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39. 떨쳐내고 일어서라
* * *
“...여긴...”
푸드득— 요란을 떨며 나무를 박차고 튀어 오르는 새들의 움직임에, 아가일은 몸을 움츠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와 풀. 벌레. 새. 희미하지만, 어렴풋이 남아 있는 들짐승의 흔적.
“...숲?”
마지막 순간, 남아 있던 밀랍의 대부분을 쥐어 짜내어 아가토의 게이트를 이용하여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제대로 된 좌표를 지정하지 못한 탓에 연고도 없는 장소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송곳 산맥 꼭대기나, 알 카르트 화산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혹시 모른다. 메르덴 숲에 떨어진 것일지도.
지금의 아가일은, 주변 지리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상황.
섣불리 움직여선 안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게이트의 흔적을 감지한 인간들에게 언제 위치가 들통 날지 모르는 일이다.
마탑의 노친네들. 그 빌어먹을 늙은이들은, 마나의 흔적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눈이 돌아가는 놈들이니까.
어디에 떨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추적당한다.
아가일은 몸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손에 들린 밀랍펜은, 어느새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크기 만큼 줄어들어 있었다.
밀랍의 양은 방울 수로 셀 수 있을 만큼이나 줄어들어 있었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스펠도 쓰지 못할 것이다.
‘힘을 비축해야 해... 마왕군에 복귀해서 훗날을 도모하면...’
혹여 용사에게 패배할 것을 대비하기 위해, 밀랍으로 만들어 버린 마물들을 제외하곤 전부 본대로 돌려 보낸 상태이니, 아마 오빠인 아가토 역시 아가일이 처한 상황을 알아 차렸을 것이다.
아가일은 남아 있는 힘을 측정하기 위해 밀랍 펜을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바닥에 내팽겨쳤다.
한껏 짜리몽땅해진 밀랍펜이 바닥을 구르고, 아가일은 이를 갈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용사 그 망할 계집...!”
...지금의 힘으로는, 아마 산적들을 상대하는 것도 힘들지 않을까.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마나와 밀랍을 끌어 올렸다.
끈적한 밀랍이 아가일의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고, 마족의 상징이었던 아가일의 자색 머리카락은 어느새 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적어도, 다른 인간들의 눈에 마족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서쪽... 서쪽으로...”
인간들의 땅이라면, 마왕군에 다시 합류하기 위해서는 서쪽으로 이동해야 할 것이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파랗던 하늘에는 주홍빛 염료가 녹아들어 있었다.
아가일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휴우... 그냥 갈 뻔했다...”
...종종걸음으로 돌아와, 바닥에 떨어진 밀랍펜을 다시 챙겨서.
* * * * *
“오스틴... 그...”
의자에 앉은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고 있자니, 알렉시스 공녀가 내게 다가왔다.
“...예, 공녀님. 무슨 일 이십니까?”
“별 건 아니구... 식량과 생필품을 보충 했어요. 아마 내일이면 바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들어가서 쉬고 계세요.”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과 귀를 가리고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려 했건만, 눈치도 없는걸까. 내 눈꺼풀을 뚫고 시야를 선홍빛으로 가득 채우는 랜턴의 불빛이, 오늘따라 유독 미웠다.
“...그리고... 오스틴.”
“네, 말씀하세요.”
내가 눈을 뜨지 않고 대충 대답하니, 알렉시스 공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그으... 보르댕 후작이 내일 아침, 출발하기 전에 토벌에 대한 보상을 수여한다고 하셨어요. 일단 감사히 받겠다고 하고 왔는데...”
“그건, 뭐...”
“아직 보르댕 후작에게 따로 말씀을 드리진 않았는데요... 내일 아침에, 오스틴이 직접 말을 해 줘야 할 것 같아요. 보르댕 후작도, 대표로 보상을 수여 받을 사람으로 오스틴을 뽑았으니...”
사실 토벌 보상에 대해서는, 모그단의 재활 치료비와 의수, 의족을 맞춰 주는데 쓰기로 다른 일행들과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모그단은 현재 오른팔과 왼다리가 날아가 버린 상태이다. 지금은 손님을 받는 기간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대장간을 운영하는 어엿한 대장장이 이기도하고. 아마 지금 상태로는 재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어제 봤던 그 산더미 같은 양의 돈이라면, 어쩌면...
내 손은 어느새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의 폼멜을 쓰다듬고 있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마치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닌것처럼 오묘하게 빛나는 모그단의 평생의 걸작.
이... 이 검... 너에게 넘길... 오스틴... 염치없지만, 부디 내 스승님께... 단 한 번 이라도 좋으니까...
그날, 완전히 뭉개진 팔을 치우고, 그 밑에 깔려 있던 검을 내게 건네주던 모그단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면, 어쩐지 절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평소에는 그렇게 보물처럼 여겼으면서, 그 보물을 훔치려고 했던 놈에게 맡기는 꼴이라니.
“...멍청한 새끼...”
“ㄴ... 네?”
“혼잣말입니다. 혼잣말...”
나를 살리기 위해 조종석에서 나를 밀쳐 내고, 자신은 혼자 남아서 끝까지 맡은바를 다 했던 모그단의 행동 때문일까.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모그단을 목격했을 때는, 그때는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눈을 감고 있자니, 의식이 기억의 바닷속으로 천천히 침전한다.
하운드... 아니, 오스틴... 당신은 사냥개를 부를 자격도, 사냥개라고 불릴 자격도 없어...!
힘없이 축 늘어진 소녀를 품에 끌어안고, 표독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녹색 머리칼의 강아지 귀 수인 소녀가 눈앞에 아른 거렸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에 로트가...! 으흑...
그래. 나 때문이야.
당신이 그 같잖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후퇴 결정을 더 빨리 내렸더라면! 로트는... 디나는... 흐윽!... 당신이... 너 같은 새끼가 그러고도...!
로트가 전사한 것도, 그로 인해 와일러를 울려 버린 것도. 용사와 나머지 떨거지들이 점점 썩어가기 시작한 것도, 모그단이 다친 것도 전부 나...
네가 그러고도 리더를 맡을 자격이 있어?!
너는 도대체 하는 게 뭐야?
“...아.”
지겹다. 모든 게.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나는, 허리춤에 달려 있는 옥빛의 검을 뽑아 들었다.
손가락으로 검 면을 슥— 훑어보면, 익숙하면서도 서늘한 날붙이의 느낌이 손가락 끝으로 전해져 온다.
놈을 죽이기 위해서는,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화염석을 이용해야 했을까?
차라리 조금 더 시선을 끌게 하고, 휘두르는 타이밍과 놈이 달려오는 타이밍을 정밀히 계산했어야 했나?
놈의 시선을 끌고, 기중기를 시험가동 해 보고, 조종석에 걸터 앉아서 놈을 향해 화염석을 휘두르고.
일련의 과정을 행한 결과가 결국은, 모그단의 상태를 저따위로 만들 것이라는걸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을텐데.
“...ㅅ틴...”
놈이 광산에서 빠져나오지 않던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둥지를 지키기 위해서’ 였단다.
그딴 벌레 새끼도 동족을 지키기 위해서 몸을 내던지는데, 나는 모그단이 당할 때 대체 뭘 했지?
“ㅇ스틴...!”
예전에 로트가 쓰러질 때, 나는 뭘 했...
“...오스틴!”
“ㄴ... 네?”
갑작스레 귀를 때리는 알렉시스 공녀의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내 품에 풀썩 안겨 오는 푹신한 붉은 머리칼과, 향기로운 라벤더 향이 뒤따라 들어와 내 코를 간질였다.
“오스틴... 진정하세요...”
“...공녀님.”
어느새 내가 알렉시스 공녀를 안는 게 아닌, 알렉시스 공녀가 나를 품에 안는 모양새가 되었다.
알렉시스 공녀는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오스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오스틴의 잘못이 아니에요.”
“...공녀님, 하지만—”
“오스틴.”
내가 입을 열자, 알렉시스 공녀는 내 입술 위에 살포시 손가락을 올리며 인자한 미소를 띄웠다.
“오스틴은 최선을 다 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굳은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아...”
“메르덴 숲에서 저를 구해주셨던 그날, 기억하시나요?”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첫 만남은 아니지만, 나와 알렉시스 공녀의 인연이 이어진 계기가 된 날이니.
“그때 오스틴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몰라요.”
“......”
“오스틴. 당신은 항상, 혼자서 너무 앞서나가려 해요. 대체 지금까지 오스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녀님, 저는...”
“주변 사람들을, 동료들을 믿어봐요, 오스틴. 저희를 믿어 주세요.”
알렉시스 공녀의 부드러운 말투는,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던 내 마음을 풀어 주기에 충분히 따뜻했다.
“오스틴. 당신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수고하셨어요. ”
그 말과 함께,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잡념들이 싸그리 씻겨져 내려갔다.
“공... 녀님... 그 말... 한 번만... 한 번만 더 해주실... 수... 있나요...?”
“오스틴... 수고하셨어요. 당신은 최선을 다 했어요.”
알렉시스 공녀는, 여전히 그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칼을 빗어 넘겨주었다.
나 사나이 오스틴, 인생에서 세 번째로 눈물을 흘린 날이었다.
* * * * *
“오스틴 경. 이렇게 급하게 갈 필요가 있소? 조금 더 머물다 가지 않고...”
“하하... 저희도 조금 더 머물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저희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아, 참... 따로 받은 임무가 있다고 했던가? 최근 정신이 없어서... 이거야 원, 실례되는 말을 해 버렸소.”
보존 식량과 이런저런 생필품들을 보충한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성문 앞에서 보르댕 후작의 배웅을 받고 있었다.
“그것보다, 오스틴 경. 그대의 노고에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군. 오스틴 경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이곳 벨리온은 구원받을 수 있었소.”
“아이... 아닙니다. 저 뿐만 아니라, 다른 파티원들과 힘을 합친 결과인걸요.”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을 모그단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자, 눈치가 빠른 보르댕 후작이 헛기침을 하며 시종을 불렀다.
이전에, 보르댕 후작의 성에서 우리에게 황금의 파도를 보여 주었던 시종이 그때 그 궤짝을 다시금 들고나왔다.
덜컥.
“오스틴 경. 비록 그대가 평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나, 내 도시와 시민들을 마수로부터 구원 해준 바. 약소하지만 내 성의를 받아주시오.”
머리가 휘까닥 돌아가게 만들 법한,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가 내 눈앞에서 넘실거린다.
...쓰읍—
“...아.”
군침을 흘리며 나도 모르게 돈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보르댕 후작님. 사실, 그날 저와 함께 여왕을 토벌했던 이들 중에서, 지금 이 자리에는 없는 이가 있습니다.”
“크흠... 그렇지. 모그단이라고 했던가?”
“예. 현재 교회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만... 그 모그단 이라는 드워프... 에게...”
망설임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는 손을 뒤로 돌려 손등을 꼬집었다.
이런 상황에서 망설이다니, 내가 어지간히 돈벌레이긴 한가 보다.
“...모그단에게 이 돈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이번 토벌전에서 가장... 아니, 제가 살면서 본 드워프중 가장 용감한 드워프 였습니다.”
우리에게서 모그단의 활약상을 들었던 보르댕 후작 역시,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소. 우리 가문의 명예를 걸고, 철에 심장을 바친 이로써 맹세하겠소. 모그단이라는 드워프는, 이 도시에 사는 그 누구보다 극진히 대접해 줄 것이오.”
“...감사합니다. 염치없지만, 의수와 의족을 추가로 부탁드릴 수 있을런지...”
“내 그 정도로 팍팍한 사람은 아니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피곤에 찌든 눈꼬리가 휘게 웃는 보르댕 후작을 보고, 나는 안심하며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아... 그전에, 오스틴 경. 잠깐 괜찮겠소?”
“...예?”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자, 보르댕 후작이 내게 주먹 크기의 작은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엉겁결에 받은 주머니를 천천히 풀어 헤치니, 짤랑이는 소리와 함께 수십장에 달하는 금화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그래도, 여행하는데 경비는 필요하지 않겠소? 내 작은 성의요. 부디 받아주시오.”
“...보르댕 후작님.”
아, 정말.
내 주변에는, 이렇게나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
로이먼의 손에 들린 고삐가 움직임과 동시에, 덜커덩— 하며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봄은 지나고, 초여름의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내 머리칼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럼, 좋은 여행 되시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길 바라겠소! 다음에 시간 날 때 벨리온에 오면, 내 성대한 잔치를 열어 드리리다!”
내 소중한 일행들과 함께, 점점 멀어져 가는 보르댕 후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보르댕 후작이 손가락 마디 만큼 이나 작아지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보르댕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님!!! 감사합니다—!!!!!!”
“혀... 형제님! 위험합니다! 어서 자리에 앉으십시오!”
“선배님! 돈! 돈 흘러요!”
“오스틴! 호들갑 떨지 말고 자리에 앉아라! 이 멍청한 놈!”
아무리 힘든 상황이 찾아와도, 포기하고 싶은 때가 되어도, 이제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다.
내 주변에는 이렇게 좋은 동료들이 있으니까.
“자, 그럼...”
뭐부터 하는 게 좋을까.
일단, 갈란의 사지를 뜯어서 개밥으로 던져 주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그 다음은... 뭐, 갈란을 조져버리고 수도로 가는 길에 생각해 보면 되겠지.
우리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