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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51화 (51/106)

〈 51화 〉 50. 누구세요?

* * *

“다 왔군...”

갈란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눈앞의 거대한 도시를 눈에 담았다.

거대한 운하, 바다와 바다를 잇는 무역의 요충지, 상인들의 도시.

갈란 역시 하르만에 온 것은 처음이었으나, 아침햇살을 맞는 하르만의 아름다운 광경을 구태여 감상할 필요는 없었다.

조만간 불길에 휩싸일 도시일진대, 뭐하러 쓸데없는 감상에 빠져 있겠는가.

[ 그르르릉... ]

언덕 위에 올라서 하르만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던 갈란의 등 뒤로, 기괴한 마물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하구나. 흠잡을 데가 없군.”

거대하게 변한 덩치와, 두개골의 뼈가 변형되어 피부를 뚫고 돌출된 수십 개의 가시 뼈.

기괴하리만치 역변한 혼 래빗의 모습에, 갈란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의 바위 메뚜기보다는 전투력이 뛰어날 것이다. 이번에는 꽤나 공들여서 개조했으니.

삐죽삐죽 솟아난 가시 뼈로 뒤덮인 혼 래빗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갈란은 시선을 돌려 성문을 바라보았다.

움푹 파여있는 성문 앞 의문의 구덩이에서, 끝을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기에.

“...용사가, 벌써 저만큼이나 성장했나.”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흔적을 본 갈란은, 이미 용사가 하르만에 도착한 상태라고 유추했다.

오히려 좋다. 나약한 놈들을 찢어 버리는 것보다는, 강자와의 단판 승부가 더욱더 요긴한 자료가 될 터.

“피 냄새를 쫓아라. 태양을 떨어 뜨리는 거다.”

갈란의 손이 혼 래빗의 엉덩이를 톡톡 두들기자, 혼 래빗은 고개를 끄덕이며 땅을 박차고 언덕을 내려갔다.

이윽고 혼 래빗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갈란은 품 속에서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때가 되었나...”

내키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헌틀리와 함께 용사를 저지하라는 마왕의 명령을 무시할 순 없다.

수정구를 꺼내 들고 잠시 망설이던 갈란은, 곧이어 수정구에 피를 흘려 넣었다.

피가 스며든 갈란의 수정구가 점차 반짝이기 시작하고, 이윽고 익숙한 얼굴이 수정구에 떠올랐다.

“헌틀리, 마왕님께서 네놈과...”

[ 알고 있다, 갈란. 구태여 설명해 주지 않아도 돼. ]

“...그래. 때가 되면 게이트를 열 준비를 해 두겠다. 곧바로 넘어오도록.”

[ 용사는 찾았나? ]

“찾은 것 같으나, 확실치는 않다. 아마 용사겠지. 저만한 힘을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몇 안 되니까.”

[ 글쎄. 예전에 언뜻 봤을 때는,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는데. ]

“용사의 주변에 있는 년놈들이 골치가 아팠다. 나도 한 번 당했으니, 방심하지 말도록. 게다가...”

저 구덩이에서 느껴지는 힘. 시간이 지난 탓인지 지금은 조금 희미해졌지만, 공기의 흐름을 읽을 정도로 예민하게 개조된 갈란의 신체는, 저 구덩이에 미약하게 남아있는 힘 만으로도 털이 곤두서며 경고하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용사가 강해진 것 같군.”

[ 설마, 용사가 한계를 돌파했나? ]

“아마도. 아니... 그 이상이다. 한계를 돌파했다면, 내가 심어둔 불신의 씨앗이 소멸했겠군.”

[ 그래도, 가장 성가셨던 놈을 내쫓아 주었으니 제 역할은 하지 않았나. ]

헌틀리의 시큰둥한 말에, 갈란은 눈을 감고 한 남자를 떠올렸다.

밝은 갈색의 머리칼. 밝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용사 파티의 뒤에서 항상 파티원들을 서포트해주며, 전투 시 지휘를 담당했던 성가신 벌레 같은 남자.

놈이 파티에서 나가게 만든 것은 묘책이었다. 놈은 사실상 용사 파티에서 제 2의 구심점을 맡고 있었으니.

“성가신 놈을 덜어내긴 했지만,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된다.”

[ ...시체를 더 비축해 가겠다. 갈란, 용사와 단신으로 맞서는 어리석은 짓은 저지르지 않길 빌겠다. ]

“거사는 내일 저녁, 해 질 녘이다. 교란책은 이미 준비해 두었다.”

[ 게이트나 제때 열어 주면 좋겠군. 아가토가 미리 준비해 두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

“이미 확인했다. 내일 저녁에 보지.”

쉴 새 없이 반짝이던 수정구가 서서히 빛을 잃고, 이윽고 완전히 빛이 꺼졌다.

갈란은 수정구를 품속에 집어넣으며, 침을 퉤—! 뱉어냈다.

“더러운 놈...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그 이해할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이용하는 더러운 전투 방식을 조금이나마 손 봐준다면, 그래도 볼 만 해 질 텐데.

그나저나, 대체 용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지난번 마지막으로 마주쳤을 때는 동료들의 힘을 빌어 간신히 승리할 정도로 약했건만, 언제 저만큼이나 성장했던 걸까.

“...용사.”

갈란은 이를 아득—! 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역시, 용사라는 존재는 사라져야 한다. 놈은 불공평한 세상의 대표 격이다.

납득할 수 없는 강함. 한계를 모르고 성장하는 힘. 이 얼마나 불공평한가.

비록 헌틀리의 전투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놈도 꽤 강한 축에 속한다. 아무리 강해졌다 하더라도, 헌틀리와 힘을 합치면 용사를 죽이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동안 등에 멘 원형의 물체를 쓰다듬던 갈란은, 이내 로브를 뒤집어쓰고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일 밤, 용사를 죽일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 * * * *

베키와 만남을 가진 뒤 3일 정도가 지나고,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베키가 주선해 준 상인 조합장과 만날 수 있었다.

상인 조합과 시장 쪽은 수비대가 있기에, 별 다른 조언 없이 경고만 해 주고 나오면 되는지라 생각보다 빠르게 대화를 끝마칠 수 있었다.

원래 영주에게도 경고를 하려 했지만, 이곳 하르만의 영주인 보어만 공작이 수도에 볼일을 보러 가 있는 바람에, 영주 대리인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대가 알아서 잘 대처하길 빌어야지.

로이먼은 교회에 들르겠다고 말을 해서 따로 찢어졌고, 루나는 피곤하다며 먼저 여관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나와 알렉시스 공녀, 로빈, 실비아라는 기묘한 조합이 만들어졌다.

조금 늦은 점심시간이고 해서, 곧바로 여관으로 들어가기도 뭐 한 상황이라 시장이라도 조금 구경하러 나왔더니...

“로빈이랑 실비아는 여기 살아! 엄마는 갈 거야!”

이 모양 이 꼴이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로빈과 실비아가 내 바짓단을 붙잡고 질질 끌려오기 시작했다.

“선배니임! 저거 하나만 사 주세요오—!”

“오스틴... 나도 저거 먹고 싶어...!”

“아니, 우린 놀러 온 게 아니라니깐! 실비아 너까지 왜 이래!”

“그치만...”

시장 한복판에서 떽떽 거리는 로빈과, 내 바짓단을 붙잡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실비아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았지만, 뻔뻔함이 패시브로 장착되어 있는 나의 철면피에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오, 오스틴... 그냥 하나 사 주고 말죠...”

하지만, 알렉시스 공녀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이렇게 얼굴을 새빨갛게 달궈놓고,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니.

“후우... 이번만입니다...”

결국 내가 굽히고 들어가야지, 어쩌겠어.

나는 싱글벙글 내 뒤를 따라오는 로빈과 실비아를 보고 한숨을 내뱉으며, 맛있는 냄새를 솔솔 풍기는 가판대를 향해 걸어갔다.

“아저씨. 매콤 로크 야채 볶음 세 개 주세요.”

“동화 90닢만 주쇼.”

“후우... 여기요.”

나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내 가죽지갑에서 은화 한 장을 건네주고 거스름 돈을 지갑에 넣었다.

점점 홀쭉해지는 내 지갑을 보니, 정말이지 마음이 찢어지는 기분이야. 이게 인생인가?

벨리온에서 보르댕 후작에게 받은 돈이 있기야 하지만, 그건 소중한 여행 자금 이자 우리 파티의 공동 자금이다. 여행용 식량이나 통행료를 내는 데는 저 금화들을 사용하지만, 이렇게 군것질을 하거나 어제 도박장에서 놀았던 돈은 전부 내 사비를 쓰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새빨간 기름이 좔좔 흐르는 로크 고기와 야채를 맛있게 볶은 요리가 나왔다.

알렉시스 공녀와 로빈, 실비아에게 건네준 뒤, 우리는 광장에 있는 벤치에 앉아 피 같은 돈과 바꾼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냐?”

나는 나무 꼬치로 고기와 야채를 찍어 먹는 셋을 보며 물었다.

그래. 내 돈이 어떻든, 그녀들이 맛있게 먹으면 그만...

“우물우물... 맛이 조금 미묘한데요... 괜히 샀네요. 네.”

“으음, 나도 조금...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

“......”

이... 이 씨발련들이...

내가 벤치의 모서리를 꽉 움켜쥐자, 뿌드득—!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나무로 된 벤치가 결을 따라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알렉시스 공녀가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말했다.

“오, 오스틴! 저는 맛있으니까요! 네!”

“...하아.”

“저... 하나 드실래요?”

“ㅇ, 예?”

“아, 아—앙...”

내게 고기를 내밀어 주는 알렉시스 공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알렉시스 공녀의 꼬치를 덥석 물었다.

우물우물...

“...맛있네요.”

“헤헤...”

싱글벙글 웃는 알렉시스 공녀에겐 미안하지만, 솔직히 내 입맛에도 맞지 않았다. 착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한동안 벤치에 앉아 멍하니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까부터 공통적으로 들려오는 소문이 자꾸만 귀에 들어왔다.

“그거 들었나? 그저께, 성문 앞에 유성이 떨어졌다는군!”

“그날 밤에 큰 소리가 나더니, 그런 일이 있었나?”

“어젯밤에는 거대한 혼 래빗이 나타났다던데... 수비대가 아주 속수무책으로 당했대!”

“허어... 그런...”

나는 어젯밤에 침대에 눕자마자 곧바로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저런 귀중한 구경거리들을 놓치고 만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에 거슬리는 말이 하나 있었다.

“별의 기사님께서 찾아오셨다면서? 이틀 전에 떨어진 유성도 별의 기사님과 관련이 있다는데?”

“동화 속에나 나오는 그 별의 기사 말인가? 아니, 그 양반이 갑자기 왜 찾아오나? 자기 가문이랑 마누라 챙긴다고, 마왕과 관련된 일은 손 놓고 있더니.”

“낸들 아나? 여하튼,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 않겠나? 적어도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별의 기사. 오래전, 내가 레인저에 입단하기 전에 나를 가르쳤던 스승님.

솔직히 그때는 뭣도 모르고 가르침을 달라고 덤벼 들었지, 별의 기사라는 사실은 나중에 레인저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다. 별을 쫓아 여행했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누가 믿겠냐고.

그런데 정말, 그 아재가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설마.”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행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은 믿을게 못된다. 하물며, 그게 별의 기사 그 양반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대륙이 위험할 때는 손 놓고 있던 양반이, 굳이 지금 나타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만약... 진짜라면?

“오스틴. 별의 기사가 누구인가요?”

“...예?”

“별의 기사가 누구시길래, 지나가는 행인분들이 저렇게...”

어째서인지 별의 기사라는 말이 나오자 실비아가 몸을 크게 움찔거리긴 했지만, 나는 구태여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 별의 기사가 누구냐면...”

“나를 찾았나?”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샌가 내 옆에 앉은, 절그럭 거리는 검은 갑주를 입은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이구나, 오스틴.”

“...뭐야, 씨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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