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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38화 (38/106)

〈 38화 〉 38. 죽음의 문턱을 건너온 자

* * *

[ 딜은 마법사와 궁수가 하고, 탱은 전위가 하고, 힐은 성녀가 하고, 길 안내와 정찰은 척후가 하는데 용사는 도대체 왜 필요 한가요? ]

꽤나 많은 사람들이, 특히나 용사라는 지위를 시기하는 이들과 대화하면, 항상 빠짐없이 나오는 단골 질문 이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간결하고 명확하다.

용사가 없는 그들보다 마왕이 강하니까.

그리고, 이세계로부터 건너오는 과정에서 신의 축복을 받은 용사와 성검은, 마왕에게 있어서 상극이나 다름없는 치명적인 무기니까.

사실,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다수 존재하기는 한다.

가령, 용사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파티원들이 마왕을 토벌하는 여정에서 성장하여, 이후에도 대륙을 수호하는 방패가 되었으면 하기 때문에. 라던지.

용사파티에 합류하고자 대륙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 중, 각국에서 눈독 들이는 인재를 발굴하기 위하여. 라던지.

용사를 구심점으로 모인 대륙 최강의 파티원들이, 서로 합심하여 강력한 마왕을 무찌르는 것이 수천, 어쩌면 수만 명에 달할지도 모르는 토벌대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보다 효율적이기 때문에. 라던지.

대륙에서 뽑힌 정예의 파티원들과 용사는, 사실상 마왕을 토벌하기 위한 결전병기이자, 가용 가능한 대륙 최강의 정예들 인 것이다.

가용 가능한.

그렇다. 가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말이다.

그 말인즉슨,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지 않고 시야를 넓혀서 본다면, 용사만큼 강한 이들은 생각보다 수가 꽤 된다는 말이다.

대륙 최강자의 자리에 대해 논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이들이 있다.

마왕, 별의 기사, 원소 군주, 고대의 마법사 켈프, 고대 제국의 최종병기 골렘, 신성교국의 초대 교황...

그렇다면, 마왕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불러들이지 않고 굳이 용사를 소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 역시, 무척이나 간단한 질문이다.

다른 놈들이 도와주지 않으니까 그런 거다. 그들은 자신만의 신념과 목표를 가지고 행동하며, 일국의 왕의 명령따위 들어 봤자 콧방귀를 뀌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용사는 저들보다 못한 존재인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용사가 간소한 차이로 이겼으면 이겼지, 저들보다 결코 못난 존재는 아니다.

신의 축복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고, 현재의 용사는 한창 성장중에 있다. 아직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최근 악명이 자자한 마왕군의 군단장과, 한창 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용사파티가 한 판 붙는다면, 승패는 어떻게 갈릴 것인가?

* * * * *

“하악... 하으...!”

마치 물에 젖은 것처럼, 몸이 둔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발은 추를 단 것처럼 무거워지기만 한다.

아마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조금 전부터 녹아내린 밀랍이 천천히 발을 붙들려 하고 있었으니까.

마야의 화염 마법은 성공적으로 먹혀 들었으나, 놈들의 수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흐으... 용사... 상당히 힘들어 보이는군 그래...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용사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몰골이 말이 아닌 소녀를 노려보았다.

아가일의 밀랍은, 마야의 마나와 마찬가지로 무한정 솟아나는 것이 아니었다.

펜 촉은 닳아버리고, 심지가 거의 바닥나서 짜리몽땅해진 아가일의 밀랍펜과, 후들거리는 손으로도 꿋꿋이 펜을 쥐고 있는 아가일.

이제 곧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용사 역시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다

피를 잔뜩 먹어 무뎌진 성검과, 이곳저곳 찌그러지고 찢겨져 나간 그녀의 갑주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비단 오스틴의 부재 때문 만은 아니었다.

지난 3년의 여정동안, 무려 넷의 군단장을 베어 넘긴 그녀였다. 그러한 전투에서 피어오른 마음속 깊은 곳의 자만심이, 아가일을 상대하면서 방심하게 된 원인이리라.

하지만, 만약 오스틴이 있었다면 훨씬 수월했으리라고, 용사는 생각했다.

“후우...!”

대륙의 희망, 용사에게 포기는 용납되지 않는다.

용사, 이유정은 이를 아득­ 물며 성검을 꽉 움켜쥐었다.

아가일은 예상외의 강적이었다. 과거 갈란과 우르간을 상대하면서, 그 이상으로 힘든 전투는 아마 없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꼭두각시의 아가일. 그녀는 상대하는 것이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밀랍을 매개체로 싸우는 아가일 답게 화염 마법은 그녀에게 있어서 최대의 약점 이었지만, 아가일이 바보도 아니고 자신의 유일한 약점을 내버려둘리가 없었다.

아가일은 상당량의 마나를 가지고 있으나, 원소에게 거부당하는 마족. 그녀는 밀랍을 이용한 오리지날 스펠을 제외하곤, 여타 다른 원소 마법을 쓸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화염 마법을 대비해야 하는 아가일에게 있어서는 선택지가 몇 없었다.

엄청난 양의 녹아내린 밀랍으로, 아예 불길을 덮어 버리는 방법.

그녀의 대비책은 꽤나 성공적으로 먹혀 들었다.

다만, 상대가 고대 마법사 켈프의 제자이자, 19살 이라는 어린 나이에 대가 마법사의 위치에 오른 마야가 아니었다면, 아마 더 확실하게 상쇄했을 것이었다.

밀랍펜에 남아 있는 밀랍의 양은 어느새 바닥을 치고 있었고, 상대는 아직 아가일의 목을 베어넘길 만한 힘 정도는 충분히 남아 있는 상황.

“...끝인가...”

마야의 마법에 더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아가일의 안일함. 그녀의 인조 인간이었던 바커스와 데팔의 부재.

완벽한 패배였다. 미련 한 점 남지 않을 정도로, 예정된 결말이었다.

“...예정된 결말이라, 후후...”

칼라스가 자주 내뱉었던 말. 묘한 기분이다. 놈의 말마따나, 그녀의 죽음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걸까.

문득 자신의 처지가 우스워진 아가일은, 밀랍펜을 꼭 쥐고 있던 손을 축 늘어뜨렸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것이라 예상하고, 그저 천천히 눈을 감는다.

‘용사한테 죽지 마라. 오빠는 간다.’

하필 이 순간, 평소 그토록 증오하던 오빠, 아가토가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털썩 주저앉은 아가일을 노려보며, 힘겹게 서 있던 아드리엔과 이사벨이 각기 입을 열었다.

“용사, 지금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둘의 말을 들은 용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아가일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레이시, 마야. 주변 경계좀 해 줘. 아드리엔과 이사벨은 날 따라와.”

저벅저벅. 경계를 늦추지 않고 아가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 용사와 이사벨, 아드리엔은, 곧 아가일이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숨을 돌렸다.

“이봐, 아가일.”

“......강하군, 용사. 확실히 강해. 후후...”

“아쉽지만,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일 생각은 없어.”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아가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코앞까지 다가온 용사의 눈을 마주 보았다.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온 용사의 얼굴에, 아가일은 지진이 난 것처럼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아가일의 목에 스윽— 다가온, 피에 젖은 성검의 검신.

“아가일,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

“...내가 대답 해 줄거라고 생각하나?”

“대답하고 말고는, 네가 하기 나름이겠지.”

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하길래, 군단장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일까. 그것도 용사가.

지금 상황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지만, 이것은 기회다.

아가일은 마지막 남은 밀랍을 쥐어 짜내었다.

“...원하는 것이 뭐지? 다른 군단장들에 대한 정보? 마왕의 약점?”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대체 무슨...”

“마나 코어의 침식을...”

용사의 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아가일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건 왜 묻는 거지?”

“네가 알 바는 아니고. 너는 그냥 내가 묻는 것에 성실히 답하면 되는 거야. 마나 코어의 침식에 대해 아는 게 있어?”

“...하...! 아하하...!”

“...?”

갑작스레 폭소를 터뜨리는 아가일의 행동은, 용사를 당황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한참을 웃던 아가일의 웃음이 뚝— 멈추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용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지... 알다마다. 아주 잘 알지.”

그런 아가일의 눈빛에 지독한 슬픔이 서려 있는 것처럼 느껴진 건, 그저 착각이었을까.

“놈과는 굳이 의리를 챙길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좋아, 말 해 주지.”

“...그게 무슨...?”

아가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용사, 이유정의 머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마나 코어의 침식에 대해 알고 싶다면, 갈란을 다시금 상대해야 할 것이다.”

갈란. 분명, 용사가 베어 넘겼던 강적.

이미 죽었다면, 그렇다면, 지금에서야 아가일의 입에서 갈란의 이름이 튀어나온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뜬금없이 갈란은 왜...”

“아하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말 해! 갈란은 대체 왜 튀어나온 거야! 너 설마...”

“아쉽지만, 시간이 다 되었군.”

아가일은 그저 씨익— 미소를 짓곤, 몸을 뒤로 젖히는 것이었다.

순간 눈이 부실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 자색의 빛과 함께, 아가일은 바닥에 열린 게이트로 몸을 던졌다.

“한 가지 충고해 주자면, 용사여. 적장의 목숨을 취할 때는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목숨을 거둔 놈들과 다시 싸우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이게 어딜...! 야! 갈란은 갑자기 왜 튀어나오냐고!”

다급하게 뻗어진 용사의 손이 허공을 가르고, 아가일의 몸을 집어삼킨 게이트는 순식간에 닫혀 버렸다.

“...용사님.”

으득—

용사는, 등에 커다란 원형의 물체를 짊어 진, 광기에 휩싸인 남자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갈란...!”

가뜩이나 시간에 쫓기는 처지 이건만, 길을 한참 돌아가게 생겼다.

* * * * *

아침해가 밝았다.

난장판이 되었던 거리는 마탑의 지원으로 이미 복구되어 가고 있었고, 혼란스러운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곳곳에서 수비대가 순찰을 돌고 있었다.

“......”

어느새 눈이 부시도록 새파란 아침 햇살은, 눈치도 없이 무거운 분위기를 뚫고 우리의 얼굴을 비춰 들어왔다.

잠이라곤 한 숨도 자지 못했지만, 나는 잠에 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힘없이 복도에 앉아 있었다.

“선배님. 피곤하시면 먼저...”

“...아니, 괜찮아.”

네에... 하고 시무룩해진 로빈 역시, 축 처져 있는 나를 보며 힘없이 눈꼬리를 떨궜다.

“오스틴... 모그단씨는 괜찮은 거겠죠...?”

“공녀님... 괜찮... 괜찮을... 하아...”

무거운 철근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 귀를 기울여야 간신히 들릴 만큼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 흙더미를 파헤치며 찾아낸 모그단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아직도 온몸에 피 칠갑을 한 모그단이 떠올라서, 나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대장간도 운영해야 하는 놈이, 어쩌다가... 후우...”

루나의 무거운 한숨이 바닥을 때리고, 복도에는 다시금 침묵이 가라앉았다.

­ 벌컥.

별안간 방문이 열리고, 곳곳에 피가 묻은 로이먼이 이마를 훔치며 바깥으로 나왔다.

“로이먼...! 모그단은...”

“형제님. 그게... 후우... 일단은, 다들 들어 오셔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문을 열어 젖히고, 침대에 누워 있는 모그단을 향해 다가갔다.

“허읍...!”

“모그단씨...”

헛숨을 들이키는 로빈과,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을 촉촉하게 적시는 알렉시스 공녀.

“...젠장...”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리는 루나까지.

그럼에도, 나는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모그단을 바라보았다.

피에 살짝 젖어 있는 붕대로 칭칭 감겨진 몸과,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진 왼다리와 오른팔.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품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어 들었다.

­ 바위 메뚜기 사태에 대한 조사 결과. 수사관 밀라. ­

거대한 여왕 바위 메뚜기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개체였다.

놈은 여왕의 머리 갑각에 빼도 박도 못할 증거의 낙인을 박아 두었으니,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

“...갈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들을 내버려둔 채, 나는 로이먼을 끌고 복도로 나왔다.

“로이먼. 그 표식, 너도 봤지?”

“...놈이 돌아온 겁니까? 하지만, 어떻게...”

“최근 전선 쪽에서 정보가 하나 들어왔어. 헌틀리가 움직이기 시작 했다고.”

“그 불경한 자가... 죽음을 거스르다니, 신성 모독입니다...!”

목에 걸린 묵주를 꽉 움켜쥔 로이먼을 보며, 나는 허리춤에 달린 검의 폼멜을 쓰다듬었다.

피에 젖은 모그단이, 정신을 잃기 직전에 내게 맡긴 검.

“갈란의 혈기는 어디로 이어졌지?”

“...동쪽으로 향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그 추악한 짓을 저지르기 위해, 근처의 다른 도시로 이동한 것 같습니다.”

동쪽. 동쪽이라.

“...어서 하르만으로 이동해야겠어.”

“하르만... 확실히, 놈이라면 그곳으로 갔을 것 같군요. 놈은 사람이 많은 곳을 노릴 테니까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쥔 나는, 로이먼의 어깨를 툭툭 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혀... 형제님! 어디 가십니까!”

“모두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와 줘. 나는 먼저 짐을 꾸리고 있을게.”

헌틀리가 죽은자를 어떻게 되살리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단 한 가지.

죽은 자가 돌아왔고, 나는 다시금 놈의 목을 베어 넘길 것이다.

“...목 닦고 기다려라, 갈란.”

내 사람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알려 주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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