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49. 별들의 전쟁
* * *
베키를 따라 그녀의 집무실로 들어온 나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베키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다른 일행들 역시 나를 따라왔으나, 베키는 나와의 독대를 원했다.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베키는, 한동안 차를 홀짝이며 침묵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용건부터 묻는 거야? 섭섭한데.”
“내가 지금... 오스틴, 너를... 뒷골목 개 먹이로 던지지 말아야 할 이유를 대 봐...”
나를 노려보는 베키의 눈에서 뚝뚝 묻어 나오는 살기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어 버렸다.
“아직도 그 일로 화가 나 있는 거야? 아니, 생각해보니까 어이가 없네. 따지고 보면 네 잘못 이었잖아. 그때 내게 암구호를 안 알려 줬던 건 베키, 너야.”
“그만...”
“네가 암구호만 알려 줬더라면, 나는 네게 수비대가 들이닥칠 거라는 사실을 제때 알려줄 수 있었을테고, 그랬다면 네가 수비대에 잡히는 일도 없었겠지. 나를 신뢰하지 못하고, 거짓 암구호를 말 해준건 너였다, 베키.”
“그 입...!”
내가 애써 능청스레 대답하자, 베키가 찻잔을 내게 집어던지며 벌떡 일어섰다.
쨍그랑!
내 안면에 적중하기 직전에 고개를 튼 덕분에, 내 얼굴을 노리고 날아온 찻잔은 그대로 내 얼굴을 지나쳤다.
주먹을 꽉 움켜쥐고 부들대던 베키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입, 닥쳐. 애초에 네가 의심 갈 짓을 했었잖아.”
“...네, 누나.”
“누나라고도 부르지 마. 토가 나올 지경이니까.”
“씁... 옛날에는 누나라고 부르라 했잖아. 이젠 안 돼?”
“너... 계속 그렇게 깐족거리면, 진짜 죽여버리는 수가 있어.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꺼져.”
더 이상 놀려대면 진짜로 죽여버릴 것 같았기에, 나는 서둘러 본론을 꺼내었다.
“누... 아니, 베키. 경고할 게 있어.”
“...경고?”
내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자, 베키 역시 내 얼굴에서 묻어 나오는 진지함에 긴장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 경고. 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실없는 소리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네 사업장의 명운이 달린...”
내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내 입에서 사업장 얘기가 나오자마자 베키가 내게 달려들었다.
내 목을 콕콕 찌르는 단검의 서늘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피하려면 피할 수야 있었지만, 나는 굳이 베키와 몸싸움을 벌이려고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네 사업장의 명운이 달린 일이야. 아니, 어쩌면 이 도시 전체 일지도 모르지.”
“너...”
소파에서 밀쳐져 완전히 바닥에 드러누운 상태가 된 나를 깔아뭉갠 베키는,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며 이를 갈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 군상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싸가지 없는 새끼, 거짓말하는 새끼, 하지 말라는 거 하는 새끼.”
“잘 알고 있네. 그래도 까먹지는 않았나 봐?”
“그럼. 옛날에 거짓말 한 번 쳤다가, 어떤 미친년한테 뼈가 부러지도록 쳐맞아서 말이야.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지.”
“하지만 만약, 지금부터 네 입에서 나오는 말에 한 톨이라도 거짓말이 섞여 있다면, 그때는...”
내 손목을 잡은 베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통에 이를 악 물고 참고 있는 내게, 베키가 살기 어린 말투로 속삭였다.
“팔다리의 힘줄을 전부 끊어서, 내 노예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거 무섭네.”
“무서워해야지. 만신창이가 되도록 써먹어 줄 거니까.”
내 귀에 후— 하고 불어오는 베키의 숨결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 무섭다. 눈에 핏줄을 세우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녀는, 실제로 그럴법한 여자니까.
그녀는 제 손으로 직접 일군 사업장을 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다. 나는 그런 그녀의 성질머리를 알기에, 일부러 사업장을 건드린 것이고.
“그래서, 어디 그 경고가 뭔지나 들어 볼까?”
“...좀 앉아서 듣지?”
“싫어. 지금 이 상태로 말해.”
이 미친 또라이 가학 성애자는, 사람을 깔아뭉갠 상태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갈란이라는 놈, 혹시 알고 있어?”
“...갈란?”
“너도 내가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일원이었다, 라... 파티를 나왔나?”
“그래. 너한테는 딱히 숨길 것도 없지.”
내가 손바닥을 보이며 거짓말이 아니라는 몸짓을 취하자,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보던 베키가 단검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계속해봐.”
“마왕의 수하 중에서, 갈란이라는 놈이 있다. 군단장을 맡고 있어.”
“마왕군 군단장 갈란이라면, 나도 몇몇 정보는 익히 들었다. 어지간히 미친놈이라고. 근데, 그놈이 왜?”
“그놈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거든.”
“...뭐?”
잠시 시간이 멈춘 듯,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굳어 버렸다.
나를 바라보는 베키의 눈이, 답지 않게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대로 설명해 봐.”
“얼마 전, 벨리온에서 있었던 바위 메뚜기 참사는 알고 있지?”
“그 문제 때문에, 오늘 나갔다 온 참이었어. 하필이면 마약 유통책이 덩달아 잡혀 버려서... 쯧.”
“그 일 역시, 갈란이 저지른 짓이다.”
내 말에서 거짓말을 찾을 수 없었는지, 베키는 잠시 동안 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이내 내 위에서 내려와 소파에 앉았다.
“앉아. 계속 얘기 해.”
“고마워. 여하튼, 벨리온에서 한탕 크게 저지른 갈란이,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어. 어쩌면, 이미 숨어들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상체를 살짝 숙여 찻잔 위에 둥둥 떠 있는 찻잎을 바라보며 말했다.
“놈의 목적은 하나야. 마물을 강력하게 개조해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곳에 던져놓는... 일종의 실험이라고 봐야겠지.”
“...무슨 실험?”
“살상력 실험. 나도 그 이유는 자세히 몰라. 애당초 제대로 미친놈이라, 그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거든. 아마 마왕의 사주를 받고 저지르는 게 아닐까 싶어. 어찌 됐건 놈은 마왕군 소속이고, 마왕이 놈의 실험을 돕고 있으니까 말이야. ”
“그럼, 갈란이 이곳으로 온다면...”
베키 역시 그 이후의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지는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래. 이 도시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은 역시, 네 도박장 만한 곳이 없지. 그래서, 경고를 해 주러 온거다.”
“...조금 당황스럽네. 갑자기 이래도...”
“내가 볼 때는 네가 가장 난처해, 베키. 네 입장에서는 수비대를 부를 수도 없겠지. 수비대장에게 빚을 지기도 싫을 테고, 애초에 네 사업장 중에는 뒤가 구리지 않은 곳이 없을 테니까.”
“분하지만, 맞는 말이야. 수비대의 도움을 받는 것은 어렵겠어.”
그 후, 잠시 침묵.
갈란에 대한 대비책을 모색하는 듯, 베키는 인상을 찌푸린 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물론 갈란이 이곳에 나타난다면 우리가 도와주러 오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달건이들을 불러서 막던, 수비대장에게 사탕 하나 쥐여주고 수비대의 도움을 받던, 아예 모험가들을 고용하던, 대비책을 하나 마련해 놓는 게 좋을 거야.”
“...그래. 고마워.”
대충 대답하고 다시 생각에 잠긴 베키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나는 다시금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맞다, 베키. 상인 조합장이랑 다리를 좀 놓아줬으면 하는데.”
“상인 조합장? 그 할망구는 왜?”
“시장에도 경고를 해야지. 그래도 그쪽은 수비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테니까.”
“...마음에 안 들어.”
그리 말하면서도, 베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 *
“메릴이 에일 가격을 올렸어. 동화 두 닢이나 올랐다고.”
“젠장... 그렇다고 이제 안 갈 수도 없고. 메릴의 에일이 워낙 시원해야지.”
“내 말이 그 말이야. 쳇... 전선의 병사들에게 맥주를 돌린다고 했던가.”
“뭐, 어쩔 수 없지. 맥주가 안 들어가면 싸울 힘도 없을 테니까. 킬킬킬...”
늦은 저녁, 배부르게 저녁 식사를 마친 수비대 병사인 마틴과 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잡담을 떨며 성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오늘은 별이 유난히 많네. 마치 보리밭의 이삭 같군.”
“네가 한 말치곤, 엄청 문학적인 말인데.”
“이 새끼가... 난 아카데미에서도 나름 문학도였다고.”
“알지. 나도 사실 영주님의 숨겨진 아들이야. 사생아 빌 보어만 이라고 불러라.”
“에이씨. 이 새끼는 친구 말을... 음?”
문득 마틴의 말이 뚝 끊기자, 빌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마틴의 모습에, 빌은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말을 이었다..
“야. 왜 그래?”
“...어, 아니... 저기 별똥별이 하나 떨어지고 있어서.”
“엉?”
마틴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과연. 유난히 강렬하게 반짝거리는 작은 별 하나가, 별똥별치곤 가까운 거리에서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 별똥별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나 어릴 때 한 번 보고 못 봤는데.”
“우리 딸내미가 생각나는구만. 저번에 별똥별 한 번 보고, 또 보고 싶다면서 아주 울고불고 난리도...”
그러나, 마틴의 말은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야, 야... 저거 이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데...?”
“저거 씨발 무슨... 야, 잠깐만! 어디 가!”
“야 이 멍청아! 너도 빨리 피해! 으, 으아아!”
콰아앙—!!!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 미상의 물체는, 저 멀리 착지하며 바닥을 긁고 그들의 앞까지 미끄러져 왔다.
질끈 감은 눈을 슬그머니 뜬 빌과 마틴은, 엄청난 열기와 흙먼지가 올라오는 구덩이에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검?”
밤하늘처럼 새까맣고 반투명한, 오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검이 땅에 박혀 있었다.
그와 동시에, 순간 검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강렬한 별빛이 마틴과 빌의 눈을 강타했다.
“크으윽...! 뭐야!”
강렬했던 빛이 순식간에 잦아들고, 이윽고 그들의 눈앞에는.
“뭐... 다, 당신 누구...”
“...여기에 있나.”
난데없이 나타난 칠흑 같은 갑주를 입은 기사의 모습에, 마틴과 빌은 서둘러 창을 들어 올려 기사를 향해 겨누었다.
“거기, 이름 모를 병사여. 소속이 어디지?”
“우, 우리는 하르만의 수비대요! 순순히 소, 손을 들고 정체를 밝히시오!”
“기사 나으리! 소, 소속을 밝혀 주십시오!”
겁에 질려 떨리는 둘의 목소리에, 기사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수비대장에게 전해주면 고맙겠군. 별의 기사가 찾아왔다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