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47화 (47/106)

〈 47화 〉 46. 낯익은 존재

* * *

오스틴 일행이 떠나간 사프란 마을.

레아와 레이는, 바로 엊그제만 해도 그녀들과 몸을 겹쳤던 오스틴을 생각하며,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로브는... 킁킁... 깜빡하고 안 빨았네... 스승님께서 한 소리 하시겠다.”

“언니. 마법서는 챙겼어?”

“응. 챙겼어. 뭐 하다가 이제 왔어?”

“비어슨 아저씨랑 작별 인사 좀 나누고 왔어.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인 인간이니까.”

마녀의 상징인 고깔모자를 고쳐 쓴 레이를 흐뭇하게 바라본 레아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손을 들어 올려 정신을 집중했다.

손가락 끝으로 마나를 집중시키고, 심장에 모여있던 마나를 온몸에 퍼뜨린다.

이전에는 이것만으로도 힘들어서 주저앉고 말았겠지만, 오스틴 덕분에 마나를 한 층 더 수월하게 운용할 수 있게 된 몸은 끄떡없었다.

레아의 손가락 끝을 중심으로 마나가 방출되기 시작하고, 점차 마나의 밀도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어머.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니?”

익숙하면서도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레아는 슬며시 감았던 눈을 떴다.

눈앞에 열린 푸른빛의 게이트와, 그 게이트를 타고 넘어와 있는 그녀의 스승.

“...스승님.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응? 아냐~. 우리 귀여운 제자가 부르면 바로 달려와야지.”

“언제부터 그렇게 아꼈다고... 맨날 설거지만 시켰으면서...”

“방금 뭐라고 했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평소에는 고분고분 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능구렁이 같은 스승님이 미워 보였다.

“그래... 어떻게, 용케 한계를 넘어서긴 했나 보구나? 못할 줄 알고, 내가 따로 짝을 맺어줘야 하나 싶었는데 말이야.”

그리 말하며, 잿가루를 날리는 스승님은 담뱃대를 툭툭 털어대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랑 맺어졌니? 내가 가져다 놓은 비어슨? 아니면, 지나가던 여행자? 모험가?”

“그냥. 지나가던 여행자요.”

“...호오?”

또 시작이다. 궁금해서 죽겠다는 저 눈빛.

“여행자라고? 그렇게 남들 앞에서 낯을 가리던 너희가?”

“...그러면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지~. 단지, 너희가 이렇게 빨리 짝을 맺을 줄은 몰랐던 것뿐이야. 그래서, 그 여행자가 누군데? 짝으로 맺어졌다면, 결국 나중에는 반드시 데려와야 하는 거 알지?”

스승님의 말에, 레아는 또다시 아래가 젖어드는 것 같았다. 오스틴과 한평생 살아갈 수 있다니. 매일 밤마다 그렇고 그런 짓을...

아니, 이게 아니지.

“잘생긴 분이셨어요. 싸움도 나름 잘하시는 분이었던 것 같구요. 이름이... 오스틴이었나?”

“그래 그래. 오스틴... 응?”

레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스승님이, 갑작스레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재차 물어보기 시작했다.

“오... 오스틴? 혹시, 밝은 갈색 머리카락에 벽안? 쇠뇌와 칼을 차고 다니는?”

“어... 맞는 것 같은데요? 아는 사이세요?”

“하아...”

그 남자와 무슨 인연이 있길래, 저렇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뱉는 것일까.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수정구가 허공에 떠올라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애쉬. 빨리 전선으로 돌아와라. 인간 놈들의 드레이크 기수들이 전선을 돌파하려 한다. ]

“...너희, 나중에 꼭 다시 얘기하자. 따라와.”

마왕군의 제5 군단장. 재의 마녀, 망각의 마녀. 애쉬.

그녀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는 레아와 레이 자매를 데리고, 게이트에 몸을 맡겼다.

* * * * *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쩝쩝...”

“...천천히 드세요. 급하게 드시다 체 합니다.”

내가 건네어 주는 고기를 받아 들고 허겁지겁 입으로 욱여넣는 백발의 소녀를 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대체 어디 사는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 하나 아는 게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지만...

“그렇게 맛있으십니까?”

“네... 네에... 지금까지 살면서 먹어본 것들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

눈가가 촉촉해지는 가엾은 이야기에, 일단 배불리 먹이고 나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맞는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빚을 지워 놓으면 나중에 대화할 때 이점이 되지 않을까?

“루나, 무슨 일 있어?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실례야.”

“아닌가...? 하지만...”

루나는, 아까부터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은채 눈앞의 소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간혹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이, 저 소녀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손에 들린 빵조각을 전부 입에 털어 넣고, 엉덩이를 옆으로 움직여 루나의 옆에 다가갔다.

“아는 사람이야? 아까부터 왜 그래?”

내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곤거리자, 루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으음... 아니다. 단지, 얼굴이 아가일 님과 너무 닮아서...”

“...아가일이 여자였어?”

“그래. 저 소녀의 얼굴이 그분과 많이 닮긴... 아니, 거의 빼다 박은 수준이라서 그랬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금 소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헝클어져 있는 백발과, 얼굴에는 흙 얼룩이 조금 묻어있는, 꾀죄죄한 그녀의 몰골이 눈에 들어오니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대체 얼마나 굶었으면 저렇게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단 말인가. 저건 하루 이틀이 아닌, 며칠 정도 각 잡고 굶은 게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모습이다.

조금 수척해 보이는 몸은, 최근 엄청나게 굴렀다는 것을 방증해주는 듯했다.

“야. 저게 아가일이랑 닮았다고? 내가 아가일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내 눈에는 그냥 오늘내일하는 거렁뱅이밖에 안 보이는데?”

“으음... 아니. 얼굴이 조금... 많이 닮았다 뿐이지, 그 외에 다른 것들은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군. 무엇보다, 머리카락도 보라색이 아니고 말이야.”

루나의 말마따나, 만약 그녀가 정말 아가일이라면, 머리카락이 백발이어서는 안 된다. 마족 특유의 자색 머리카락은 결정적인 증거이니까.

“세상 참 오래 살고 볼일이네. 살다 살다 마왕군 군단장 닮았다는 소리 듣는 사람은 처음 본다, 야.”

“동감이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지닌 소녀군. 안타깝게도...”

적당히 배를 채운 우리가 동정의 눈길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허겁지겁 밥을 먹던 소녀가 배를 두드리며 행복한 미소를 짓다가, 우리와 눈이 맞았다.

“왜 그렇게... 보... 는...”

“...?”

뭐지?

우리를 바라보는, 아니. 정확히는 루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이 조금씩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네?! 아... 아니... 제가 아는 사람과 닮았구나~ 싶어서...”

“신기하군. 마침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정적.

“......”

어색한 정적이 계속해서 흐르고, 타닥거리는 모닥불 소리와, 로빈이 수저로 그릇을 바쁘게 두들기는 소리만이 고즈넉하게 울려 퍼졌다.

시발. 어색해서 뒤져버릴 것만 같다.

“그... 그러고 보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기가 막힌 타이밍에 끼어든 알렉시스 공녀 덕분에, 조금 딱딱했던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이름?”

“네. 이름이요.”

“이름은... 그으...”

우리와 눈을 똑바로 맞추고는 있지만, 은근히 마차가 있는 방향을 흘깃거리는 눈동자와, 이따금씩 땅을 두들기는 소녀의 발.

레인저의 모든 훈련 과정을 수료한 나는, 저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은... 실비아 야.”

“실비아... 예쁜 이름이네요.”

자애로운 미소를 보여주는 알렉시스 공녀와는 다르게, 나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저 소녀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땅을 탁탁 두들기며 까딱거리는 발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아마 저렇게 발을 까딱거리는 행동이, 저 소녀에게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일 테지.

억지로 우리와 눈을 맞추고 있는 것 또한, 자신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인위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엇보다, 자꾸만 마차를 향해 돌아가는 눈.

심문을 당하는 사람이, 자꾸만 심문실의 문쪽을 흘깃거리는 것과 같다. 무의식적으로 탈출구를 모색하는 것이다.

“실비아. 확실합니까?”

“ㄴ... 네?”

“실비아라는 이름, 확실하냐고요.”

“네. 제 이름 맞는데요...”

...뭐지?

거짓말이라고 확신해서 일부러 고압적인 태도로 물었건만, 눈앞의 소녀는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내가 너무 오바를 싼 건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뜸 이름을 물어봐서 무서웠던 건 아닐까?

“형제님. 오늘 설거지는 제 차례입니다. 그릇 주십시오.”

나는 내 손에 들린 그릇을 가져가는 로이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서울만하네.”

“예?”

“아냐. 혼잣말이야.”

내가 너무 과민 반응한 모양이네. 저런 무서운 아저씨가 뒤에 떡하니 서 있는데, 무서워하지 않고는 못 배기긴 해.

* * * * *

‘사... 살았다아...’

뜬금없이 데팔, 현재는 루나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그녀와 맞닥뜨렸던 아가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천막 안에 몸을 누였다.

세뇌 마법이 각인되었던 마나석이 빼앗긴 뒤로, 루나는 아가일의 마력을 분별할 수 없어졌을 터이다.

그렇지만, 기껏 눈물을 머금고 꼬리 자르기를 했던 그녀와 이렇게 마주치게 되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안 그래도 루나에게 죄책감 비스무리한 것을 느끼고 있던 그녀는, 루나와의 만남이 썩 내키지 않았다. 지금은 행복해 보이니, 그나마 잘 된 것일까.

다행히 머리색을 바꾼 덕에 정체를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루나의 옆에 앉아있던 사내는, 아가일의 거짓말을 거의 간파할 뻔했으니까.

처음에는 사내의 질문에 당황했지만, 막판에 메소드 표정 연기를 하며 열연을 펼친 덕분에 의심을 지울 수 있었다.

“오스틴...”

용사 파티의 전 척후 담당, 오스틴. 레인저 출신. 밝은 갈색 머리카락에, 맑고 푸른 눈을 지닌 사내.

하필이면 이렇게 마주치다니. 아가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적으로 만났을지도 모르는 놈과 마주치는 것은, 힘의 대부분을 잃은 아가일에게 상당한 심적 피로를 주었다.

‘일단, 실비아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자... 힘을 완전히 되찾기 전까지는... 힘만 되찾는다면...’

목표는 정해졌다. 일단, 마력을 다시 채우는 것이 급선무다.

힘을 되찾게 되면, 곧바로 아가토의 게이트를 이용해 빠져나가자.

참으로 오랜만에, 나무 밑동에 자라난 버섯이 아닌, 기름진 고기를 양껏 먹은 탓일까. 배부르고 따뜻한 잠자리에, 아가일의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새액... 새액...”

담요를 덮고 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천막의 열린 틈 사이로 누군가 지켜보는 것도 모른 채.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