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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44화 (44/106)

〈 44화 〉 44. 남자의 자존심

* * *

“그 추악한 짓도 여기까지다.”

로이먼이 강철 채찍을 절그럭— 움켜쥐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로이먼이 한 걸음을 내딛자, 흠칫하며 한 걸음 물러서는 레아와 레이.

“여지껏 잘도 그 더러운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군. 네년들은 죄가 많은 몸이나, 사후 회개와 고해를 마친 뒤,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되면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당... 당신 대체 뭐야... 인간맞아...?”

“믿음의 힘이다. 사악한 존재들이여. 네년들은 평생 이해할 수 없는 성스러운 힘이지.”

로이먼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레아와 레이 역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로이먼! 나부터 좀 풀어 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끝날 테니.”

나와 로이먼이 대화를 나누는 잠깐 사이, 레아와 레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알렉시스 공녀와 루나가 잠들어 있는 침대 머리맡으로 달려갔다.

“저, 저...! 야! 빨리 풀어 줘!”

“이런...!”

로이먼이 빠르게 내 손과 발에 묶인 마력 밧줄을 끊어 주었지만, 이미 레아와 레이는 각각 루나와 알렉시스 공녀를 인질로 잡고 있는 상태였다.

아직 처녀막은 남아 있지만 꼴에 마녀라고, 레아와 레이가 손을 뻗자 허공에서 마법진이 그려짐과 동시에, 보기만 해도 흉흉한 얼음 칼날이 튀어나왔다.

“이익...! 꼼짝마! 그 이상 다가오면, 네 동료들의 목을 베어버릴 거야!”

시퍼런 한기가 풍겨 오는 얼음 칼을 거머쥔 레아와 레이는, 곧바로 루나와 알렉시스 공녀의 목덜미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시발.”

좆됐다. 로이먼 이 새끼, 폼 잡지 말고 그냥 바로 무기부터 휘둘렀으면 됐잖아...!

“로이먼. 목을 긋기 전에, 그 채찍으로 무기를 빼앗을 순 없냐?”

“어림 반 푼도 없습니다. 저들이 목을 긋는게 더 빠를겁니다.”

“아니, 씹.”

원래 이 방법은 안 쓰려 했는데.

나는 그녀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손을 움직여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는 쇠뇌를 집어 들었다.

장전은... 안 되어 있다. 미리 한 발 이라도 장전을 해 둘 걸.

“우... 움직이지 마...! 그 이상 움직이면, 진짜로 그어 버릴 거야!”

아무리 조용히 움직였다고 해도, 쇠뇌를 집어 드는 몸짓까지 숨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와 대치하던 레이는 내 수상한 움직임을 보곤, 마치 억지로 짓는 것처럼 어딘가 조금 어색하게 화난 얼굴을 하며 칼날을 바로 쥐었다.

“레이. 그리고... 레아씨. 우리 조금만 진정하고, 대화로 해결해 봅시다. 예?”

나는 등 뒤로 손을 돌려 볼트를 장전하며 그녀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야부리를 털기 시작했다.

솔직히,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그녀들을 쏴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지금 저 둘이 하는 행동은 찢어 죽여 마땅하지만...

나는 인질을 잡힌 마당에 섣부르게 움직일 만큼 어리석지 않다.

“이런다고 서로 득 될 것도 없어요. 우리 협상을 해 봅시다. 예?”

내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설득하려 들자, 레아와 레이는 잠깐 흔들리는듯하다가 이내 표정을 바로잡았다.

“...착각하지 마. 네 동료들의 목숨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얌전히 손을 들고 뒤로 돌아.”

애써 험악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나는 칼날을 거머쥔 그녀들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어차피 못 죽이잖습니까. 객기 그만 부리시고, 서로 무기는 내려 놓읍시다.”

“...!”

좋아. 방금 말은 꽤 돌직구로 박힌 모양이었다.

그녀들의 눈동자가 한층 더 흔들리더니, 칼날을 거머쥔 손에 더욱더 힘을 주어 피가 칼날을 타고 흘러 내렸다.

“우리가 못 죽일 것 같아? 우린 마녀라고! 이까짓 인간들의 목숨 따위...”

좋아. 거의 다 넘어왔다.

걷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척을 하더라도, 내 눈에는 그녀들이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보였다.

이쯤에서, 도박을 해야 한다.

나는 볼트를 장전한 쇠뇌를 슬쩍 꺼내어, 숏소드와 함께 침대 위에 살포시 올려 놓았다.

내 왼손에 들린 쇠뇌를 본 그녀들은 ‘언제?!’ 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내가 침대 위에 무기를 올려놓자 어리둥절 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부터 죽여 보세요.”

“뭐... 뭐?”

“한낱 인간들 목숨따위, 별거 없다면서요? 저부터 죽여 보시라구요.”

여기서, 섵불리 선공을 날려 루나와 알렉시스 공녀를 위험하게 만드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내 말을 들은 레아와 레이는, 곧 눈에 지진이라도 난 듯 눈동자를 심하게 떨며 나를 노려보았... 얼씨구. 아예 눈물까지 맺혔다.

역시, 내 짐작대로 저 둘은 바깥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견습 마녀인게 분명하다. 아마 바깥세상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은커녕 동물도 죽여 본 경험이 없는 햇병아리 마녀일 것이다.

“...자, 그러니까 무기를 내려 놓으실까요?”

내가 최대한 다정한 말투로 부드럽게 말 하자, 레아와 레이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손에서 떨어진 얼음 칼날은, 바닥과 부딪치기 직전 녹아내려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형제님. 제가...”

“로이먼.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알겠습니다.”

로이먼에게는 로빈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해독을 맡긴 뒤, 제자리에 주저앉은 레아와 레이를 향해 다가갔다.

“레아씨. 레이.”

“...2주.”

“...예?”

“바깥세상으로 나온 지 이제 2주일 되었어요. 레이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제가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레이는 제발...”

“오빠... 제... 제가 뭐든지 할게요... 저희 언니는...”

“아니...”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눈물짓는 레아의 태도에, 나는 조금 난감해졌다.

순순히 항복한데다가, 처음부터 누군가를 해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라 굳이 죽일 필요는 못 느꼈기 때문이다.

이대로 두면 다른 여행객이 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저보고 컬렉션에 추가한다느니... 그랬던 건 뭡니까?”

“그... 그건... 스승님께서 바깥세상에서 괜찮은 남자를 발견하면, 그렇게 협박하라고... 첫 만남 부터 꽉 움켜쥐어야 휘둘리지 않는다고...”

“...그럼, 아까 저한테 보여 주셨던 그... 행동들은요?”

“저... 저도 부끄러웠단 말이에요... 인간 남자가 아니면, 처녀를 떼지 못하니까... 저도 필사적이었던 거에요...”

“...아이고야.”

아무래도, 이 둘의 스승이라는 아줌마는 상당히 경험이 많은 여편네인 것 같다. 이렇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을 해 주다니.

어디 빡촌 에이스라도 되나?

“저를 죽을 때까지 쥐어 짠다던가... 그럴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닙니까?”

“아...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그... ㅊ... 처녀... 처녀만 떼고... 보내드리려고 한 건데... 스승님께서 처녀를 떼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말라고...”

“후... 아니, 아무튼... 아무도 안 죽일 테니까 안심하시고요. 그럼, 밖에 있는 다른 마을 사람들은요?”

“그게... 저희도 잘 몰라요. 저희는 그냥 스승님께서 열어 주신 게이트를 타고 바깥세상에 나왔는데, 이 마을 이었어요.”

이쯤 되면, 슬슬 그 스승이라는 작자한테 화가 날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자라는 애들을 보내놓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내버려 둔다고?

“...참으로 안타까운 처지에 놓이셨군요. 제가 잠시 착각을 했습니다만, 아직 여러분들은 회개의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로이먼 역시 이 둘의 사정이 어지간히 딱했는지, 측은한 눈길로 그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둘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야부리를 잘 털어서 고비는 넘겼다만, 다른 여행객들이 걸릴 수도 있으니 이대로 내버려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내 앞에서 눈물을 지으며 다소곳이 앉아 있는 두 여인을 힐끔 바라보았다.

솔직히, 아까 내게 보여주었던 뇌색적인 포즈들과 행동을 보고 아랫도리의 화를 가라앉히느라 진땀을 흘렸다. 양옆에 초절정 미녀 둘이 딱 달라붙어서 한 판 하자고 하는데, 그걸 참으면 남자가 아니지.

“...레아씨, 레이. 처녀만 떼면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내가 묻자, 레아와 레이는 흠칫하며 몸을 떨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먼. 알렉시스 공녀님이랑 다른 애들 데리고, 잠깐 다른 방에 가 있어.”

“어... 음...”

“이대로 내버려 두기도 그렇잖아. 금방 끝낼테니까, 얼른.”

“...알겠습니다. 두 분 모두, 이 일을 계기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시길 진심으로 기도 하겠습니다.”

로이먼이 잠에 든 일행들을 업어든 채 방을 나가고, 나는 레아와 레이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까부터 아랫도리가 잔뜩 성이 난 통에, 솔직히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금방 끝내 드리겠습니다.”

* * * * *

이튿 날 아침, 우리는 말끔하게 수리 된 마차에 올라 타고, 우리를 배웅해 주기 위해 마을 어귀까지 나와 준 레아와 레이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레아 씨. 어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뇨. 저희도... 좋은 걸 받았는걸요.”

배시시— 웃으며 혀를 날름거리는 레아의 모습에, 어젯밤의 모습이 떠올라 허리가 뻐근해졌다.

다른 일행들 역시 상투적인 작별 인사를 주고받은 뒤, 나는 레아와 레이에게 다가가 소곤거렸다.

“음... 저기.”

“네?”

“...어젯밤은, 그... 좋았습니다.”

내 말에, 레아와 레이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리자, 레이가 내 소매를 붙잡아왔다.

“저기... 오빠.”

“응?”

“호... 혹시, 나중에 또... 으으...”

“...그래. 나중에 또 보자.”

내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레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인연이 닿으면 또 봅시다!”

마침내 말발굽이 흙길을 두들기며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레아와 레이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 갔다.

“어후... 거기... 거기 좀만 더 세게... 으으윽...”

“아니, 선배님.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이렇게 야단법석을 떠시는 거에요?”

“아니, 어제 허리를 다쳐서... 응...”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하자, 루나가 한숨을 내뱉으며 내 허리를 꾹꾹 눌러 주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나이도 어리면서, 벌써 허리를 걱정하면 어떡하나.”

“아하하...”

시발. 이건 무덤까지 가져가야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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