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29.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 * *
진열장 사이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며 장비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로빈이 또다시 양손에 단검을 한 자루씩 거머쥔 채로 내게 다가와 눈을 빛냈다.
“으음... 이 쪽도 괜찮고, 이 쪽도 괜찮은데... 선배님! 이거 두 개 중에서 어떤게 더 좋아 보여요?”
“그냥 둘 다 챙겨. 품질도 또이 또이 하네.”
대체 몇 번째 인지 모르겠는 로빈의 단검 품평회가 끝나고, 이번에는 루나가 창 한 자루를 꼭 붙잡고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오스틴. 어... 어떤가?”
“응. 날이 예리한 게, 아주 잘 들겠어. 무게도 적당히 가볍고. 이걸로 하자.”
“그렇지만... 으음... 조금만 더 보고 오겠다!”
“...아.”
아무래도, 나는 여자들의 쇼핑을 너무 얕본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에 가까워지는 시간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루나와 로빈은 알렉시스 공녀까지 끌어들여 우르르 몰려 다니고 있었다.
그동안 나도 벨리온제 강철 볼트와 오리하르콘 볼트를 보충하고, 겸사 겸사 내 손에 맞는 예비용 무기를 찾기 위해 진열장을 이곳저곳 돌아다녀 봤지만, 어쩐지 썩 손에 맞는 무기가 없어서 볼트만 채워 둔 상태였다.
그러니 이렇게 쇼핑이 일찍 끝났지.
“나 참. 벨리온 최고의 공방 이라더니, 어떻게 내 손에 맞는 무기가 없냐.”
그렇게 무거워진 눈꺼풀에 힘을 주어 애써 견디고 서 있자니, 내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모그단이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나를 불렀다.
“으으음... 저기...”
“응? 왜.”
“이런 말 하기에도 조금 그렇지만... 설마 저걸 다 가져갈 생각은 아니겠지?”
모그단의 뭉툭한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묵직하게 쌓인 장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로빈과 루나가 마음에 드는 것들을 따로 꺼내놓은 모양인데, 얼핏 눈대중으로 훑어보아도 단검만 열 자루가 넘어 간다.
“왜. 가져가면 안 돼?”
내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자, 모그단은 어깨를 움찔 떨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아니... 가져가도 돼... 어차피 가게를 열 시기가 되면, 전부 헐 값에 팔았을 테니까...”
“그렇지. 바로 그 마음가짐이다. 모그단.”
세상에... 이 새끼가 정녕 싸가지 없던 모그단이 맞는가?
싸가지가 없고 예의 없는 것은, 정신병과 같다.
그리고, 나는 조금 전 모그단의 정신병을 치료(물리) 해 주었고.
“네가 드디어 짐승의 삶을 벗어 던졌구나...!”
“어... 음... 짐승...”
쿠당탕!
모그단이 드디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고 있자니, 무언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뭐야?”
급히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홀로 의자에 앉아 우리를 지켜보던 로이먼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로이먼. 졸리면 말을 하지 그랬어.”
“크흠... 아닙니다, 형제님.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아. 안 되겠다. 애가 막 아무 데서 벌러덩 드러 누우려고 하네.
나는 자꾸만 기울어지려고 하는 로이먼을 부축해 주며 발걸음을 옮겼다.
“야, 모그단. 우리 이만 가 봐야겠다. 로빈! 루나! 공녀님 모시고 슬슬 돌아가자!”
여전히 진열장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꺄르륵 거리던 그녀들은, 내 외침을 듣고 쪼르르 달려와 각자 고르고 고른 무기를 내게 선보였다.
“오스틴! 이걸 봐라! 이 창은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꼭 맞는다!”
루나가 고른 창은, 곡선으로 요동치는 유려한 창날이 마치 물결을 연상하게 만드는 날을 가지고 있었다.
찌르기와 베기, 두 가지의 공격 스타일에 모두 적합해 보이는 창을 든 루나의 표정도,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 이었다.
“오... 내심 퀼른에서 무기를 못 사준 게 걸렸는데, 손에 맞는다니 잘됐네.”
로빈은 평소에도 투척용 단검을 사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다고 투덜 대던 탓인지, 튼튼해 보이는 단검 꽂이 안에 투척용 단검들을 한가득 꽂아 놓고 있었다.
로빈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알렉시스 공녀에게 돌리니, 그녀는 등 뒤에 손을 숨긴 채 쭈뼛거리며 서 있을 뿐이었다.
“공녀님께서는 뭐 안 고르셨어요?”
“아... 그... 그게...”
“어... 아직 못 고르셨으면, 조금만 더 기다...”
“그... 그게 아니라...! 저기...”
마치 새끼 샐레맨더 구이를 먹은 사람처럼 말을 더듬거리던 알렉시스 공녀는, 이윽고 침을 꿀꺽 삼키며 등 뒤의 손을 꺼내었다.
“이... 이거! 오스틴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요...”
“...네?”
알렉시스 공녀의 말에 당황하여 얼빠진 소리를 낸 것도 잠시, 시선을 내리고 보니 내 숏소드와 비슷한 크기의 칼 한 자루가 손 위에 올려져 있었다.
홀린 듯이 칼집을 쥐고 손잡이를 당겨 보니, 스릉 하는 서슬 퍼런 소리와 함께 오묘한 빛깔을 내는 검신이 내 멍 때리는 얼굴을 비춰 주었다.
“...아니... 어?”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과, 꽤 유려한 외관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곧바로 검을 칼집에서 꺼내어 보니, 과연.
검 날도 예리하고... 수평도 맞고. 무게도 휘두르기에 안성맞춤이다.
주조 방식을 비롯한 폼멜과 크로스 가드 역시, 내가 선호하는 서 대륙식으로 만들어 진 숏소드였다.
“이... 이거다...”
나는, 드디어 내가 찾던 인생의 동반자를 찾은 것 같은 기쁨과 전율에 휩싸였다.
지금 쓰고 있는 숏소드도 사실 완벽하게 손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힘들게 찾은 서 대륙식 숏소드 였기 때문에 울며 화염 오리 구이 먹기로 쓰고 있었는데.
“이건 운명이야...! 아니, 어떻게 이렇게 손에 착 감기지?!”
“헤헤... 오스틴이 이렇게 좋아하니, 고생해서 찾은 보람이 있네요.”
곧바로 고개를 들어 알렉시스 공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내가 격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아니, 씨발.
이건 포옹 못 참지.
“공녀님!!! 역시 공녀님밖에 없습니다!”
“꺄으윽...?! 오... 오스틴...! 잠시만요...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 어떻게 이렇게 귀신 같이 잘 맞는 칼을 가지고 오셨지? 역시 고귀하신 분은 보는 눈도 다른 가 봅니다!”
내가 알렉시스 공녀를 꽉 껴안고 주접을 떨자, 별안간 누군가 내 팔을 슬쩍 움켜쥐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루나가 뱀 눈을 뜬 채로 나를 흘겨보며 내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뭐야, 루나. 너도 안아줘?”
“무슨 바보 같은...! 그... 그런 게 아니라... 이제 돌아가야 하지 않나! 바보 같은 짓은 그만하고, 어서 돌아가자고!”
그렇게 옥신각신하며 여관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을 때, 로빈과 루나가 헤집어 놓은 무기들을 정리하던 모그단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헐레벌떡 뛰어왔다.
“자... 잠깐 잠깐 잠깐! 잠까안!!! 스돕!!!!!!!”
“아이, 씨발. 귀청 떨어지겠네.”
내가 심드렁하게 귀를 후비적 거리며 말 하자, 모그단은 눈이 휘까닥 뒤집어진 채 내 손에 들린 칼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 그 칼만은 안 돼! 그건 안 파는 물건이란 말이야!!!”
“...어... 이 칼은 안파는 거라고?”
“그래! 그건 나중에 스승님께 보여 드리려고 구석에 봉해 둔 검인데, 대체 어떻게 찾아서 꺼내 온 거야!!! 어서 이리 내!”
아. 어쩐지, 다른 검들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퀄리티가 좋다 했다.
나는 극한의 아쉬움을 느끼며 어쩔 수 없이 모그단에게 검을 돌려주...
돌려 줘야...
“...흠.”
돌려 줘야... 하나?
“...? 이... 이봐. 빨리 내놔. 미안하지만 그건 못 줘.”
“......”
“......”
나와 일행들 사이에서 어색한 눈빛이 오가고, 어쩐지 긴장감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튀어!!!!!!”
“안 돼!!!”
나는 곧바로 문을 걷어차고 달음박질하며 뛰쳐나왔다.
“야! 나중에 우리가 갚을게! 좀만 빌리자!!!”
이 씨발, 언제는 다 가져가도 된다며.
난 모르는 일이야.
* * * * *
“마... 마야. 아직 못 찾았어?”
“흐읏... 조용히 해... 집중해야 되니까...”
“으... 응...”
아드리엔과 이사벨의 등에 양손을 뻗은 마야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다시금 눈을 감았다.
오밤중에 뭘 하는 거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마야는 지금 아드리엔과 이사벨의 증상에 대한 원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아드리엔과 이사벨의 등에 손바닥을 붙인 채 식은땀을 뻘뻘 흘려대던 마야는, 둘의 몸에 주입한 마나를 더욱 깊숙한 곳으로 주입했다.
혈관과 마나의 통로를 따라 빠르게 퍼져 나가던 마야의 마나 줄기는, 이윽고 마나 코어의 최심부에 자리를 잡은 검은 물체와 맞닿았다.
“......찾았다.”
“차... 찾은 거야?!”
“마야...! 드디어 찾아내신...”
“쉿. 가만히 있어. 아직 안 끝났거든.”
“어... 응...”
극도의 집중 상태 인지라 예민해진 마야의 대답에, 아드리엔은 볼을 살짝 부풀리며 뾰로통한 표정으로 앞을 돌아보았다.
꿀꺽.
죽은 듯이 조용한 방 안에, 이사벨과 아드리엔을 비롯한 마야를 제외한 일행들의 침 넘기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땀을 뻘뻘 흘리며 팔을 부들거리던 마야는, 이윽고 파하 하고 숨을 내뱉으며 들어 올린 팔을 스르륵 내렸다.
“뭐... 뭐가 원인인지... 알아 내셨나요...?”
“...이건... 아니, 잠깐... 이럴 수는...”
마야는 흐릿해진 눈동자를 가까스로 들어 올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그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건... 단순히 병이 아니야...”
“...무슨.”
이어지는 마야의 한마디는, 그런 그녀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둘 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마나 코어가 오염되고 있어...!”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만이, 그녀들 사이의 정적을 깨뜨리고 파고들었다.
오스틴이 그리운 밤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