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43. 과거, 현재, 위기
* * *
“입에 맞으시나요?”
“네! 이 정도면 그냥 장사를 해도 되겠는데요? 와, 진짜 맛있네요!”
“흐응... 다행이네요.”
나는 허겁지겁 손을 움직이며 스튜를 입에 넣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익힌 쫀득 쫀득한 돼지고기는, 뜨거운 스튜의 국물에 비계가 녹아들어 국물맛을 진하게 해주었다.
스푼을 들어 스튜를 한 숟갈 떠 올리면, 윤기가 반들거리는 돼지고기와 한입 크기로 잘린 잘 익은 야채가 한가득 떠 올려졌다.
“시발...”
진짜 존나 맛있다. 레인저에서 먹었던 짬 처리 스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비인간적인 맛이었다.
로이먼과 루나 역시 스튜가 입에 맞았는지, 눈을 크게 뜬 채 쉬지 않고 스푼을 입으로 가져갔다.
“우걱우걱. 쩝쩝. 호로로로록!!! 후루루루룩!!!!!!”
...로빈은 아예 그릇에 코를 박고 들이 마시고 있었다. 저러다 체 하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네.
그런 로빈과 상반되는, 그야말로 귀족다운 자태를 뽐내며 스튜를 즐기던 알렉시스 공녀가 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손수건을 꺼내어 로빈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로빈. 조금 천천히 드세요. 그러다 탈이 나겠어요.”
“움...! 움움! 우우웁!”
“...?”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우물거리기 시작한 로빈의 옹알이에, 알렉시스 공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빈의 입을 마저 닦아주었다.
“진짜 개 맛있으니까, 공녀님도 어서 드시랍니다.”
내가 통역을 해 주자, 알렉시스 공녀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스푼을 들어 올렸다.
“아... 로빈도 맛있게 드세요. 조금 천천히 드시구요...”
“우움! 움!”
“걱정 마시랍니다.”
“어... 네...”
처음에는... 부끄럽지만, 혹시나 음식에 이상한 게 들어가진 않았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아예 커다란 냄비를 그대로 들고 와서 자신들의 그릇에도 그대로 담아 내는 레이와 레이의 언니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쓸데없는 의심은 그만두기로 했다.
레이의 언니, 레아는 레이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미인이었다. 레이가 조금 더 성숙하게 자라면 저렇게 생겼을 것 같다.
레아는, 보기만 해도 홀릴 것만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빵을 찢기 시작했다.
“후훗... 많이 드세요. 곁들여 먹을 빵도 있으니까, 모자라면 말씀 하시구요.”
...예쁘다. 마음씨도... 크다. 요리도 잘한다. 이거 완전 현모양처네. 결혼하자고 할까? 결혼해서, 이 마을에 눌러앉고 같이 오순도순 사는 거야. 애는 둘 정도면 좋겠다. 갈란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모그단은 뭐...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헛.”
시발.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거지?
순간 머리에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기에,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음식에 이상한 걸 탔나? 나는 곧바로 표정을 고쳐 잡고, 내 앞에서 사이좋게 떠들고 있는 레이, 레아 자매를 바라보았다.
“언니! 내일은 내가 요리할래!”
“레이... 네 요리는 좀...”
“이익... 뭐야! 지금 내 요리를 무시하는 거야?!”
...애초에 뭔갈 탔으면, 이 둘도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었을까.
그냥 단순한 두통이겠지, 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넘어갔다. 그렇다고 의심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말자.
애초에, 힘도 못쓰는 시골 마을 처자 둘이서 우리를 어떻게 하기야 하겠냐마는.
“후루룩... 크어어어어!!!!!! 레아 언니! 한 그릇 더 주세요!”
어느새 세 그릇 째를 전부 비운 로빈은, 아저씨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레아에게 빈 그릇을 건네주었다.
“후후... 그래. 많이 먹으렴.”
“잘 먹겠습니다!”
쟤는 인간이 아니라 슬라임인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저 식성은 말이 안 된다.
그리 생각하며, 빵을 부욱 찢어 스튜에 찍어 입에 넣었다.
......
“와그작 와그작! 호로로록!!! 쩝쩝! 크하아아!!!”
“오스틴! 천천히 좀 먹어라!”
* * * * *
“아 배부르다...”
행복하다. 배 부르고, 등 따시고. 요 며칠간 정말 눈코뜰새도 없이 바빴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이런 사치를 누리게 되니 몸이 침대와 합체되는 것 같다.
행복 별거 없다. 그냥 이렇게 배 부르고 등 따실수 있으면, 나는 그걸로 족한다.
방금 목욕을 하고 나와서 그런지, 뽀송 뽀송한 이불 위에 누우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색... 새액...”
“쩝쩝... 우우웅...”
곤한 숨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돌려 보니, 같은 침대에 누운 루나와 로빈은 이미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많이 피곤하긴 했나 보네.
“공녀님은 안 주무십니까?”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인데... 하아암... 죄송해요... 잠깐 눈 좀 붙일게요...”
“아닙니다. 걱정 마시고, 오늘은 그냥 맘 편하게 주무십쇼.”
“고마워요... 오스... 틴......”
알렉시스 공녀마저 기절하듯 잠들고, 커다란 침대 위에 누운 내 옆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던 로이먼이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형제님. 저는 잠시 화장실 좀...”
“어? 응... 그래. 큰 거냐?”
“...예. 금방 오겠습니다.”
“그래. 갔다 오면, 오랜만에 둘이서 한잔할래?”
내가 가방에 고이 모셔놨던 술병을 꺼내 들자, 로이먼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일은 마차를 몰아야 하니, 음주는 자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쩝... 그래. 너 오면 문 열어 줘야 되니까, 깨어 있을게.”
“그럼, 잠시 실례...”
로이먼이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가고, 나는 팔 베개를 한 채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다.
내 인생의 대격변기라고 해야 할까. 평생 몸을 담을 것 같았던 용사파티에서도 나오게 되었고, 한평생 본 적도 없었던 드워프와의 인연이 생겼다. 벨리온의 성벽은 굉장했지...
“...하암...”
수도에 가면, 그 교관 누나가 나를 반겨줄까? 아니, 레인저를 나올 때 서로 얼굴을 붉혔으니까... 푸대접을 해도 솔직히 할 말은 없다.
아니지. 이게 아니지. 그 전에, 갈란을 상대 할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놈을 어떻게 해야만 이길 수 있을까? 솔직히, 1년 전에 용사와 함께 놈을 상대했을 때에도 엄청나게 힘들게 토벌했었다.
마나가 아닌 피를 사용하는 놈의 능력과, 온갖 개조를 통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 그로 인한 폭발적인 혈류량은 물론, 고통을 쾌락으로 바꾸는 변태적인 맷집과 빠른 신체 수복 능력은 덤이었다.
비정상적인 전투 지속력. 그걸 어떻게든 해결... 해야...
아, 어쩌지. 눈이 점점 감기기 시작했다.
마치 무저갱 속에 빠지는 것처럼,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 자면... 안 되는... 데...”
로이먼 문 열어 줘야 되는데... 자면 안...
끼이익...
“...언니. 자는 것 같은데?”
“좋아. 약이 효과가 있네.”
눈이 감기기 직전, 누군가 소곤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살짝 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문 분명히 잠궈 놨는...
“커어어어...”
* * * * *
꿈을 꿨다.
어둡다.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새까만 재가 내 몸을 덮었다.
누군가 내 손을 잡으며 울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너무 어두워.
나는 어두운 곳을 싫어 했다.
아주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마을 옆에 있는 숲속에 놀러 들어갔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한참을 울었다. 이제는 정말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밤의 숲속은 소름 끼칠만큼 고요했고, 그 소리 없는 잔혹한 정적은 나를 미지의 공포속으로 몰아 넣었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어두운 곳을 싫어 했다.
레인저에서 그나마 나아졌지만, 여전히 어두운 곳을 싫어 하는 것은 똑같다.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에,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에 순수한 공포를 느꼈다.
점점 희미해지는 인영에게서 별안간 뚝, 하고 무언가 떨어졌다.
뺨에 촉촉한 감촉이 남아 있다. 눈물인가?
눈물이다. 적어도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 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불안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ㅁ... 안... ㅎ...
고운 미성이었다. 아무래도 눈앞의 사람은 여성인 것 같다.
울먹이며 말하는 통에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여기는 어디일까. 내가 어제 뭘 했더라.
어제 누구와 뭘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몸이 점점 무거워진다. 시야는 거의 보이지 않고, 이제는 희미한 형체만이 눈앞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일 힘도 없는 상황에서, 눈앞의 여자가 내 얼굴을 붙잡고 천천히 다가왔다.
쪽. 하는 의성어가 난 것은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내게 입술을 맞춘 여자는, 나를 꼭 껴안아 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랑해... 오스... 틴...
다시 만나자. 라고 말한 것 같았다.
* * * * *
“...?”
뭔가 좆 같은 꿈을 꿨는지, 온몸에서 식은땀이 난 탓에 축축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우음... 쪽... 쪼옥...”
게다가,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까지 들린다. 뭔가 가슴도 답답하고.
나는 열리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려, 힘겹게 눈을 떴다.
“스읍... 하아... 젊은 남자의 땀 냄새... 흐읏... 마법 재료로만 맡아 봤었는데...”
레이는 내 옆에서 나를 꼭 끌어안고 있고, 레아가 내 몸 위에 올라타 몸을 겹치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쁘게 숨을 들이 마시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습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레... 아씨... 레이... 무슨...”
“으응... 깼어...? 이상하네... 약은 확실히 들었을 텐데...”
“언니... 내가 조금만 더 바르자고 했잖아.”
이 여편네들이 지금 뭐라고 떠드는 거야. 약? 무슨 약?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몸은 움직이지 못할 테고... 조금만 더, 이대로 있자?”
요망한 미소를 지은 레아는, 말을 끝마치자 마자 다시금 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레아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손가락을 조금 움찔거리는 것 외에는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잠, 깐... 멈... 멈춰...”
간신히 혓바닥을 움직이며 힘겹게 말을 꺼내자, 레아는 상체를 들어 올려 분홍색으로 빛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아... 못 참겠어... 이제 못 참아...”
어어... 시발 잠깐만. 이 여편네가 왜 이래.
그녀는 이리저리 요동치는 내 눈을 보고 오히려 더 흥분 했는지, 내 귓가에 얼굴을 들이대며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후우... 미안해...? 원래는 정말 재워주기만 하려 했는데... 나도 처녀 딱지는 떼야, 어엿한 마녀 아니겠니...? 이 나이가 되도록 처녀라니, 마녀 실격이라구...”
“마... 뭐...?”
“우리 친구는... 마녀가 뭔지 모르니...? 후우~”
“언니. 다음은 내 차례야. 빨리하고 나와...”
양쪽에서 귓구녕에 다이렉트로 꼴아 박히는 뜨거운 숨결에, 나도 모르게 온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그것보다, 뭐? 마녀라고?
깨어난 지 시간이 조금 지난 덕분인지, 마비된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던 혀가 점점 풀어지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레아씨... 우리 얘기 좀 합시다...”
“후후... 안 돼. 그냥 얌전히 먹혀... 축하해? 내 처녀를 가져가는걸 영광으로 알라구...”
“너 같은 노땅이 무슨 처녀야... 이 미친년아...!”
“후후... 우리가 이 마을을 만든 지 얼마 안 됐거든...? 목공소에 있는 남자는 내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야...”
“언니는 몰라도, 나는 나름 괜찮아 보였는데... 뭐, 나도 그 아저씨랑 잔 적은 없지만 말이야.”
너 같은 남자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어. 라는 말과 함께, 레아의 옷이 훌러덩 벗겨졌다.
나는 속옷만 입고 있는 레아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이제 마비가 거의 풀린 입을 빠르게 움직였다.
“자... 잠깐...! 스톱...! 우리 말로 합시다. 대화로 풀어 나가요...!”
“몸의 대화를 나누자고? 좋아. 나야 환영이지.”
“나랑도 대화 하자, 오빠.”
“그게 아니고, 이 미친년아...!”
마녀들은 처녀를 떼어야 진정한 마녀라고 평가 받는다. 처녀막을 떼어야, 몸이 진정으로 마나를 운용할 준비가 되었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마녀의 가장 무서운 점은, 한 번 마음에 든 남자는 죽을때 까지 포로로 붙잡아 쥐어 짠다는 것이다.
마녀가 마음에 드는 남자를 꼬드겨서, 잠자리로 끌고 오는 순간부터 그 남자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 침대 위는 이 년들의 절대 영역이다.
내가 정말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것은, 결국 극한의 착정을 당해 복상사 당한 남성의 성기를... 떼어내서 마법으로 보존해 컬렉션으로 모으는 미친 마녀들도 종종 있다는 점이다. 애초에 처녀를 뗀 이상, 쓸모가 없어지니까.
“하아... 너는 꽤 괜찮은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 같네... 힘이 다 떨어지면, 내 첫 컬렉션으로 추가해줄게... 영광으로 알렴...”
“언니...! 나도 해 보고 싶단 말이야!”
“물론, 레이도 충분히 즐기게 해줄게. 후후... 기대되지 않니?”
그리고, 레아는 아마 그 미친년 중 하나인 게 분명했다.
시발... 눈을 힐끔 굴리니, 다른 일행은 모두 약을 먹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루... 루나...! 로빈! 알렉시스! 일어나!”
“흐응... 소용없어... 저 여자들은 너보다 더 강한 약을 먹였거든... 거사를 치르는데 방해를 받으면 곤란하잖아?”
시발, 좆됐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눈을 꼭 감은 순간, 마물들을 때려잡던 로이먼의 모습이 아른 거렸다.
그래. 로이먼 그 새끼 똥 싸러 갔었지. 내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사제가 너를 구해 줄 것 같니? 걱정 마렴. 문은 마법으로 강화해 두었으니... 인간의 몸으로는 부수지 못한단다?”
“오빠...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즐기자?”
씨발. 씨발. 안 돼...! 안 돼!!!
“끼야아아아아악!!!!!! 로이먼!!! 살려 줘!!!!!!”
“후후... 소용없어. 그 사제에게는 훨씬 더 강한 약을 먹였거든... 아마 지금쯤 화장실에 엎어져서 자고 있을... 응?”
쿵. 쿵.
온 힘을 다해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을 지르자, 곧 바깥에서 쿵쿵 거리며 복도를 뛰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콰앙!!!!!!
큰 소리를 내며 날아간 문짝이 창문을 깨고 바깥으로 날아가고, 곧이어 로이먼의 붉은 눈이 어두운 방 안에서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간악한 존재들이여.”
로이먼에게는 약발이 잘 듣지 않았는지, 레이와 레아가 옷을 갖춰 입으며 당황한 표정으로 로이먼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감히 이런 추악한 일을 벌인 죄, 죽음으로서 갚으리라.”
“로... 로이먼...!”
믿고 있었다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