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35. 밀랍칠을 하는 여인
* * *
“이곳인가...”
조심스레 수풀을 헤친 용사, 이유정은 눈앞의 전초기지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깎아서 만든 커다란 목책들과, 곳곳에 퍼져 있던 마나 파장 결계.
결계는 마야가 해결했다지만, 저 단단한 목책 만큼은 방법이 없다. 이 숲의 최심부까지 온 목적은 엄연히 '아가일의 생포' 에 지나지 않는다. 놈이 지휘하는 마물 군단들을 전부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
정면 돌파를 해야 하나? 아니면, 우리 쪽에서 적을 불러 들여야 하나?
“용사. 이곳인가?”
고민하는 용사의 옆에서 불쑥, 하고 얼굴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곳이 분명해. 그레이시.”
“아가일이... 저 안에 있단 말이지.”
묘하게 적극적으로 불타오르는 그레이시의 태도에, 용사는 풀 숲에서 조금 물러나며 말했다.
“그레이시... 나도 지금 당장 아가일을 붙잡아서, 마나 코어의 침식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무작정 들어간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아. 신중히 접근해야 해.”
“...하지만, 아무 인기척도 나지 않는 것 같군.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그건...”
그레이시의 말에, 용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곳으로 오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복기 해 나갔다.
확실히, 숲에 들어온 뒤 아가일의 전초 기지에 오는 동안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안전하게 올 수 있었다.
언제나 짹짹거리는 새 소리가 울려 퍼지던 숲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기괴하다 싶을 정도로.
“...마야.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응. 아드리엔이랑. 주변을 샅샅이 뒤져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 고마워... 으음...”
아무도 없어 보이는 조용한 전초기지. 절호의 기회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서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오스틴 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오스틴 이라면...”
아마 함정이나 매복이 있는지 확인하고, 만약에라도 급히 퇴각해야 할 상황을 대비해서, 여러 가지의 후퇴로를 생각해 뒀겠지.
아마 과거의 그녀들 이었다면, 쓸데없이 시간 낭비만 한다며, 별것도 아닌일에 깐깐하게 군다며 구박했을지도 모른다.
철저한 대비를 통해, 최소한의 피해로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오스틴은, 그런 남자 였으니까.
“주변에서 따로 매복이나 함정은 찾지 못했고... 혹시나 퇴각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면, 마야가 바람 마법으로 시야를 가린 사이에 빠져나가자.”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을 보며, 용사는 내심 파티의 리더로서 좋은 판단을 내린 것 같아 괜히 뿌듯해졌다.
‘오스틴이 있었다면...’
오스틴이 지금 모습을 봤더라면, 무슨 반응을 해 주었을까.
아마 화들짝 놀라며 칭찬해 주지 않았을까. 가령,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던가...
“...히히.”
실없는 웃음을 흘리는 용사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녀들은 전초 기지 내부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문이... 열려있네?”
“조심하세요, 용사님.”
혹여나 소리가 날까,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들어가니, 텅 비어 있는 막사들과, 방금 전 까지만 해도 활활 타올랐다는 듯 아직 따끈 따끈한 열기가 올라오는 모닥불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아... 아무도 없네요...?”
이곳에도 없다면, 아가일은 당최 어디에 있단 말인가.
메르덴 숲을 구석 구석 뒤진 끝에 찾아낸 마지막 전초기지 이건만,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전초 기지의 내부를 둘러 보는 용사와 일행들은 허탈감에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으음... 아무래도 여기도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이 순간에도 마나 코어가 침식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용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으음... 어때, 이사벨? 정말 아무것도 없어?”
“네... 하지만, 조금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뭐가?”
용사가 되묻자, 이사벨은 아직 열기가 올라오는 꺼진 모닥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보세요. 마치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누군가 있었던 것 같지 않나요? 막사 내부에서도, 채 손질이 끝나지 않은 무기들과 숫돌이 나왔구요.”
“으음... 확실히 그건 이상...”
쾅!
“꺄아악?! 뭐... 뭐야?!”
등 뒤에서 난 큰 소리에 화들짝 놀란 용사와 일행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뭐야 이게... 밀랍?”
마치 양초처럼, 온 몸에 밀랍이 발라진 채 굳어있는 마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살아 움직였다는 듯,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듯한 행동을 취한 채 그대로 굳어 있는 마물.
그저 물건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역동적인 '그것' 의 모습에, 용사와 일행은 뒷목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 네놈이 용사인가? ]
갑작스레 들려오는, 마치 등 뒤에서 속삭이는 듯한 한마디에, 용사를 비롯한 일행은 몸을 부르르 떨며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고요한 전초기지의 저 깊숙한 곳에 위치한, 주변에 있는 막사들 중 가장 큰 막사의 어둠 속에서, 달콤한 미성이 귓가를 속삭였다.
[ 용사 이유정, 마야, 이사벨, 아드리엔, 그레이시. ]
“마... 마야! 발광 마법! 저 막사 안을 비춰줘!”
“으... 응!”
마야의 지팡이 끝이 잠시 반짝이고, 곧이어 둥글게 빛을 발하는 물체가 막사의 어둠을 뚫고 들어갔다.
“...무슨.”
이제 슬슬 멈출 때가 되었건만, 막사 안을 비추며 들어간 발광 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어둠을 가르며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기어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거리까지 날아간 발광 구는, 어느 순간 팟 하고 빛을 잃어 버린 것이었다.
이상하다못해 기묘하기 까지 한 작금의 상황에, 용사와 일행들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무기를 쥔 채 막사를 노려볼 뿐이었다.
“...네가 용사구나.”
또다시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아가일의 말과 함께, 어느새 용사와 일행은 막사 안으로 발을 들이고 있었다.
“어... 어?! 무슨...!”
“우리... 방금 전 까지 저기에 있지 않았어...?”
어리둥절 한 일행들의 앞에, 별안간 하나의 인영이 저 멀리 어른 거리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별다른 치장품이나 레이스도 달리지 않은, 그저 밋밋한 보라색의 드레스를 입은 자색 머리칼의 소녀.
“...아가일...?”
용사는 곧바로 성검을 쥔 손을 움직이려 했으나, 마치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둔해진 것이 느껴졌다.
아가일은, 용사가 성검을 휘두르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어 들었다.
밀랍으로 이루어진 괴상한 펜과, 마찬가지로 밀랍을 얇게 펴 바른 듯한 종이.
“...용사, 이유정.”
자신을 부르는 고운 미성의 목소리에, 용사는 고개를 들어 아가일을 노려보았다.
“...아가일...!”
빠드득 이를 가는 용사의 모습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아가일은 밀랍 펜을 들어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파티의 일행인 마야, 이사벨, 아드리엔, 그레이시와 함께 아가일을 처단하고자 숲으로 들어왔다.”
거침없이 움직이는 밀랍 펜 끝으로, 아가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막힘없이 써 내려가고 있었다.
“...뭐...”
“허나, 전초 기지 내부로 들어온 그녀는 불순한 의도를 품고 성검을 뽑아들어, 그레이시를 향해 검격을 날린다.”
깡!
아가일의 밀랍 펜이 마침표를 찍기 무섭게, 곧바로 성검을 들어 올려 그레이시를 향해 내리치는 용사.
황급히 검을 들어 올려 용사의 성검을 막아 낸 그레이시는, 웅웅 떨리는 진동을 느끼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용사를 바라보았다.
“용사...!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아... 아니... 이건 내가 한 게 아닌...”
당황한 용사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가일은 싱긋 웃음을 띄우며 계속해서 글을 써 내려 갔다.
“용사는 계속해서 그레이시를 공격한다.”
카가각!
“끄으으윽...! 요... 용사! 정신 차려라!”
“아니! 나 지금 제정신이라니까?! 머리 말짱하다고!”
“크으윽...! 아가일...!”
순간, 무언가 팔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에, 용사는 온 힘을 다해 검을 든 손을 움직여 미상의 물체를 뿌리쳤다.
철퍽!
그와 동시에, 용사의 팔에서 떨어져 내린 한 덩이의 녹아내린 밀랍.
“...밀랍...?”
문득, 전초 기지 앞에 있던 마물 모습의 밀랍 인형이 떠오른 용사는,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아쉽군 그래.”
아가일은 그저 싱긋 웃으며, 또다시 펜을 들어 올렸다.
“밀랍으로 변한 라이칸슬로프 50마리. 용사와 일행을 공격한다.”
어디선가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라이칸슬로프 형상의 밀랍 인형들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꼭두각시의 아가일.
새로운 인형을 얻을 생각에, 그녀는 입꼬리가 내려갈 줄을 몰랐다.
* * * * *
[ 벨리온의 모든 시민들에게 알린다. 벨리온의 적법한 영주, 나 파울로 보르댕은 지고한 왕국 법률에 의거하여, 현 시간부로 벨리온에 총동원령을 선포 한다. 모든 비전투 인원들은 즉시 대피소로 대피하라. 이것은 실제 상황으로... ]
민간인들의 비명과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확성 마법, 무장한 병사들의 고함 소리가 강철의 도시, 벨리온의 밤을 밝히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하수도를 뚫고, 맨바닥을 파헤치고 올라오는 바위 메뚜기들과, 놈들과 대치하는 수비대의 병사들.
[ 키이이이익!!! ]
“크으읏... 바위 메뚜기가 왜 있는 거야! 분명 북쪽에 있는 산맥이 서식지 일 텐데...!”
“아... 안 돼...! 수가 너무 많아!”
“후퇴!!! 후퇴하라!!! 공방 거리에서 놈들을 상대한다!!!”
카가가각!!!
바위 메뚜기들의 단단한 앞다리와, 수비대 병사들이 손에 쥔 창칼이 불똥을 튀기며 힘 겨루기에 들어간다.
곳곳에서 불타오르는 집들과, 매캐한 연기.
그런 광경들을 넋놓고 보고 있는 나는, 지금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가기 시작했다.
“...로빈. 나는 이게 현실인가 싶어.”
“바... 바... 바위 메뚜기... 어버버버...”
“...이 씨발.”
바위 메뚜기를 본 로빈이 또 정신이 나가 버렸다.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네.
나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손바닥을 들어 올려 로빈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어법... 우픕?!?! 서... 선배님?!”
“너 씨발 정신 안 차릴래? ...뺨 때린 건 미안하다 야.”
“우으으... 아뇨... 감사합니다.”
곧바로 정신을 차린 로빈을 데리고, 우리는 인파를 헤치며 저 멀리 한창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중심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이봐... 정말로 가야겠어? 그냥 대피소에 틀어박혀 있는 게...”
“모그단. 이 의리도 없는 새끼야. 알렉시스 공녀님은 찾아야 대피소를 들어가던 말던 할 거 아니야.”
모그단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곧이어 저 멀리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알렉시스 공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헥... 헥...! 오스틴! 무사 하신가요...!”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나를 걱정해주는 알렉시스 공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다친 곳 없이 멀쩡한 알렉시스 공녀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방심한 그 순간, 우리의 왼쪽에서 팍! 하고 흙이 튀어 오름과 동시에, 바위 메뚜기 한 마리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 키이이이익!!! ]
“꺄아악...!”
반응하기에는 늦었다... 좆됐다...!
급히 알렉시스 공녀를 밀치고 구르려던 찰나, 내 뒤에서 따라오던 로이먼의 플레일 철퇴가 바위 메뚜기의 갑각을 때리며 우지직 소리를 내었다.
“로... 로이먼!”
로이먼에 의해 밀쳐진 알렉시스 공녀는,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하다가 내 품에 안겼다.
“꺄앗... 아...! 죄... 죄송해요...!”
라벤더 향... 좋다.
“...아뇨, 뭘요. 그것보다...”
숏소드를 뽑아 들며 로이먼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니, 로이먼이 바닥에 쓰러져버둥거리는 바위 메뚜기를 깔고 앉은 채 거침없이 플레일을 휘두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악한!”
쾅!
“존재가 감히!”
쾅!
“주제를 알 거라, 하찮은 미물이여!!!”
콰앙!!!
[ 끼에에엑... ]
...그냥 할 말이 없다. 말 해 뭐해.
초록 피를 흘리며, 온몸의 갑각이 으스러진 채로 쓰러져 있는 바위 메뚜기의 처참한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후우... 형제님. 매복에 주의하십시오. 놈들은 상당히 약삭빠르군요.”
“...어. 응. 그래... 조심해야지. 미안.”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로이먼이 쓰러져 있는 바위 메뚜기의 머리를 잡는 모습을 보고, 나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린 뒤 서둘러 앞장서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콰직! 콰자자작!
[ 키에에에엑...!!! ]
“그분께서 네놈의 머리를 원하신다! 사악한 존재여!”
뒤에서 들려 오는 바위 메뚜기의 구슬픈 비명을 뒤로한 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저 미친 새끼 진짜...”
곧이어 허리춤에 머리 하나를 덜렁거리며 뒤따라온 로이먼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알렉시스 공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공녀님. 지금 이게 무슨 개 지랄판 이랍니까? 영주님을 뵙고 계시지 않으셨어요?”
“저... 저도 자세한 일은 모르겠지만... 일단, 보르댕 후작이 계신 곳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글쎄. 내 생각에는 호다닥 대피소로 뛰어가는 것이 더 나아 보이지만, 나는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까짓거, 갑시다.”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대피소 보다는, 영주가 숨어 있는 곳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는, 간간이 튀어나오는 바위 메뚜기들을 처치해 나가며 영주가 머무르는 성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랄맞은 도시도 이런 지랄맞은 도시가 또 없네.
씨팔. 해 뜨자마자 여길 떠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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