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47. 돈과 소금이 오가는 곳
* * *
덜컹거리는 마차에 앉은 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로빈은 현재 마음이 심란하다.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어젯밤으로 시간을 되돌려야 할 것이다.
불침번을 서는 동안,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살짝 들춰 본 실비아의 천막 안에서, 그녀는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오스틴...
실비아가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에 입술을 살짝 깨문, 이른바 암캐의 표정을 지은 채 선배님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설마, 실비아는 선배님을 좋아하는...’
말도 안 된다. 애초에 처음 만난 사이일 텐데, 무슨 아녀자들이 보는 로맨스 소설도 아니고, 첫눈에 반하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말이 되나?
로빈은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기로 했다.
며칠 동안 쫄쫄 굶은 채 정처 없이 숲을 헤매다가, 우연히 만난 잘생기고 훤칠한 남자가 맛있는 밥을 주고 목숨을 구해준다? 사실상 백마 탄 왕자님이나 다름없어 보일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첫눈에 반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로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거 나랑 다를 게 없잖아...’
따지고 보면, 로빈 역시 4년 전 오스틴에게서 바위 메뚜기 떼로부터 목숨이 건져진 뒤, 남몰래 연심을 키워 왔으니까.
안 그래도 최근 선배님께 귀찮은 여자가 두 명이나 달라붙어서 곤란한 참인데, 여기서 한 명이 더 껴버린다?
‘...절대 안 돼...’
빼앗기고 싶지 않은데. 나만의 선배님인데. 축복해 주지는 못 할 망정, 왜 이렇게 방해하는 것들이 많은 걸까.
...좋아. 빼앗기기 전에, 내 걸로 만들어 버리자. 기정사실을 만들어 버리는 거야.
당장 오늘 밤에라도...
“그러니까, 저 앞에서 왼쪽 길로 틀면... 로빈?”
“네... 넷?!”
“...내 말 듣고 있어?”
“죄...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요 앞에서 갈림길이 나올 텐데, 왼쪽으로 꺾어야 된다고.”
“네... 죄송합니다...”
의도치 않게 선배님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선배님의 마음속에서, 로빈에 대한 점수가 팍팍 깎이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로빈은 머리가 조금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조금 전의 음습한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대로 기정사실을 만들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지도 모른다. 전우로서의 신뢰는 차고 넘칠 만큼 쌓였겠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전우나 친우로서가 아닌, 이성으로서의 호감도이다.
조금 더 기회를 노려보자. 선배님께서 이성을 바라보는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호감도를 차곡차곡 쌓아 가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면... 마치 사냥감을 포착한 사냥꾼처럼, 기회를 노리고 노리다가, 빈 틈이 보이는 순간에 확 덮쳐서 바로...
“꿀꺽...”
로빈은 침을 크게 삼키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로빈의 앞날을 축복해 주듯,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간질였다.
* * * * *
“...너 진짜 그렇게 나올 거야?”
“형제님.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입니다.”
“승부의 세계는, 니미... 아직 패도 안 깠는데, 어떤 카드가 나오셨길래 이렇게 자신만만하실까?”
“음... 저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너... 오늘 빈털터리가 되고 싶다 이거지?”
“형제님. 허세를 부리셔도 소용없습니다.”
“그래. 오늘 누구 하나 죽어보자고.”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내 등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로이먼의 손에 들린 카드는 뭐길래, 저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걸까.
“그럼... 패를 공개해 주세요!”
알렉시스 공녀의 말과 함께, 나와 로이먼의 손에 들린 카드가 뒤집혔다
나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로이먼의 카드와 나의 카드를 비교했다.
“이... 이 씹...”
“오스틴 선배님께서는 킹 코카트리스! 로이먼 사제님은 시 서펜트! 필드는 바다! 오스틴 선배님의 패배예요!”
“대단하군, 로이먼 사제. 이걸로 8연승 인가.”
“오... 오스틴... 괜찮으신가요?”
그래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조금 전으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커다란 운하가 파여 있는 상업 도시 하르만에 도착한 우리는, 길게 늘어서 있는 마차의 행렬에 줄을 서야만 했다.
상인 증명서나 상단패가 있었다면 곧바로 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일개 모험가 나부랭이 신분밖에 없었기에, 순순히 이 기다란 줄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멍 때리며 지루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다리던 도중, 우리의 옆을 지나치는 상인 한 명이 팔던 카드를 발견하고 만 것이었다.
본래 모험가 길드에서, 새내기 모험가들이 마물들의 생태계를 조금 더 알기 쉽게 하기 위해 만들어 낸 카드.
취지는 좋지만, 조금만 파고들면 이 게임의 치명적인 단점임과 동시에 중독성이 강한 원인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 게임의 모든 것은 운으로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카드를 뽑는 것부터 해서, 가위 바위 보로 필드를 정하는 순서까지, 정석대로만 플레이한다면 순전히 운에만 의존해야 하는 운빨 좆망 겜이다.
그리고, 내 앞에서 덤덤히 카드를 정리하고 있는 로이먼은, 호기롭게 도전한 나를 여덟 번 연속으로 박살 내버렸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은 채, 내면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심호흡했다.
“형제님. 유난히 운이 없는 날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액땜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덤덤히 입을 여는 로이먼의 말에, 결국 터져버렸다.
“야! 너 씨발 이거 사기 친 거 아니야? 어떻게 된 게 8번 연속으로 필드도 유리하고, 카드도 더 쌘 걸로 가져가냐고!!!”
“사기라니요. 정의로운 빛에 맹세코, 그런 짓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야 이 씨발련아!!! 구라 치지 말고 내 돈 뱉어내!!!!!!”
“어엇...! 이러지 마십시오!”
나와 로이먼이 옥신각신 하며 카드를 마구 흩뿌리고 있자니, 실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의 카드게임을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실비아 와는,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이런저런 말 문이 트여서 서로 말을 놓게 되었다. 나이도 나와 동갑이라고 했으니, 굳이 불편하게 존댓말을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뭐야. 실비아 너도 하고 싶어?”
내가 대뜸 실비아를 향해 묻자, 그녀는 멍하니 카드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거렸다.
“어... 응? 아, 아니... 나는 그냥...”
“에이, 빼지 말고 와서 해 봐. 룰도 간단하니까 말이야. 로이먼이 상대해 주면 되겠네.”
“으음... 그럼 한 판만...”
내가 마차를 조금 들썩이며 몸을 옆으로 움직이자, 실비아가 쭈뼛거리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가위 바위 보를 한 다음, 이긴 쪽이 먼저 필드를 정합니다. 필드는 초원, 숲, 바다, 호수, 화산, 성지로 한정됩니다. 여기까지, 이해하셨습니까?”
로이먼의 설명에, 실비아는 눈을 반짝이며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응. 계속해줘.”
“심판이 카드를 섞고, 가위 바위 보에서 진 쪽이 먼저 카드를 받습니다. 서로 카드를 받은 상태에서, 단 한 번 카드를 바꿀 기회가 주어집니다만, 상대의 동의 하에 횟수에 제한 없이 카드를 바꾸실 수 있습니다.”
“오호...”
“패를 공개한 뒤, 필드의 종류를 바탕으로 해당 마물들의 강함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셨습니까?”
“응. 빨리 시작하자.”
...그래도 나름 국민 카드 게임인데, 아무래도 실비아는 이런 카드 게임조차 해 보지 못할 정도로 오지에서 살았나 보다.
눈을 반짝이며 어서 시작하자고 보채는 실비아의 모습에, 나는 어릴 적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내가 실비아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자니, 로빈이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로빈, 아파.”
“...딴 데 보지 마세요. 그거 반칙이에요.”
“그런 규칙이 어디 있는데?”
“몰라요. 아무튼, 게임이나 집중하세요.”
“어차피 로이먼이 이길 텐데, 뭘.”
그렇게 우리는, 카드놀이 삼매경에 빠진 채 하르만에 입성하는 것을 기다렸다.
* * * * *
“이런 말도 안 되는... 이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조용히 해, 이 새끼야! 초보한테 져 놓고 말이 많아!”
“아니, 형제님! 형제님께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처음 한 상대에게 15번 연속으로 지다니요!”
“너한테 8번 연패당한 나는 뭐가 되냐? 그냥 실비아가 카드 게임에 유독 특출난 거겠지.”
하르만에 입성하는 시간이 될 때까지 이어진 로이먼과 실비아의 카드 게임은, 로이먼이 15번을 연달아 내리 지면서 끝나고 말았다.
“실비아. 너 진짜 존나게 잘하더라. 감탄이 막 나오던데?”
“어... 응. 고마워.”
“그나저나... 또 반나절이나 기다렸네. 새벽부터 기다려서 다행인가.”
성문 안 쪽에 마차를 주차하니, 곧이어 수비대 한 명이 다가와 마차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식량과 생필품 따위를 뒤적이던 수비대가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는 새벽부터 기다린 끝에 하르만에 입성할 수 있었다.
성벽 안 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새하얗게 칠해진 건물들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여긴 진짜 오랜만인데? 뭐 바뀐 게 없네.”
수도에 가깝고, 이름난 상업 도시인만큼, 나 역시 과거 이곳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저 멀리 바다의 향기가 물씬 풍겨져 오는, 휴양지로도 유명한 메텔 왕국 최대의 상업 도시, 하르만.
새하얗고 깨끗한 길거리와, 시원하고 비릿한 바다 향기, 그리고 배가 항구에 들어왔음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한데 뒤섞여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실비아와 루나는, 마차 바깥에서 온갖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오... 오스틴! 나는 저 화산 문어 구이를 먹어봐야겠다!”
“안 돼. 로이먼이 다 털어가서 돈이 없어.”
“그... 그런...!”
사실 저런 군것질거리 정도야 사 줄 돈은 있었지만, 우리가 이 도시에 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로이먼. 갈란이라면 어디에 갈 것 같냐?”
내 물음에, 로이먼이 고삐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음... 놈은 사상자의 수를 힘의 척도로 삼는 광인이니, 인구가 밀접한 지역으로 향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예를 들자면... 도박장이나 시장, 광장이 있겠군요.”
“으흠... 도박장, 시장, 광장이라...”
전 대륙에서도 유명한 상업 도시인 탓에, 외지인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이곳 하르만은 도박장 역시 성행하고 있었다.
24시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박장.
“먼저 여관을 하나 잡아서 짐부터 풀고, 도박장에 가 보자.”
차라리 도박장에서 갈란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맞으며, 우리는 근처의 여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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