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52화 (52/106)

〈 52화 〉 51. 불길한 징조

* * *

옛날 옛날, 아직 마왕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의, 아주 먼 옛날.

서대륙이 온전히 필멸자들의 영토였던 시절,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마법과 신성력의 발현으로, 인간들은 그들만의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칼라이아 왕국이라 명명된 인간들의 왕국은, 용의 피를 이은 지혜로운 왕과 고귀한 왕실의 혈통을 지켜주는 세 곳의 가문들을 지지대 삼아 크게 번성하였답니다.

세 가문은 서로의 힘을 합쳐 왕국을 위협하는 마물들을 몰아내었고, 마침내 인간들을 위한 삶의 터전을 갈고 닦는데 성공 하였습니다.

태양의 가문, 테라이저 가는 불타오르는 태양의 힘을 이용하여 왕국에 대적하는 적들을 불살랐으며, 백성들에게 따스한 햇빛을 내려주어 의지를 주었습니다.

달의 가문, 루나이트 가는 은은하고 고요한 달빛의 힘으로,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을 달의 여신의 품으로 조용히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별의 가문, 스타차일드 가.

그들은 인간들을 위해, 더 나아가 이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태양의 가문은 굳건한 태양의 방패가 되어 왕국을 수호했고, 달의 가문은 왕실의 그림자에서 암약하며 왕가를 위협하는 정적들로부터 왕가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태양과 달은 왕국을 수호하는 역할로서 오로지 하나만 존재할 수 있었지만, 별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구태여 왕가를 수호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을, 드워프와 엘프, 수인을 포함한 인류 전체를, 세계를 유지하는 균형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계가 파멸의 불길에 사그라들지 않도록, 알게 모르게 힘을 다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시간은 흐르고 흘러, 왕가의 힘은 점차 사라져만 갔습니다.

총명하던 왕의 자손들은 평범한 인간의 피와 섞이고 섞여, 고귀한 용의 피가 그 빛을 잃고 탁해졌으며, 왕국의 힘은 나날이 약해져만 갔습니다.

세 가문은 생각했습니다. 탁해진 용의 피를, 갈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깨끗한 용의 피를 찾아 헤매었고, 마침내 왕국의 뒤를 이을 적법한 혈통을 찾아내었습니다.

마이어스라는 성을 가진, 용의 피를 머금은 사내는 세 가문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칼라이아 왕실의 동의 아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평화로운 왕가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마이어스 1세는 현명하였습니다. 칼라이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국호를 메텔 왕국으로 바꾸었으며, 주변국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정당한 절차를 통해 칼라이아 왕국의 뒤를 이었음을 알려 정통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마이어스 1세의 치세 아래, 인간들은 앞으로도 평화로운 황금기를 보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허나 불행은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와 왕국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세 가문들의 힘이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태양 빛은 힘을 잃고 미약해져만 갔고, 달빛은 더 이상 어두운 밤을 밝혀줄 정도로 선명하지 못했습니다.

그 가운데, 별의 가문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별들이 하나둘씩 빠르게 꺼지기 시작했고, 결국 스타차일드 가문의 혈통은 한 명 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원인을 알아내고자 왕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힘을 잃어가는 그들에게서 벗어날 기회라고 여긴 늙은 마이어스 1세는, 애석하게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가문을 지탱하던 이들까지 하나 둘 가문을 떠나고, 결국 스타차일드 가문의 성에는 두 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스타차일드 가문의 유일한 혈통인 이젤 스타차일드와, 그녀를 따르며 보필하는 한 명의 기사.

이젤 스타차일드는 가문이 점차 몰락하는 사실이 슬펐습니다. 또, 그녀의 별마저 언제 꺼질지 두려웠습니다.

그녀의 별은 나날이 빛을 잃고 희미해져 갔습니다.

그녀를 연모하던 기사는 슬픔에 빠져,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살릴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엘프들의 산맥에 무작정 발을 들이기도 했고, 드워프들의 지하 도시에 몰래 침투해 도서관에 잠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해결책도 찾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기사는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의 주군이자 사랑하는 여인의 곁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젠 정말 방법이 없다고,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비탄의 늪에 빠진 기사는 어느 날, 초췌해진 주군으로부터 한 가지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의 종 랜버트여. 그대에게 명한다.

­청의 기사 랜버트. 하명하십시오.

이젤이 하늘에 떠 있는, 마지막 남은 별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저 빛나는 별을... 내게 가져와 줄 수 있겠는가.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무렴.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받들겠습니다.

그녀가 원한다면, 기사는 불구덩이에도 들어갈 것입니다.

이 세상이 지옥의 업화에 휩싸인다고 해도, 그녀가 그것을 바란다면.

기사는 기꺼이, 이 세상과 함께 불타오를 것입니다.

­랜버트, 나의 충실한 종. 내 사랑.

기사는, 그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습니다.

­저 빛나는 별을, 내 손으로 가져오도록. 지금 이 순간부터, 그것이 그대의 새로운 사명일지니.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불가능한 일인지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그녀가 기사에게 명하였고, 그녀에게 심장을 바친 기사는, 그저 따르면 될 뿐이었습니다.

­심장이 멈추는 그날까지.

기사는 고개를 들어 올렸습니다.

당신은 제게 별을 따오라 명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제 사명이라면.

­그대가 필요로 한다면, 가져와 드리리다.

온 세상을 뒤져서라도.

아직 별을 품지 못한 기사는, 그렇게 별을 쫓아 온 세상을 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 * * * *

“이야기는 여기서 끝! 이후에 이어지는 별의 기사의 여정은, 나도 잘 몰라.”

내가 손뼉을 짝—! 마주치며 이야기를 끝내고 보니, 로빈과 실비아, 알렉시스 공녀뿐만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내 이야기를 듣던 행인들마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훌쩍... 정말 가, 감동적인 이야기예요... 훌쩍!...”

“크흥...! 그, 그런 사정이 있었나...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잖아... 히끅!...”

“서... 서배임... 저...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오... 흑... 언제 들어도 눈물 나오는 이야기예요... 끅!...”

너나 할 것 없이 울음바다를 터뜨린 모습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곤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들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옳지. 흥! 하세요. 시원하게. 흐응!”

“크흐응!!!”

“옳지, 옳지. 오구 잘했어요. 이제 뚝!”

내가 등을 토닥여 주자, 내 품에 파고들며 훌쩍이는 알렉시스 공녀의 모습에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완전 덩치만 큰 애구만. 애.

한참동안 코를 풀던 알렉시스 공녀는, 새빨갛게 부어오른 코를 훌쩍이며 나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훌쩍... 그, 그래서... 그 스타차일드 영애님은 어떻게 되셨나요...?”

“...어떻게 되셨냐는 데요, 아저씨?”

“으음... 그, 그게...”

별의 기사가 곤란한 듯 침음을 흘리자, 로빈과 실비아 역시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킁!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눈앞에 계셨죠!”

“저 이야기, 사실이야? 다른 가문들은 어떻게 됐어? 아니, 그보다 이젤 아가씨는?!”

방금까지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질질 짜던 실비아와 로빈은, 언제 울었냐는 듯이 눈을 빛내며 내 옆의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곤란한 듯 손을 뻗으며 그녀들과 거리를 두는 아저씨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뒷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들어. 것보다... 아저씨.”

“음, 오스틴.”

“오랜만입니다. 저를 찾아오신 거죠?”

“그래. 오랜만에, 제자 얼굴도 보고 싶고 해서 말이다. 겸사겸사 전해줄 말도 있으니.”

1년밖에 못 배웠지만, 그런 놈이라도 제자랍시고 저렇게 반갑게 대해주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전할 말이라니?

“그래서, 전해줄 말이 뭔데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허리춤에 매달린 검의 폼멜을 쓰다듬던 그가 진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도 용사 파티의 일원이니,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

“아니, 저 이제 용사 파티...”

“칼라스가 소멸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소멸시켰다.”

칼라스.

마왕군의 차원문들을 담당하는 아가토의 스승, 제2 군단장 차원을 찢는 칼라스.

그놈이, 죽었다고?

“...여태 송곳 산맥에 살면서 방관만 하던 양반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군단장씩이나 되는 놈을 죽였답니까?”

“놈은 인과율을 어긋나게 만들었다.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 손으로 직접 처단했다.”

“균형은, 염병...”

확실히, 최근 마왕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기는 했다.

다른 차원의 괴물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으니, 아마 무슨 짓을 저지르긴 했나 보다.

“그래서, 나름 내 제자였던 놈이 용사 파티에 속해 있으니, 이런 정보는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해서 말이다.”

“아니, 그...”

“음?”

이걸 뭐라 말해야 돼.

“저 이제 용사 파티원 아니걸랑요.”

“...뭐?”

이 양반이 얼빠진 소리를 내는 건 또 처음 보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며 물어오는 아저씨에게,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설명해 주었다.

내 이야기를 듣는 아저씨는 점점 고개를 떨구더니, 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이미 땅바닥을 쳐다보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내 불찰이구나. 그레이시를 너무 오냐오냐 키우는 게 아니었는데.”

“어... 그, 아저씨는 아무 잘못 없으니까, 고개 드세요. 그것보다...”

갈란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긴 했지만, 솔직히 이 아저씨가 우리를 도와줄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갈란 이라고 해도, 혼자 단신으로 별의 기사와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다.

이 무식하게 쌘 아저씨가 우리를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 양반은 이런 일에 절대 끼어들지 않으니.

“그래, 음... 갈란이라고 했던가?”

“네. 헌틀리가 죽은 군단장들을 부활시켜 버려서, 곤란하게 됐죠.”

“영혼을 끝까지 도려내지 않은 모양이군. 용사는 아직 그 정도까지 힘을 키우지 못했나?”

“영혼을... 뭐요?”

아저씨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골이 띵해지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용사 그 버러지 년이 마무리를 똑바로 안 해서,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거네요?”

“으음... 그런 말은 아니지만...”

“후...”

용사 이 씹년. 어떻게 하는 일마다 제대로 마무리하는 꼴을 못 보겠다.

“아무튼, 아저씨. 한가하시면 저희 좀 도와 주시죠.”

“도와 달라 함은...”

“아시잖아요? 갈란이 이곳에 올 겁니다. 솔직히 놈이 이곳에 올 거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는데, 여기가 아니면 마땅히 올 곳이 없걸랑요.”

“...주군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아. 이 답답한 아저씨야. 제발 좀.”

이 양반은 힘만 무식하게 세지, 정작 뭘 하려고 하면 주군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두루뭉실하게 대답하니 속이 미어터질 것 같았다.

“그냥 그놈 모가지만 싹둑 베어 주시면 된다니까요? 아니, 제가 뭐 어려운 거 부탁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으음... 하지만...”

“아저씨 주군이라는 분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제자 부탁 한 번 들어줬다고 뭐라 하겠어요?”

“...안 돼. 주군께서는 왕국에 힘을 보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번에 칼라스를 소멸시키는 것도 탐탁지 않아하셨다.”

“아효. 정 안 되면 말고요. 그냥 저희끼리 알아서 해결할게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해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이 새빨갛게 부어오른 로빈과 실비아, 알렉시스 공녀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로이먼은 예배를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가 있겠다고 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루나와 함께 여관에 있을 것이다.

“선배님. 오늘 저녁은 어디서 먹나요?”

“오늘 저녁은 여관에서 대충 때우자. 저번에 도박장에서 개지랄 떠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한 지출이 생겨서...”

“힝...”

오늘 저녁은 굳이 음식점을 찾아 나설 필요 없이, 대충 때우고 자야겠다.

“...근데, 왜 따라오시는데요?”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따라오는 별의 기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음? 따라가면 안 되나?”

“아니, 그냥 서로 안부만 물어보고 갈 길 가는 거 아니었어요? 그레이시는 아마 용사와 함께 퀼른 근처에 있을 테니까, 그리로 가시면...”

“음? 무슨 소리지?”

내 말을 듣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용사가 이리로 향하는 것을 봤기에, 이곳으로 온 건데 말이다.”

“...뭐요?”

용사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아니, 대체 왜?

“그게 무슨 개 좆같은 소리...”

내가 별의 기사에게 따지려 드는 순간, 어디선가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 콰아앙!!!

“어제 그 괴물이 또 나타났다!”

“저, 저게 뭐야!”

“수비대! 수비대를 불러!!!”

...이거 어디서 본 장면 같은데.

수년간의 전투로 단련된 내 몸이, 또 좆같은 일에 휘말렸다고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지하 수로의 맨홀을 뚫고 올라온, 머리가 온통 가시 뼈로 뒤덮인 정체불명의 괴물이, 붉은 눈을 기이하게 빛내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애미, 씨발.”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 * * *

“거의 다 왔군.”

고삐를 잡은 그레이시는, 저 앞에 보이는 거대한 도시를 눈에 담았다.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과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는 상업 도시, 하르만.

“뭐야, 도착했어?”

“거의 다 왔다. 용사.”

“수고했어, 그레이시.”

곧 오스틴을 다시 볼 수 있다...!

용사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애써 진정시키며, 노을에 젖어드는 아름다운 하르만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곳에서 오스틴과 만날 것을 생각하니, 용사의 눈에는 콩깍지가 씌워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처럼 보였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과, 물감을 풀어놓은 듯 부드럽게 물들어 가는 하늘, 여기저기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였던 도시는,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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