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31. 급할수록 돌아가라
* * *
“쓰읍... 마음대로 칼을 가지고 간 건 미안하다, 그래. 사과할게.”
“끄응... 내가 어제 그 일 이후로 얼마나 심란했는지 알아?! 잠도 얼마 못 잤다고!”
“쓰읍... 하아... 미안해 내가. 솔직히 그렇게까지 중요한 물건 일줄은 몰랐다 야.”
“후우... 됐다, 됐어. 칼도 돌려 줬으니 이제 이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을게. 나도 네게 실례되는 태도를 보였으니, 그건 사과하지.”
애석하게도, 어젯밤 힘들게 탈취한 모그단의 명검은 순순히 돌려주는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전에 쓰던 숏소드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딱히 미련은...
...미련은 당연히 있지. 씨팔. 미련이 없다면 그건 성직자 이거나 마왕군 간첩이 확실하다.
하지만, 대로변 한가운데에서 사람을 잡아 죽일듯이 붙잡고 돌려 달라고 악을 쓰는데, 어떻게 뻐기고 있겠냐고. 내가 아무리 빠꾸가 없는 사람이라도 정도가 있다.
혹시 몰라 전에 쓰던 숏소드를 가져 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본격적인 의뢰를 시작하기도 전에 퇴짜를 맞을 뻔 했다.
“킁!... 하아... 그래. 내가 미안해. 씨팔.”
“...그건 그렇고...”
랜턴을 손에 치켜든 채 앞장서서 광산 심부를 향해 나아가던 모그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미간에 주름을 만든 모그단의 짜리몽땅한 손가락이 내 코와 입을 가리고 있는 방진 가리개로 향했다.
“후읍...! 하아... 아, 이거?”
“그래, 그거! 너 아까부터 자꾸 쓰읍... 하아... 하면서 변태같은 소리 내는 데, 지금 여기는 너희집 안방이 아니라고!”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말이야.”
모그단의 호통은 백번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하아... 이거 진짜 신기하네. 백년초 태울 때 나는 냄새랑 진짜 똑같아.”
엘븐 왕국의 송곳 산맥 중턱 에서만 서식하는, 백년초라는 풀이 있다.
백년초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도 참으로 별것 없는데, 딱히 '건강에 엄청나게 좋은 풀이라서 수명이 백 년까지 늘어날 정도로 귀한 약초다!' 뭐 이런 건 당연히 아니고... 그냥 이 풀에서 피어나는 꽃이 백 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는다는 민담이 있어서 그렇다.
딱히 약초로써 별다른 효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꽃이 엄청나게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끽 해 봐야 차를 달여 마시면 잠시동안 마나의 순환이 조금 더 원활해진다 정도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년초가 세간에서 인기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쓰읍... 하아아...... 선배님... 이건 진짜 신기하네요... 정말로 백년초를 태울 때 나는 냄새랑 똑같아요...”
다름 아닌, 향로에 넣고 향을 사르는 풀로서 인기가 높다는 것.
백년초를 향로에 넣고 사르면, 엄청나게 상쾌하고 달큰한 냄새가 은은하게 퍼진다.
그렇다고 딱히 마약류처럼 강한 중독성이나 인체에 해로운 독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공기를 맑게 해주는 효능이 있기에 남녀노소 수요가 많다.
심지어 이 향기는 백년초가 꽃을 달고 보낸 세월만큼 향이 농축되는데, 이런 사실들로 인해 백년초를 재배하는 농가들은 마치 술을 숙성시키듯 꽃이 핀 백년초들을 일부러 따지 않고 향을 숙성시킨다.
잘 말린 뒤 주머니에 달아 놓으면 공기를 맑게 만들어 주는 효능도 갖고 있어서, 광산에서도 일반적으로 이렇게 방진 가리개 사이에 거름망으로 쓰이기도 하고 말이지.
“알았어. 안 그럴게. 이건 근데 진짜... 따로 몇 개 챙겨 가고 싶을 정도야. 어떻게 백년초를 마나 회로로 가열해서 거름망으로 쓸 생각을 한거지?”
이렇게 깔끔하게 가공한 드워프들의 기술력에 새삼 감탄하자,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내게 면박을 주던 모그단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흥. 우리 드워프의 위대한 발명품이지. 드워븐 왕국의 노동자들 중에는 광부가 많은 비율을 차지하니까. 우리 스승님께서도 한창 잘 나가실 때에는...”
“...아. 씨발.”
아. 이 새끼 또 시작이네.
나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 역시 표정이 굳는 모습을 보아하니, 다들 모그단의 도돌이표 같은 대화에 질려 버린 모양이었다.
모그단과 티격태격하며 광산까지 함께 걸어오는 동안 알아낸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모그단의 드워프라는 종족에 대한 자긍심... 이른바 '드워프 뽕' 이 정말이지 남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스승님께서... 드워프는 역시 손재주 하나는 대륙에서 따라올 종족이 없...”
애미. 여기까지 오면서 저 얘기만 귀가 가라앉을 만큼 들었던 것 같다.
“어, 그래. 니들 대단하다. 너 짱. 너 짱해.”
“...네가 우리 스승님을 한 번 뵈어야 그런 소리가 안 나오지.”
“알겠으니까, 이제 슬슬 일 얘기로 넘어가자고.”
“...그래, 일. 크흠...”
내가 대화의 주제를 돌리기 위해 짐짓 진지한 얼굴을 하고 이야기하자, 모그단 역시 표정을 고쳐 잡고 이번 의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알고는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 벨리온 광산에 있는 갱도들 중에서 12번 부터 16번까지의 갱도 담당자야.”
“고건 몰랐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어. 아무튼... 그래도 나름 지난 7년 동안은 별다른 문제없이 잘 운영하고 있었고, 덕분에 올해에는 갱도 안전 총괄 책임자의 자리에 추천받을 수 있었지. 그런데...”
모그단의 말은 이랬다.
마침내 벨리온 광산의 요직에 앉을 기회가 생긴 사실에, 지난 7년간의 열정과 노력이 보상받는 듯해서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고.
말 그대로 말단에서 시작해서 빠르게 승진해서 올라온 샘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하아... 한 달 전쯤부터 문제가 생겼어.”
“문제라 하면... 광부들이 사라진다던 그거?”
“그래!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노력을 해 왔는데, 이제 와서 승진에서 누락될 상황에 놓였다고! 이게 말이나 돼?!”
모그단은 이야기를 하던 도중 많이 울컥한 모양이었다.
...새끼. 마음 아파지게.
나는 수염을 파르르 떠는 모그단의 단단한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쩝... 뭐, 사람이 살면서 고꾸라질 때도 있는 법이지. 힘 내라고.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잖아?”
“다... 다음 기회라니! 내가 승진에서 누락되지 않도록 너희가 원인을 제거하면 되잖아! 벌써 실패했다는 듯이 말하지 마!”
“...아 참. 그렇지.”
우리는 드문드문 튀어나와 있는, 드워프들의 키에 맞춰진 목재 지보를 고개 숙여 통과하며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발을 들였다.
“끄응... 여하튼, 이번 일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이곳 벨리온에서 드워프들은 나름 고급 인력이란 말이야.”
모그단이 머리를 긁적이며 간헐적으로 깜빡거리는 램프를 툭툭 치자, 내 뒤에서 따라오던 루나가 까치발을 들고 내 어깨로 불쑥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그런데, 광산에서 나올 만한 몬스터라고 해 봤자 기껏해야 산악 코볼트 수준이 아닌가. 그 정도 대처도 못하나?”
어쩐지 말에 뼈가 섞여 있는 것이, 루나는 의뢰를 받을 때부터 어딘가 불만이 있는 듯해 보였다.
“야, 너는 또 말을 왜 그렇게 해?”
“...하지만... 그런 허접한 놈들을 상대해야 한다니, 시간이 아깝단 말이다. 나는 이 창으로 더 강한 놈들을 상대하고 싶다.”
“아서라. 아무리 명검이라도 실전에서 써 보기 전에 짚단부터 썰어 봐야지.”
루나의 볼멘소리에, 내 옆에 바짝 붙어 걷던 로빈 역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그러게요...? 그 정도 수준이라면 수비대에 지원을 요청했다면 굳이 금화까지 쓸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로빈의 질문에 누군가 선뜻 대답을 하기도 전에, 뒤따라오던 알렉시스 공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최근 왕실에서 청색 동원령을 선포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아마 전선에서 일정 거리 가까운 도시들은 수비대를 함부로 돌려 쓸 수 없는 상황 일 거예요.”
““아...””
로빈과 루나 모두 상황을 깨달았다는 듯 탄식을 내뱉고, 곧이어 모그단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뒤이었다.
“그쪽에 있는 아가씨 말이 맞아. 최근에는 영주님께서도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라 수비대를 따로 빼오기도 버거웠지. 손가락만 빨면서 지켜보고 있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돈을 내서라도 실력 있는 모험가를 고용하는 게 나아. 내버려 두면 점점 더 일이 커질 테니까.”
“음. 현명한 선택이지. 마침 나 같은 실력 있는 놈이 덥썩 물었으니 말이야.”
“다른 아가씨들이나 저 사제는 나름 믿음직스러운데... 너, 그 뱃지 정말로 길드에서 내준 물건 맞아? 위조한 건 아니겠지?”
“...근데 이 새끼가... 야 임마. 뱃지는 위조 못 하는 거 너도 알면서 그래?”
“푸흐... 그래. 한 번 믿어볼게. 아, 거의 다 왔군.”
모드간은 또다시 깜빡이는 램프를 탁탁 치며, 갱도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꽤 넓은 공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넓은 동공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바짓단을 툭툭 털어제끼는 모그단을 보고, 우리는 잠시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아 참. 모그단. 네 말대로라면, 아직 광부들이 실종된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 이거지?”
“그래. 속이 터져 죽겠어 아주.”
“얼씨구. 접때 나한테 꼬라지 부리는 거 보니까 인성은 이미 터진 것 같던데.”
“그... 그건...! 으음... 나도 뭐라고 할 말이 없군. 사과는 이미 했잖아.”
잠시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우리는 다시금 다리를 움직여 광산의 더욱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어쩐지 들어갈수록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 것 같지만, 기분 탓 일 거다.
...기분 탓 인 거 맞겠지?
* * * * *
“음... 용사. 정말 이게 맞는걸까...?”
“그럼, 달리 방법이라도 있어?”
안 그래도 최근 여관에 틀어박혀 있던 탓에 퀭한 몰골이 된 용사, 이유정의 날 선 태도에, 아드리엔은 슬며시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용사와 일행들은 다시금 묵묵히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다시금 메르덴 숲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은, 바로 이틀 전에 있었던 마야의 발언에 의한 결과였다.
‘마나 코어가 잠식당하고 있다고...? 잠깐, 그건...’
‘설마 그런... 다른 분들도 확인해 주실 수 있나요, 마야?!’
자신의 마나를 타인의 마나 줄기에 흘려 보내어 마나 코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대가 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마야의 헌신 덕분에, 그녀들은 다들 자신의 상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마나 코어의 침식.
아직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증상으로, 대게 전선에서 싸우던 병사들에게서 간혹 발현된다고 하는 증상.
명확한 원인도 모르니, 정석적인 치료법 역시 있을 리 만무하다.
이 세상에서, 마나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 이들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오스틴이 여기에 속한다고, 예전에 그가 직접 말했다. 그는 선천적으로 마나 코어가 전무했던 탓에, 레인저에서도 드물게 마법을 쓰지 못하는 대원 이었다고.
그 말인즉슨, 전 대륙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인들조차 소량이나마 심장에 마나 코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마나 코어를 잠식당한 일선의 병사들은, 서서히 내면부터 붕괴되어 가며 인간으로서의 지성을 벗어 던지고,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어지며,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들어차게 된다.
종국에는 힘과 파괴 욕구만 남은 괴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흉폭한 모습으로 인해, 한 번 변이하게 되면 사실상 인간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없다고 알려져 있는 괴질.
아마 오스틴에 대한 심정의 변화도, 마나 코어의 침식이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흑... 흐윽... 그런 걸로... 그런 같잖은 변명으로 용서받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설움이 북돋아오른 이사벨은, 옥구슬 같은 눈물을 똑똑 흘리며 눈가를 적셨다.
“...이사벨...”
처량하게 우는 이사벨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며, 그레이시는 나름대로의 죄책감에 가슴 언저리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마나 코어의 침식을 치료하는 방법이 정말로 없는가?
‘우리 스승님께서는. 아마 마왕군에 속해 있는. 군단장의 짓일 거라고 말씀 하셨지만... 아직 정확한 사실은. 아니야.’
마나 코어의 침식을 확인한 바로 그날, 마야의 한마디는 그녀들 모두를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머뭇거리던 마야의 입에서 나온 방법은, 빈말로라도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가자. 아가일을 잡아서, 침식에 대한 정보를 물어보자고.”
마야의 스승이라는 분의 말씀 대로라면, 마나 코어의 침식은 필시 마왕군의 짓일 터.
이틀 동안 축 늘어져 하염없이 후회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여관을 나서는 그녀들의 모습은 살기가 등등했다.
“...오스틴...”
마나 코어의 침식.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면, 오스틴을 찾아가서 다시한 번 사과하자.
“내가 그럴 자격이 있겠냐마는...”
여지껏 오스틴에게 쏘아 냈던 비난들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이중성에 자조하는 아드리엔 이었다.
갈 길은 까마득한데,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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