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36.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 * *
내 앞에서 짐짓 폼을 잡는 퀭한 얼굴의 청년이 누군고 하면, 이곳 벨리온의 영주인 파울로 보르댕 후작 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보르댕 후작은, 갑자기 나타난 바위 메뚜기들로 인해 펄펄 끓는 속을 식히려는 듯 단숨에 찻잔안에 남은 차를 들이켰다.
“후우... 오스틴 경. 용사파티의 일원이라 들었소만.”
영주가 대체 어떻게 내 정체를 아느냐 하면... 불과 몇 시간 전에 나를 심문하던 수사관 밀라가, 지금은 영주의 옆에 서 있거든.
아마 내가 밀라에게 불었듯이, 다른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용사파티와 잠시 떨어져서 행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터였다.
염병할. 여기서는 일단 저 치들에게 했던 거짓말에 맞춰 가야 한다.
“...예. 용사파티의 척후를 맡고 있는, 오스틴 입니다.”
내 말에, 주변에 서 있던 다른 가신들이 저마다 입을 가리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용사님 파티에 속해 계신다는데?
세상에. 우린 살았다...!
...씨발. 잠깐만. 내가 온 건 온 거고, 우린 살았다는 뭔 소린데?
보르댕 후작은 나와 일행들을 슥 둘러보더니, 알렉시스 공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알렉시스 공작 영애. 참으로 오래간만에 뵙소만, 지금은 전시 상황이라서 말이오. 더 좋은 대접을 해 드리지 못하는 것에 사죄하고 싶소.”
“아닙니다. 보르댕 후작. 저는 괜찮답니다. 너무 괘념치 말아 주세요.”
“으음... 그럼...”
저 퀭한 눈빛이, 다시 나에게로 향하는 것은 그리 좋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건... 귀찮은 일이 일어날 징조다...!
“오스틴 경. 내 본래 성미가 급해, 이리저리 돌려 말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저 거대 바위 메뚜기를 처리해 줄 수 있겠소?”
그리고, 내 날카로운 직감은 언제나 틀려 먹질 않는다.
“...보르댕 후작님. 저는 지금 용사에게 따로 받은 임무를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이곳에서 거대 바위 메뚜기를 상대할 시간은...”
“오스틴 경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겠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원하는 것은 뭐든지 충족해 주겠소. 가령, 금화를 비롯한 물질적인 지원이라도... 원한다면 드리겠소.”
보르댕 후작의 말이 끝나고, 곧이어 성의 사용인이 커다란 궤짝을 들고 걸어왔다.
덜컹.
상자가 열리고 그 내용물로 보이는 것은,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이 내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산더미처럼 쌓인 금화.
“...지금 저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싸늘한 눈빛으로 후작을 바라보며 툭 내뱉자, 보르댕 후작은 내 태도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오... 오스틴 경. 이건 그... 허허... 뇌물이라던가, 그런 추잡한 것들 과는 궤를 달리하는 어떤... 그래! 정당한 보상일세! 보상! 혹시 돈이 싫다면, 다른 보상을 준비...”
“후작님께서는... 제가 이런 돈 따위에 홀라당 넘어가는, 그런 속물적인 인간으로 보이셨나 봅니다?”
“아... 아니... 내 말은... 허 참...”
짝 짝 짝 짝 짝!
나는 곧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그 자리에 서서 큰 소리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정 확하게!!! 보셨습니다!!!!!!”
“...엉?”
“이 정도의 돈을 받고 무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용사파티원으로서 걸맞지 않은 행동일 테지요! 제가 하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보르댕 후작의 안색이 급속도로 편안해지기 시작하고, 어쩐지 내 양옆에서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지지만, 뭐.
산처럼 쌓인 금화가 나를 기다린다고.
향후 10년 동안 펑펑 써먹어도 남을 것 같은 돈이, 잔뜩.
솔직히 그 정도 돈이라면, 목숨 한 번 걸어봐도 괜찮잖아?
* * * * *
라고 생각하던 때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진짜 지랄...”
나는 저 앞에 보이는, 성인 남성 열 명 정도를 주르륵 세워 놓은 듯한 높이의 거대한 바위 무더기를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건 너무 큰거 아니야? 매일 매일 드레이크 헤츨링 가슴살과 만드레이크 주스만 처먹고 살아도, 저 정도로 벌크업이 되진 않을 것 같다.
“로빈, 어떻게 생각해?”
“...뭐를요.”
“저 덩치 말이야. 우리가 잡을 수 있을 것 같냐? 내가 너무 안일했나?”
내 물음에, 로빈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저야 모르죠. 누구씨가 자신 있어서 받아들인게 아닐까 싶은데요?”
그리 말하곤, 귓볼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로빈.
내가 지금까지 로빈을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로빈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들거나 삐졌을 때 귓볼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다.
그 말인즉슨, 지금 로빈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 이 소리지.
“로빈. 왜 또 삐지고 그래.”
“...안 삐졌걸랑요.”
“너 삐질 때마다 귓볼 조물딱 대는걸 내가 모를까봐?”
그걸 어떻게 알았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로빈을 뒤로하고, 마찬가지로 내 옆에 서 있는 알렉시스 공녀와 루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 그러면... 다들 이리로 모여 봐! 지금부터 저 새끼를 어떻게 잡을지, 계획을 세워야 하니까.”
“어이쿠. 저런 거대한 놈을 상대할 방법이 있다. 이 말인가?”
내가 손뼉을 마주치며 일행들을 불러 모으니, 루나 역시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다가왔다.
“아니, 너희들 진짜 왜 그래. 뭐 때문에 삐진 건데?”
“...삐지다니. 그런 게 아니...”
“맞잖아. 엉?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입술은 대빨 튀어 나와가지고.”
내가 루나와 로빈의 정수리에 손을 올리고 마구 흔들어 재끼자, 머리가 산발이 된 그녀들이 내 손목을 붙잡고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오스틴. 그쯤 하세요.”
그녀들의 볼멘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머리카락을 흐트리고 있자니,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공녀님. 후작님과는 어떻게 되셨...”
“오스틴.”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것 같은, 평소의 알렉시스 공녀 답지 않게 차갑고 냉혹한 표정과 말투에,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당황했다.
“ㄴ... 네?”
내가 얼빠진 소리를 내자, 알렉시스 공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째려보았다. 째려보는 것도 저렇게 깜찍해서야, 강아지가 아르릉 거리는 것 같은데.
“왜... 저희와 상의도 없이, 이런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건가요.”
“...예? 그게 무슨”
“왜 저희와 상의도 하지 않고, 이런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을 가볍게 승낙하는 거냐구요.”
“아니, 그건...”
아무래도 그녀들은, 내가 상의도 없이 이런 위험한 일을 돈만 보고 옳다구나 덥썩 물어 버린 것이 불만인듯 보였다.
하긴, 그럴 만 하지. 나 혼자만 목숨을 거는 것도 아니고, 그녀들 역시 위험한 일이니까 말이야. 이건 두말할것도 없이 내 잘못이다.
“...죄송합니다. 위험하다고 생각 되시면,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저와 로이먼이 후딱 해치우고...”
“그게 아니잖아요!”
깜짝이야. 오늘따라 평소답지 않은 알렉시스 공녀의 고함에, 나는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오스틴은, 자신의 목숨을 조금 더 소중히 여겨야 해요. 돈이 필요하다면 저희 가문에서 드릴테니까! 이런 위험한 일을 받기 전에는 먼저 저희와 상의라도 하란 말이예요!”
“아... 아니... 저는 그게 아니라”
“오늘 낮에 갱도를 빠져나올 때, 화염석을 이용한 것도 그래요! 그대로 생매장 당했으면 어쩌려고 그러셨던 거예요? 그런 걸 안전불감증 이라고 하는 거라구요!”
“아...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제가 죽일놈 입니다. 진정하세요.”
알렉시스 공녀의 머리를 살포시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려 주니, 흥분으로 인해 헐떡거리던 그녀의 어깨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라벤더 향이 내 코를 간질거리는 것이, 이것도 나름대로 좋...
“이야... 보기 좋구만. 귀족 아가씨 아니셨는가? 바깥에서 이렇게 뜨거운 사랑을 나눠도 되는 건가?”
...모그단이 껄렁거리며 끼어들지만 않았으면, 아마 계속 껴안고 있지 않았을까.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으흠... 자! 이제 다들 집중!”
나는 눈앞에 있는, 무너져 내린 커다란 벽돌 위에 지도를 펼치고 모두를 불러 모았다.
“우리가 있는 곳이 이곳, 수비대 막사.”
수비대 막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손가락을 천천히 위로 올려 광산을 짚는다.
“그리고... 저 거대 바위 메뚜기, 아니. 여왕이 있는 곳이 바로... 이곳. 광산.”
놈은 다행히도 땅을 파고 나오는 과정에서 뒤꽁무니가 어딘가에 걸렸는지, 광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빠져나올지 모르는 일.
만약, 여왕이 저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도시를 활개친다면 어떻게 될까?
지옥도(???).
“...놈이 광산 밖으로 나온다면 아마 생지옥이 따로 없어 질거야. 굳이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여왕을 막아야 해.”
내가 짐짓 분위기를 잡으며 말하자, 좌중에 있는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광산 바깥으로 통 나오질 않는 여왕 덕분에, 벨리온은 일부 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구역들은 수비대가 수복하는 것에 성공했다.
“좋아. 일단, 여왕의 목을 떨구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으로는 한참 부족해. 루나, 네 힘으로도 저런 덩치를 처치하는 것은 무리겠지.”
“...음. 저런 덩치를 상대로는... 내 창이 먹히기는 하려나 모르겠군.”
“그래.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지혜를 짜 내야 해.”
펼쳐져 있던 벨리온 전역 지도를 돌돌 말아 넣고, 광산의 세부 지도를 꺼내어 펼쳤다.
“오늘 낮에 광산에 가 봤으니 다들 알겠지만, 광산 안쪽은 구덩이처럼 층층이 파여 있어. 놈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놈이 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올라오기는 힘들어 보여. 심지어, 꽁무니가 어딘가에 걸린 상태라면 더더욱.”
내가 설명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모그단이 주먹을 탁 치며 입을 열었다.
“이봐, 오스틴.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나도 생각해 둔 방법이 있지만, 언제나 더 나은 차선책은 있기 마련이니까. 말 해 봐.”
내 허락이 떨어지자, 모그단의 짧고 뭉툭한 손가락 끝이 광산 지도에 그려진 탑 문양으로 향했다.
“우리 광산은 이 왕국의 철강 생산량에 상당 부분 일조하고 있다 보니, 하루에도 움직이는 유동 자원량이 엄청나지. 광차로도 옮기기 힘든 자원들을 옮기기 위해서, 우리 벨리온의 광산에는 커다란 기중기가 설치되어 있단 말이야.”
“...그래서?”
솔직히 말 하자면, 벌써부터 그리 내키지 않는다. 보통 광산에 있는 기중기들은 크기가 작은 편이고, 기껏 해야 마나로 강화된 나무로 만들어져 강도가 그리 강하지 않으니까.
“...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응?”
“벨리온 광산의 기중기를 다른 여타 기중기들과 비교하는 건 실례라고. 무려, 벨리온산 통짜 강철로 만들어진 커다란 물건이지.”
“무슨... 저게 다 벨리온산 강철로 만들어진 거라고? 통으로?”
“그래! 게다가... 알지? 광산에는 지금도 주인 없는 화염석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고.”
단단하고 마력이 잘 통하기로 유명한, 벨리온산 강철로 지어진 기중기. 그리고 광산에 널브러져 있는 광차에 가득 실린 수천, 수만개의 화염석들.
이쯤되면 모르는게 바보가 아닐까. 당장 낮에 썼던 방법이니까 말이다.
“...너 설마...”
“흐흐... 이제 알아 들었나?”
모그단이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렸다.
“화염석을 실은 기중기를 조종해서 놈을 때리기만 한다면, 저 덩치만 큰 벌레놈을 죽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기발한 방법이긴 하다만, 화염석을 그렇게 많이 사용해도 되려나 모르겠는데... 나야 상관없지만, 너는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
“...네가 갱도에서, 나한테 말 해 줬지 않냐.”
나를 바라보는 모그단의 생기 넘치는 눈은, 마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염석을 골라 담을 시간도 없어. 기왕 할 거 화끈하게 해야지. 깜빵이고 자시고, 일단 살고 보자고.”
“야, 너...”
“그리고... 이 도시는 이제 나의 고향이나 다름없어. 내가 그깟 법을 무서워해서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면, 스승님께 먼지나게 맞을 거라고! 으하하하!”
모그단, 이 새끼...
“너도 이제 사나이가 다 됐구나... 모그단...”
“...?”
드디어 짐승의 탈을 벗어 던졌구나. 싸가지가 바가지였던 모습이 엊그제 같건만.
...엊그제 맞네.
하여튼, 나는 새 사람이 된 모그단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로이먼.”
“네, 형제님.”
“만약 모그단이나 내가 어떻게 되면... 네가 꼭 살려 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신께 맹세코.”
로이먼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 여왕을 잡으러 갈 소중한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루나, 알렉시스 공녀, 로빈, 모그단, 로이먼...
이제 와서 이렇게 선량한 척 이라니. 내가 이렇게 깨끗한 사람 이었던가.
하긴. 아마 돈을 주지 않았더라도, 나는 인상을 잔뜩 쓰며 여왕을 잡는 것을 수락했을 것이다.
“좋아! 딱 한 번만 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해보자!”
오늘만, 가짜 용사 행세 좀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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