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48. 암흑가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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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텔 왕국 최대의 상업 도시, 하르만.
새내기 상인으로서 돈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하르만으로 가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상인들의 도시는 온갖 물건들과 화폐가 오고 가는 상업의 성지이다.
상인들은 언제나 손익을 따지는 저울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돈과 물건의 거래. 돈의 흐름. 물품의 유통 과정. 대륙 곳곳에서 흑자를 낼 만한 물건들. 무역과 관련된 최신 정보까지.
낮에는, 순백의 건물들과 상쾌한 바다 공기가 어우러지는 상인들의 도시. 없는 게 없는 무역의 중심지.
하지만 해가 저무는 순간, 묵직하고 달콤한 돈의 향기가 온 도시에 가라앉는다.
도박장은 밤의 성지다. 황금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은 상인들 뿐만이 아니었고, 일확천금을 노리고자 하르만의 도박장으로 모여드는 자들은, 이곳 하르만의 밤을 향락과 사치로 뒤덮어 버린 것의 일등공신이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백년초의 향에, 나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테이블을 헤치고 걸어 나갔다.
“이건 말도 안 돼! 지배인! 당장 지배인 불러와!”
“너 패 까 봐! 까 봐!”
대륙 최대 규모의 도박장이라는 말이 허언은 아닌지, 이 넓은 지하 도박장에서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머저리들이 넘쳐난다.
인생이 반쯤 망해버린 작자들의 추태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실비아, 저렇게 미련한 놈들과는 상종하면 안 돼. 물론 적당한 도박을 즐기는 것은 좋지만, 저렇게 분수에 맞지 않게 인생을 베팅하는 놈들이 문제인 거지.”
“화, 확실히... 으음... 이것이 인간들의 유흥거리인가...”
“또 이상한 소리 하네. 아무튼.”
이미 예전에 이 도시에 와 본 적이 있는 나는, 이 도박장을 운영하는 지배인과 나름 안면을 튼 사이였다.
하르만 도박장의 지배인, 베키.
몸에 쫙 달라붙는 수트 차림이 매력적인 그녀는, 이곳 하르만의 도박장을 비롯한 온갖 뒷거래를 꽉 잡고 있는, 하르만 뒷세계의 실세다.
본래는 곧바로 베키를 만나 경고를 해 줄 생각이었지만, 하필이면 베키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있다는 경비의 말에, 우리는 의자에 앉아 베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후우... 갈란이 이런 지하 도박장에 오긴 하려나?”
“으음...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꽤 몰려 있으니, 올 가능성은 충분해 보이는군.”
“루나가 그렇다면야...”
그렇게 한동안 카드와 돈이 오가는 도박 테이블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으나, 한참이 지나도 베키는 오지 않았다.
“...거 되게 안 오네.”
“오스틴. 저쪽에서 음식도 파는 것 같아요.”
“오. 진짜네요, 공녀님.”
규모가 큰 도박장이라서 그런지, 도박장 구석에 음식점까지 들어서 있었다.
마침 시간도 시간인지라 저녁을 해결하고 다시 입구에 있는 벤치로 돌아와 앉았으나, 여전히 베키는 오지 않았다.
“...이거 뭐, 우리가 도박장 경비도 아니고.”
이렇게 허수아비처럼 지키고 있는 사이 또 다른 곳이 공격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베키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게임에 끼지도 않고 멍하니 앉아있는 우리가 눈꼴 시려웠는지, 지나가는 종업원들마다 우리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눈치를 주었다.
“...한 판만 할까?”
“선배님 못 하시면서...”
“야. 아까 그건 로이먼이 사기 친 거잖아. 8번 연속으로 이기다니, 씨발 그게 말이 되냐?”
“형제님. 저는 사기를 친 적이 없습...”
“됐고, 시간도 조금 죽일 겸, 딱 한 판만 하자.”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서며,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혹시 알아? 여기서 일확천금을 하게 될 주인공이 우리가 될지.”
* * * * *
“마차가... 없다고요?”
“예, 용사님. 송구합니다만, 지난번 바위 메뚜기들의 습격으로 인해 도로가 많이 손상된 터라... 마차들도 많이 파손되었고, 그나마 남은 멀쩡한 마차들도 자재들을 옮기느라...”
수비대장의 말을 들은 용사, 이유정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지금 당장 떠나야 할 만큼 시간이 촉박하건만, 어떻게 가는 곳마다 장애물이 있단 말인가.
인상을 찌푸린 용사를 본 벨리온 수비대장이 안절부절못하자, 용사의 뒤에 서있던 성녀, 이사벨이 앞으로 나섰다.
“수비대장님. 저희는 어서 하르만으로 가야 해요. 어떻게 안 될까요?”
이사벨이 생긋 웃으며 말하자, 수비대장의 얼굴이 헤벌쭉 풀어지기 시작했다.
“무, 물론! 용사님과 일행분들의 마차는, 제가 어떻게든 따로 구해 보겠습니다! 다만, 시간을 조금 주시면...”
“하루.”
“...예?”
수비대장의 얼빠진 목소리에, 아드리엔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하루의 기한을 줄게. 우리도 오래는 못 기다려.”
“그, 그런... 하루는 너무...”
“그만. 이의는 받지 않아. 우리의 손에, 하르만 시민들의 목숨이 달려 있단 말이야. 알아 들었어?”
“...예.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좋아. 가 봐.”
새침데기 같은 얼굴을 한 채 수비대장을 아랫것들을 다루듯이 하는 아드리엔을 보며, 마야는 피곤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이 상태로 오스틴과 재회했다가는...
‘오스틴!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해? 멀뚱멀뚱 서있지만 말고 빨리 와서 무릎부터 꿇어!’
아드리엔의 재수 없는 행동과 말투가, 마야의 눈앞에 그대로 재현되는 것 같았다.
‘아, 안돼...’
그랬다간 완전 끝장이다. 지금보다 더 사이가 나빠질 것이 있겠냐마는, 그렇다고 저리 되도록 내버려 뒀다가는 오스틴과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이 날 것이다.
아드리엔이 본래 까칠한 성격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용사. 갈란이 최우선이야. 갈란을 먼저 해치워야 해.”
“...알고 있어, 마야. 걱정마.”
용사 역시 아드리엔의 모습을 보며, 불안하기만 한 미래를 상상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숨을 내뱉으며 등을 돌리는 그녀들의 뒤로, 조금 전 헐레벌떡 뛰어갔던 수비대장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와 그녀들을 붙잡았다.
“헉... 허억...! 용사님! 마차를 구했습니다!”
“어디, 어디인가요!”
“허억... 후우... 따라오십시오...”
절그럭 거리는 갑옷을 입고 잘도 뛰었다고 생각하며, 용사를 비롯한 파티원들은 수비대장의 뒤를 따랐다.
* * * * *
“이게 씨발 말이 돼!!! 여기 사장 나오라 그래!!!!!!”
“혀... 형제님! 진정! 진정하십시오!”
“아니, 이 새끼 분명히 장난질 쳤다고!!!!!!!!!”
아무래도, 나는 운이 지지리도 없는 모양이었다. 초장부터 이런 사기꾼 새끼를 만나다니.
아무리 가볍게 즐기기로 했다손 치더라도, 애미 씨발 10판을 내리 지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누가 봐도 이 신성한 카드 게임에 장난질을 한 것으로 보이기에 놈의 손을 집중해서 쳐다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소매에 카드 한 장을 빼돌리는 것을 목격하고 만 것이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저렇게 난동을 피워서야... 쯧... 이래서 근본 없는 천한 것들은...”
나는 눈앞에서 실실 웃는 배불뚝이 아재를 노려보며, 꼭지가 돌아 버리고 말았다.
“야 이 씨팔 배불뚝이 뚝배기 불고기 새끼야. 다시 말해봐. 뭐? 근본 없는 것들?”
“씨... 씨팔?! 이런 천박한...!”
“네가 뭐 귀족이라도 되냐? 어? 네가 손장난 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내가 말을 가려서 해 줘야 하냐?”
“소, 손장난이라니! 증거도 없이 우기지 마시오!”
“증거라... 그럼 소매 한 번 걷어봐. 넌 카드 나오는 순간 내 볼트로 콧구멍을 쑤셔 버릴 줄 알아라.”
“싫소! 감히 나를 이리 대하다니, 우리 가문의 명예를...”
“이 씨발 좆까는 소리 그만하고 순순히 불어!!!!!! 안 그러면 내 솥뚜껑 같은 손이 너를 어떻게 할지 몰라!!!!!!”
“겨, 경비병! 아무나 경비병을 불러 주시오! 끄아아악!!!”
내가 뚱땡이 귀족의 접힌 목살을 뜯을 듯이 쥐어 짜내자,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씨발, 얼마나 살이 뒤룩뒤룩 쪘으면 손으로 쥐어짰는데 기름이 줄줄 흘러나오는 걸까.
내가 억지로 놈의 소매를 걷어 올리자, 소매에 숨겨둔 카드가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어쭈구리...”
“자, 잠깐...! 모함이오! 나를 헐뜯으려는 수작질...”
“로이먼, 플레일.”
“여기 있습니다.”
로이먼의 묵직한 플레일 철퇴가 내 손에 절그럭— 흘러내리자, 놈의 안색이 대번에 시퍼렇게 변했다.
“아, 알겠소! 내가 미안하오! 돈은 돌려 드릴 테니, 제발 때리지는...”
아예 눈물 콧물까지 질질 짜내며 살찐 손을 싹싹 비비는 놈의 모습에, 나는 눈을 감고 그날의 추억을 떠올렸다.
벨리온의 여관에서 벌어진, 피와 땀이 튀는 참된 물리치료...
그때, 나는 깨달았던 것이다.
사람을 고치는 데는, 매가 약이라는 것을.
“아아, 모그단...”
그립읍니다...
내가 천천히 플레일을 들어 올리자,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내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던 루나와 알렉시스 공녀가 다급히 내 팔을 붙잡았다.
“자, 잠깐! 오스틴! 그만! 그만해라!”
“오스틴! 저도 말리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은 주위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휘유~! 그냥 내려 찍어버려요, 선배님!”
“이, 이게 인간들의 몸싸움...!”
로빈과 실비아는 여전히 눈을 빛내며 우리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지만,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화를 조금 가라앉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가 나서 내리치는 바람에 반으로 갈라진 테이블과, 여기저기 흩뿌려진 카드, 그리고 우리를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과 경비병, 그리고 익숙한 수트핏의...
“...베키?”
그녀의 차가운 눈과 마주치자마자, 나는 말없이 팔을 내려 플레일을 로이먼에게 되돌려 주었다.
“오스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줘야겠어.”
“...씨팔 여태 안 오다가 왜 하필 이럴 때...”
“그 천박한 말투는 아직도 고치지 못했나 보군.”
“너도 고상한 척하는 건 여전하네, 베키.”
“...따라와.”
나는 순순히 테이블 위에서 내려온 뒤, 쭈뼛거리는 일행을 데리고 베키의 뒤를 따랐다.
경비들에게 끌려가는 뚱땡이의 마지막을 보지 못해 아쉽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여성 2위에 빛나는 베키의 표정이, 누가 봐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참고로, 1위는 우리 엄마다.
“꿀꺽...”
“왜 그렇게 긴장했어? 오랜만에 재회했잖아. 오스틴은 별로 기쁘지 않은가 보네?”
“하하... 기쁘지. 기쁘지...”
오랜만에 만난 베키와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계획이 조금... 많이 꼬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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