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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40화 (40/106)

〈 40화 〉 40. 이어진듯, 이어지지 않은

* * *

[ 갈란. 전선이 위태롭다. ]

수정구를 타고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아가토의 재촉에, 갈란은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그래서?”

[ 그래서? 가 아니라! 그쪽에서 노닥거리지 말고 빨리 복귀하라는 소리잖아! ]

“미안하지만, 그건 좀 힘들겠군.”

[ ...허. 뭐라고? ]

나약하다. 나약해. 무력으로 따지면, 인간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놈.

아가토 휘하에 있는 몇몇 참모진들은, 내심 아가토가 인간과 마족의 하프라는 점에서 눈살을 찌푸리곤 한다.

하지만, 갈란만큼은 놈이 반쯤은 인간의 피를 머금었다는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놈은 나약하다.

물론, 면전에다 대놓고 내뱉지는 못한다. 누가 뭐라해도, 마왕군은 나름대로 능력주의를 표방하고 있고, 그런 마왕군의 참모장으로 뽑힌 아가토는 마왕이 직접 뽑은 인재다.

능력주의라. 좋은 울림이다.

그래. 놈은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자리에 앉아 있지. 머리를 쓰는 일. 그것은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이니까.

허나, 테이블 앞에 앉아 탁상공론만 해서는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지킬 수 없는 법이다.

과거의 갈란이 그러했듯.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강력한 힘이 필요한 법이다. 이미 경험으로서,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갈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사랑스러운 가족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 오는데.

지금도 내 눈앞에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한낱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죽기전에, 반드시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으니까.

갈란은 천천히 눈을 떴다.

[ 갈란. 네가 나를 꺼려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나는 신체 개조에는 흥미가 없어. ]

여동생이 있다고 했던가. 멍청한놈. 지켜야 할 것이 있음에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거부하다니.

“어리석군. 그렇게 우유부단하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간, 도태되기 마련이다.”

[ 그건... 후우... 됐다. 그냥 빨리 처리하고 전선으로 복귀 해. 알겠지? ]

“...노력해보지.”

갈란이 대화를 끝맺으며 수정구를 덮으려던 찰나, 아가토가 깜빡했다는 듯 다급하게 외쳤다.

[ 아! 야! 잠깐만! ]

“더 할 말이 남았나?”

[ 으음... 그게... ]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가 보겠다.”

[ 아니, 그... 마왕님께서 슬슬 걸림돌인 용사를 처리하고자 하시거든? ]

그게 뭐 어쨌다는 걸까. 확실히 마왕이라는 자는 갈란에게 있어서 이상에 가까운 존재였지만, 지금 마왕이 튀어나올 만한 상황은 아닐 텐데.

시간을 빼앗는군. 이 답답한 놈이.

갈란의 미간이 좁혀지자, 아가토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 너 이제 하르만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 상업도시? ]

“...그런데?”

[ 용사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힘들게 얻었는데, 하르만으로 이동중인걸로 보이거든. 조만간 헌틀리가 그쪽으로 갈 거야. 아마 게이트를 타는 순간 마탑에 추적당할 테니, 전선으로 복귀하기 전에 헌틀리와 힘을 합쳐서 속전속결로... 뭔 소린지 알겠지? ]

“...헌틀리가, 온다고.”

[ 어... 음... 아! 그리고... 최근에 아가일이 게이트를 이용한 흔적을 발견했거든? 아마 그 근처일 텐데... 혹시 찾으면 꼭! 데려와 줘! 하하... 끊을게! ]

우웅— 하며 잠시 강하게 빛을 발산한 수정구가 힘없이 빛을 잃고, 갈란은 주먹을 움켜쥐며 침을 뱉었다.

헌틀리. 그 역겨운 새끼가.

다른 우수하고 능력 있는 자들도 많건만, 하필이면 그 시체 냄새 나는 놈과...

“후우...”

상관없겠지. 이번 기회에, 놈의 사고방식을 진보시키면 된다.

시체를 주물럭거리는 그 더러운 전투방식은, 내가 개선해 주면 될 것이다. 지난번에는 안 좋게 끝났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암. 그렇고말고.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부정적인 감정은, 정상적인 사고에 해롭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갈란은 손을 들어 올려, 피를 끌어 올렸다.

강철처럼 단단해진 손톱으로 팔을 쥐어짜고, 상처를 후벼 판다.

“크하...”

울긋불긋 솟아 오르는 핏줄. 뇌를 절이는 중독적인 쾌락.

고통마저 쾌락으로 치환해 버리는 갈란의 신체. 이 역시 진화의 산물. 부정적인 감정들은 파도처럼 씻겨져 나갔다.

좋아. 머리가 말끔해졌다.

이렇게 좋은 것을 거부하다니, 팔자도 좋은 놈들이군.

“크히... 크흐으...!”

부르르—!

내가 너희들을 일깨워 주리라. 나약한 존재들에게는, 더욱더 우월한 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너희들의 사고를 진보 시키겠다. 내가 그러했듯.

그게 내 사명.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너희들을 위해서.

이번 바위 메뚜기를 이용한 실험은 좋은 자료가 됐어. 운이 좋았지. 어렵게 찾은 둥지에 여왕이 있었으니.

덩치를 거대하게 만들고, 통솔력을 높인 것은 좋았다. 여왕의 감정을 조금 더 억제 했어야 했는데. 설마 둥지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지 않을 줄이야.

엎친 데 덮친격으로, 중간에 끼어든 버러지들 때문에 조금 꼬이긴 했지만... 괜찮다. 실패는 성공으로 향하기 위한 발판이니까. 이런 달콤한 실패쯤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아직 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약자들을 위해. 나는 약자들을 위해 움직인다.

“흐으... 후욱...”

그러니, 나를 그리 보지 말아라. 너희들이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게끔, 내가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데도. 그런데도.

이놈이고 저놈이고, 어째서 진보를 거부하는 거냐...!

인류가 한단계 앞서나갈 수 있는, 그야말로 신의 영역! 압도적인 무력과 지력!

기술의 진보! 나아가서, 시대의 진보!

나를 봐라! 태생부터 마나 코어가 존재하지 않는 ‘실패작’ 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마나가 없는 인간마저도, 이렇게나 강력하게 만들어 준다니! 이 얼마나 진보된...

­ 푸스스.

나뭇잎이 비벼지는 소리. 무언가 있군. 또 사냥꾼들인가? 지겨운 기사놈들?

대체 뭐냐. 또 시대의 진보를 방해하려는 놈들이...

“...혼 래빗.”

뿔이 달린, 일반 토끼의 먼 친척. 저능한 생명체. 나약하다.

“아아...”

여기, 진보의 낙인이 필요한 가엾은 생명체가 또 있구나...!

* * * * *

덜컹거리는 마차는 어느새 울퉁불퉁한 흙길을 벗어나, 조금 더 평탄하게 닦인 흙길로 들어선 것이 엉덩이를 통해 느껴졌다.

마부석 옆자리에 앉아 지도를 펼쳐보고 있자면, 여름의 전유물인 싱그러운 풀 내음이 코를 간질인다. 봄의 향긋한 꽃향기와는 사뭇 다른, 머리가 상쾌해지는 향기.

“좋아. 이대로 길을 따라서 쭉 달리면 되겠어. 중간 중간 마을에 들러서 쉬고 가자고.”

퀼른에서 벨리온까지의 여정은 3일 정도면 충분했지만, 하르만은 엄연히 메텔 왕국의 3대 도시 중 한곳.

국경 변두리에 위치한 벨리온에서 하르만까지 가기 위해서는, 꽤 긴 여정을 거쳐야 한다.

마을을 경유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달린다고 가정해도 최소 5일. 우리는 중간 중간 보이는 마을 들을 경유해서 갈 예정이니, 일주일은 넘게 잡아야 할 것이다.

용사파티와도 이 정도면 꽤 거리를 벌린 상태니까, 아마 용사가 나를 쫓는 그런 불상사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지가 무슨 수로 쫓아오겠어. 할 일도 많은 년이.

다만 걱정되는 건... 갈란이 어느 방향으로 갔을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놈의 비릿한 혈향이 하르만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

“...늦지 않게 가야 할 텐데...”

놈 보다 먼저 하르만에 도착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갈란은 아마 도보로 이동하는 중일 테고, 우리는 마차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지. 미쳤다고 적진 한가운데서 게이트를 이용할까. 게이트를 열기 위해서는 막대한 마나가 필요할테고, 귀찮게 추격대가 붙을텐데.

쉬지 않고 달리기엔 말들의 체력도 걱정되고... 아쉽지만, 마을을 경유해서 가는 건 불가피할 것 같다.

그것보다, 우리가 과연 갈란을 상대할 수 있을까...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유일한 군단장, 갈란.

놈은 마나가 아닌, 피를 매개체로 전투를 행하는 독특한 놈이다. 더 특이한 점은, 마나 대신 사용하는 피를 타인에게서 얻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에 있는 피까지 사용한다는 것이다.

미친놈. 그냥 개 미친 정신병자 또라이 새끼다.

과거, 갈란과 처음 조우했을 때는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바지에 오줌을 지릴 뻔했다.

실제로 아드리엔은 바지에 오줌을 지렸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직접 확인은 못 해 봐서 물증은 없는데, 전투가 끝난 뒤 아드리엔에게서 희미하게 풍겨왔던 오줌 지린내가 아직도 기억에서 잊혀지질 않는다.

오줌싸개년. 우리 사이가 이렇게 파국으로 치닫을줄 알았으면, 그때 실컷 놀려둘걸.

쩝쩝. 우물우물. 쭈압 쭈압.

“......”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로이먼과 교대하여 고삐를 잡고 있는 로빈이 육포를 입에 물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물끄러미 바라보았건만,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육포를 쪽쪽 빨아 재끼는 로빈의 주둥이가 조금 얄미워 보였다.

뒤늦게 내 시선을 알아차린 로빈은, 눈을 크게 뜨며 입에 물고 있던 육포를 빼내었다.

“쭙쭙... 선배님. 육포 한 조각 꺼내 드릴까여?”

“야. 너 내가 육포 그렇게 먹지 말라고 했지.”

“아니... 쭙쭙... 이렇게 빨아 먹으면 짭짤한 게 입 심심할 때 먹기 좋은뎅...”

얘는 대체 언제쯤 철이 들까. 겉모습은 이미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건만, 가끔 보면 알맹이는 아직 어린애 같다.

“그만 먹고 싶어? 잔말 말고 똑바로 씹어 먹어. 드럽게 먹지 말고.”

“넹...”

시무룩해진 로빈의 머리에는 마치 축 늘어진 강아지 귀가 달린것 같았다.

“다 너 생각해서 하는 얘기야. 어디 가서 그렇게 먹으면 예의 없다고 욕먹는다고.”

“...선배 앞이니까 그러는 건데...”

“뭐?”

“...됐거든요.”

순간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되물었지만, 이미 다 들었단다. 로빈.

“우리 여행 식량이니까 너무 많이 먹지는 말고. 너 그러다 살찐다.”

내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하자, 로빈이 도끼눈을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씨잉...! 안 그래도 요즘 먹는 양을 줄여야 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마치 다람쥐처럼 볼이 점점 부푸는 게, 더 놀렸다간 반나절은 대꾸도 안해 줄 것 같았기에, 손을 들어 올려 로빈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선배님은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섬세한지 알아야 해요.”

“농담이었어. 농담. 네가 뺄 살이 어딨다고 그래?”

“씨잉... 말이나 못하면...”

입술이 귀엽게 툭 튀어나온 로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흐응...”

로빈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고 있자니, 로빈에게서 미묘한 비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피식— 미소를 띄우며, 눈앞에 있는 육포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육포가 왜 이렇게 밍밍하지?

“어... 흐에...?”

내가 육포를 입에 넣고 질겅거리자, 내 옆에서 얼빠진 소리가 들려왔다.

“왜?”

“아... 아니... 그 육포...”

“...응? 이거?”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로빈의 머리에서는, 마치 푸슈슈슉... 하고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얼굴도 빨갛고,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나는 그냥 육포를 씹어 먹은것뿐인...

‘쭈압 쭈압. 우물 우물. 쭙쭙. 쩝쩝.’

“...야.”

“...네, 선배님...”

“너... 물론 나는 아닐 거라고 믿지만, 설마 이 육포들 전부...”

내가 손을 파르르 떨며 묻자, 로빈이 부끄럽다는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로빈.”

“......”

“육포 빨아 먹는 버릇, 고치자.”

“네에...”

어색해진 분위기에, 나와 로빈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뒷목을 긁으며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왜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데. 씨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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