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42. 내면의 목소리
* * *
“여세요. 당장.”
“요... 용사님.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
“제 말이 안 들리시나요? 열라고요. 당장.”
“하지만...”
“후우... 마탑주 님.”
“ㄴ... 네...?”
퀼른의 마탑주, 칼 에드거는 목 울대를 꿀떡이며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마탑의 문을 박차고 들어 오더니, 곧바로 최상층에 있는 마탑주의 방까지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게이트를 열어 달라니.
용사정도 되는 직위라면 게이트를 열어 주어도 무방 하겠지만,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와서 용무도 밝히지 않은 채 게이트를 열어달라 하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태도였다. 애초에 무슨 용무인지도 듣지 못했고.
그런 칼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가운 눈빛으로 칼을 올려다보는 용사가 말을 이었다.
“저희 파티의 일원중 한 명이 지금, 저희와 따로 움직이고 있어요.”
“으음...”
칼은, 자신을 바라보는 용사의 눈빛에 겁을 집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저 눈빛. 마치 사람 하나 정도는 가볍게 잡아 죽일 것 같은,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저 눈빛.
그리고 물론, 그 ‘사람 하나’ 에는 칼 역시 포함된다. 긴장이 안 될 리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 보니 오스틴 경 께서는... 설마, 그 따로 움직이는 인원이 오스틴 경...”
“그만.”
“네... 넵!”
싸늘한 말투.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듣는 사람 조차 오스스 떨 만큼 차가워질 수 있는 걸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용사의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은 자명했다.
한편 용사의 입장에서는, 또 그럴 만 했다.
기껏 다 잡은 물고기인 아가일을 코앞에서 놓친 데다가, 헌틀리가 다른 군단장들을 소생시키기 시작했다.
갈란이 되살아 났다는 것이 그 증거겠지.
갈란은 용사가 싸워온 적들 중에서,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강적이었다. 아가일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놈의 광기와, 그에 비례하는 힘은 진짜다.
그런데, 그런 갈란을 다시 상대해야 한다고? 심지어, 다른 군단장들 몇몇도 되살아난 정황이 포착 되었다고?
이건 재앙이다. 재앙에 가까운 일이다. 놈들의 숨통을 끊기 위해 온갖 똥꼬쇼를 다 했건만, 그 지랄을 또 해야 한다니. 용사 이유정의 평정심을 쥐고 흔들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또 하나, 용사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후우... 오스틴...”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은 파티원 이었던 오스틴에 대한 소식.
용사파티의 척후, 오스틴. 거대한 바위 메뚜기를 상대로 접전끝에 승리를 거머 쥐다. 강철의 도시를 구했다. 벨리온의 구원자.
제 발로 파티를 나간 오스틴이 용사의 비밀 지령으로 잠시 따로 떨어져서 움직이고 있다는, 다소 어처구니없는 소식.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거야.’
물론, 용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어쩌면, 오스틴은 아직 우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은걸지도 몰라. 그게 아니라면, 굳이 아직 용사파티에 속해 있다고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 솔직히, 오스틴에게 못되게 굴었던 건 우리 잘못이 아니었잖아. 전부 마나 코어가 침식당한 탓이니까. 응.
오스틴.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절대... 안전한 곳에 사지를 묶어 놓고 아무 데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용사님?”
“...아.”
상념을 깨우는 칼의 목소리에, 용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역시, 서둘러 마나 코어의 침식을 치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갈란을 잡아야 한다. 아가일의 입에서 갈란의 이름이 나오기도 했고, 반인륜적인 생체 실험을 수도 없이 행했던 갈란이라면, 확실히 의심해 볼 만 하다.
용사가 입술을 깨물며 속을 진정 시키는 동안, 용사의 옆에 서 있던 그레이시가 품속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었다.
“벨리온의 영주로 있는 보르댕 후작이 보내온 편지다. 읽어 보도록.”
“아... 예!”
무작정 갈란의 위치를 파악하기에는 정보가 너무나도 빈약했으나, 그런 그녀들에게 오스틴은 뜻밖의 선물을 두고 갔다.
오스틴이 물리쳤다고 알려진 거대한 바위 메뚜기의 사체에서, 갈란의 표식이 발견 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으니.
‘벨리온...’
벨리온의 영주가 보내온 편지에는, 오스틴이 하르만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 했다는 정보가 적혀 있었다. 오스틴을 따로 보내어 벨리온에 뻗친 마수를 사전에 차단해 주었다며, 용사의 혜안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주는 말들은 덤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게이트를 이용하기 위해 곧바로 마탑으로 들이닥쳤다.
벨리온의 영주라는 보르댕 후작에게서 온 편지에는, 오스틴이 갈란을 쫓기 위해 하르만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갈란을 추적하기 위한 일이다. 응. 오스틴은... 겸사겸사...
애초에, 오스틴이 있었다면 아가일을 놓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스틴은 평소 파티의 빈틈을 메워 주었으니까.
아가일이 게이트를 사용하기도 전에, 놈이 힘을 쓸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당연한 행위가, 전투 중에는 떠오르지 않았던 걸까. 계속해서 느껴지는 오스틴의 빈자리에, 용사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저어... 용사님.”
“하아... 네?”
칼의 부름에, 용사는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편지는 모두 읽어 보았습니다. 확실히, 인장 역시 보르댕 후작가의 인장과 완벽히 일치하는군요.”
“그렇다면...”
마탑에 들어온 이래 가장 환하게 웃는 용사의 얼굴에, 칼은 멋쩍은 나머지 뒷목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제 착각이었나 보군요. 합당한 용무를 가지고 계시니, 게이트를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
“자, 따라 오십시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한시가 급해 보이니, 어서 움직이시죠. 다만... 하르만으로 바로 연결되는 게이트는 없기에, 아무래도 벨리온까지는 게이트를 이용하신 다음, 마차를 타고 하르만으로 이동하셔야 할 겁니다.”
“괜찮아요. 어서 가죠.”
칼의 뒤를 따라가는 용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마탑에 조용히 들어왔다면 굳이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어 진다.
‘서둘러야 해...’
용사와 일행들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 *
우리를 안내해주는 소녀를 따라 마을로 들어 왔건만, 어쩐지 우리를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의 시선이 묘하다. 아니, 정확히는 나와 로이먼을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다.
나를 향한 시선은... 뭐랄까,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같은 느낌...?
하지만, 어째서인지 로이먼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달갑지 않은 눈빛이었다. 조금 두려워하는 눈치까지 보인다고 할까.
나는 시선을 돌려, 루나와 함께 내 뒤를 따라오는 로이먼을 바라보았다.
“어... 음...”
“...형제님?”
뒤통수를 전부 가릴 정도로 축 늘어진 천이 달린 사제모와, 안면을 전부 가리는 전투 면갑. 파란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루는 신성한 사제복 까지.
...하긴, 저런 기괴한 차림의 덩치 큰 사내가 마을에 들어서면 당연히 경계하게 되겠지. 나였어도 그랬겠다.
나는 걸음을 살짝 늦춰서, 로이먼의 옆으로 이동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로이먼. 이 동네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스읍... 하아...”
“...로이먼?”
“후우... 확실히, 미약하게나마 불온한 냄새가 나는군요.”
“어... 그래...”
떨떠름하긴 했지만, 로이먼의 개코는 어째 가는 곳마다 불길한 예감을 딱 들어 맞췄기에, 굳이 면박을 주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여자. 여자. 여자.
여길봐도 여자. 저길봐도 여자.
눈을 부릅뜨고 둘러 보아도, 사방에는 여자밖에 보이지 않는다.
장작을 패고 있었는지, 나무 밑동에 발을 올리고 어깨에 도끼를 걸친 한 여인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하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시발... 조금 소름 돋는데...
나는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어댄 뒤, 다시금 짱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 마을, 아까부터 수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일단,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전부 여성이다. 아직 마을 주민들을 전부 만나 본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마을의 크기와 비교해 봤을 때, 남성이 있다고 한들 극소수에 한할 것 같다.
게다가 우리를 흘깃 흘깃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선. 마치 온몸을 구석구석 핥는 듯한 시선에, 나는 뒷 목에 닭살이 돋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5년 전 레인저에 몸을 담고 있을 때, 선임을 따라 반강제로 끌려간 빡촌의 유흥업소 누나들과 비슷한 눈빛이다.
물론, 나는 아무짓도 안 했다. 애초에 그런 곳에서 아랫도리를 함부로 놀렸다가, 성병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실 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우리를 안내해 주던 소녀가 어느 건물 앞에 멈춰 서곤 우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기가 우리 마을의 목공소에요! 비어슨 아저씨가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아서, 딱히 이름은 없어요!”
...솔직히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이 조금 묘해서 이런저런 안 좋은 상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남자 주민이 있긴 있더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우리를 안내해 주던 소녀가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목공소 안으로 들어가고, 곧이어 조금 왜소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몸을 가진 사내가 소녀의 손에 이끌려나왔다.
“아저씨! 인사하세요! 마차 바퀴가 부서져서 곤란하시다길래, 제가 모셔 왔어요!”
소녀의 말에 우리를 쳐다보는 사내의 눈빛이 조금... 퀭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우리를 빤히 쳐다보던 사내는, 이윽고 톱밥이 조금 묻어 있는 단단한 팔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 왔다.
“반갑수다. 이곳 사프란 마을에서 목공소를 운영 하고 있는 비어슨이요.”
“아... 오스틴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야기는 들었수. 마차 바퀴가 부서졌담서.”
“예. 여기...”
부서진 마차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기에, 바퀴 세 개만 남은 마차에 말을 묶어 어떻게든 끌고 오긴 했다. 물론, 우리가 타면 그대로 주저앉겠지만.
마차를 향해 걸어간 비어슨 아재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부서진 마차의 바퀴를 꼼꼼히 살펴 보기 시작했다.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숴 먹었던 우리와는 달리, 확실히 전문가의 기운이 풀풀 풍기긴 하네.
“...이 정도면, 바퀴를 새로 갈아버리는 게 좋겠는데...”
“그럼... 혹시 바퀴 하나만 만들어 주실수 있으신지... 아, 돈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격은 저희가 최대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쇼.”
비어슨 아재가 목공소 안으로 들어간지 5분 정도가 지나고, 이윽고 마차 바퀴 한 짝을 굴리며 나왔다.
“금화 한 닢. 그 밑으론 안 받겠소.”
어째 평균 시세 보다 조금 더 비싼것 같았지만... 어쩌겠나.
“여기 있습니다.”
금화 한 장을 건네주자, 바이슨 아재는 힘없는 미소를 띄우며 바퀴를 굴려 마차에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소녀가 내 팔에 팔짱을 끼며 말을 걸어왔다.
“오빠. 저 어때요?”
“어... 응?”
“저 어떠냐구요. 예뻐요?”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건 뭐 기만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뭐... 예뻐. 응.”
기분이 조금 미묘해지긴 했지만, 눈앞의 소녀가 예쁜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했다. 솔직히 내가 살면서 본 여자 중에서 제일 예쁜축에 속할 정도니까.
“히힛... 츄릅...”
“......”
시발, 얘 대체 왜 이래.
소녀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시더니, 내 팔을 더 꽉 끌어안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팔에 닿고 있는 저 몽글몽글한 감촉이 좋기도 했고... 아니, 그것보다...
“너 근데 몇 살이니? 이름은?”
“아... 레이에요! 나이는 열아홉!”
열아홉이라. 마야랑 동갑이다.
얼굴이 조금 앳되어 보여서 불안 했는데, 다행히도 레이는 성인이었다.
계속해서 내 팔을 끌어안고 있던 레이의 옆으로,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루나와 알렉시스 공녀가 다가왔다.
굳은 얼굴을 한 알렉시스 공녀는, 곧장 나와 레이의 사이를 파헤치고 들어와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갈라 놓았다.
“...저도 열아홉이에요, 오스틴.”
“...예?”
“왜 그러시죠? 오스틴은 어린 여자가 좋은 게 아니었나요?”
“아니, 공녀님. 저희 그래봤자 두 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요...”
내가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로빈과 루나 역시 알렉시스 공녀에게 가세하며 차게 식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는 루나와 로빈의 경멸의 눈빛은 견딜 수 있었지만,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알렉시스 공녀의 공허한 눈빛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보여 주는 것 같은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오스틴.”
“ㄴ... 네.”
“다른 사람에게... 너무 서스럼없이 다가가지 마세요. 특히나 여자들은 더더욱. 아시겠어요?”
“공녀님. 저는 진짜 별다른 의미 없이...”
“대답.”
“...네.”
내가 알렉시스 공녀와 실랑이를 하는 사이, 어느새 바퀴를 다 갈아 끼운 비어슨이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다가왔다.
“후... 다 됐소. 굴러가기야 하겠지만, 장거리를 여행해야 한다면 혹시 모르니 큰 도시에 가서 다시 손보는 게 좋을 거요.”
“아이고. 수고하셨습니다.”
좋아. 임시방편에 가깝긴 하지만 마차도 고쳐졌고, 오늘 밤 몸을 누일 마을도 있다.
어째 마을 분위기가 수상하기에, 마음 같아서는 바로 떠나고 싶지만...
“어? 비가...”
염병할, 하필이면 비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적시는 빗방울의 감촉을 느끼던 레이는, 우리를 향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비도오고 시간도 늦었으니까, 어서 저희 집으로 가요!”
“그래도 될까?”
“네! 어차피 저랑 언니만 살고 있는데, 집은 쓸데없이 크거든요... 남는 방도 있으니까, 얼른 오세요!”
...오늘 밤은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자야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