적인 물리 치료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게 모그단의 퉁명스러운 손짓을 따라 집 안을 들어가니, 집 안 곳곳에 비치되어 있는 랜턴으로 마나가 스며들기 시작하며 빛을 발했다.

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오니, 앞장서서 걸어 들어가 불을 밝힌 모그단은 여기저기 덮여져 있는 하얀 먼지덮개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와.”

마치 도서관의 책들처럼 잘 정렬되어 있는 무기들과, 그런 무기들을 담고 있는 고풍스러운 진열장이 눈에 띄었다.

단검, 장검, 숏소드를 비롯한 모든 도구와 장비들이 차분하게 정렬되어 있는 모습은, 나름 칼밥을 먹고 살아온 나로서는 상당히 흥분되는 광경 이었다.

“...너 가죽 공예도 할 줄 알아?”

“어릴 적에 스승님께서 운영하고 계시는 가죽 공방에서 무두질부터 배웠지. 드워븐 왕국에서 나름 잘나가고 있다고.”

재료, 양식 순으로 거치대에 주르륵 걸려 있는 중갑들과, 여행 중 각종 편의를 보장해 줄 가방이나 지갑을 비롯한 가죽제 물건들까지.

벽 곳곳에 걸려 있는 화려하고 정교한 무기들은, 마력 코일 랜턴의 불빛에 힘을 얻어 특유의 옥빛을 발산하며 영롱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머 어머... 세상에...! 선배님! 이 단검좀 보세요!”

“마침 창이 필요했던 참인데... 확실히 모두 품질이 우수하군. 잘 됐어.”

로빈과 루나가 호들갑을 떨며 눈을 빛내자, 모그단이 콧김을 뿜어대며 수염을 흔들었다.

“크흠... 어때? 이래 봬도, 나름 빚져서 차린 가게야. 벨리온에서 내 손재주를 따라올 놈은 거의 없을걸.”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그단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최고야.”

어디, 돈 걱정 없이 쇼핑 한번 해 보자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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