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52. 산 자에게 죽음을
* * *
힘없이 부서지는 가판대. 불타오르는 목조 건물들. 사방에서 매캐한 연기가 진동을 한다.
“이게 씨발 무슨...”
나는 눈앞에서 나를 노려보는 정체불명의 마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왼손에는 언제나 믿음직한 친구인 쇠뇌를, 오른손에는 모그단이 내게 맡긴 검을 그러 쥐었다.
“...갈란.”
놈이 저지른 짓이 분명하다. 아마 지금쯤, 어딘가 안전한 곳에서 이 참혹한 상황을 구경하고 있겠지.
이런 씹련. 머리채를 잡아끌고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 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로빈.”
“네, 선배님.”
“너는 여관으로 가서, 로이먼과 루나를 이쪽으로 보내 줘. 실비아는 어디 대피소에 맡겨 주고.”
그리 말하는 와중에도 마물이 움직일 때마다 반격하기 좋은 위치로 자리를 옮기며, 실비아를 뒤로 물러서게 했다.
내 손짓에 한 걸음 물러선 실비아는, 눈앞의 마물을 바라보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스틴. 역시 나도 함께...”
“안 돼. 실비아, 너는 일반인이잖아. 이런 일에 휘말리지 말고, 얌전히 대피소에 피신 해 있는 게 좋아.”
“......”
“네가 어떻게 싸운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중간한 실력으로는 저놈을 상대하지 못해. 그러니까 어서 대피해.”
내 말을 들은 실비아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갈팡질팡 하다가, 곧 얼굴을 굳히며 로빈의 손을 잡고 맞잡았다.
“...조심해.”
“걱정 마라.”
비록 만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새 정이 든 걸까. 실비아는 드물게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걱정해주고 떠나갔다.
실비아와 로빈을 곁눈질로 배웅해주고, 다시 눈을 돌렸다.
입에서 취익— 소리와 함께 입김을 내뿜는 놈과 눈을 마주했다.
마물과 나 이외의 것들이 점점 느려지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신경을 더 날카롭게 벼려낸다.
체감상으로는 몇 분은 지난 것 같은, 불과 10초도 안 되는 대치 상황 끝에, 놈은 인내심을 잃고 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 들었...
“무... 뭐...!”
아니, 뭐 저리 빨라?!
나는 순식간에 코 앞까지 다가온 마물의 뿔을 가까스로 피하며, 몸을 힘껏 던져 바닥을 굴렀다.
꿀꺽—
갈란이 칼을 제대로 갈고 온 모양이었다. 이거, 까딱하면 죽는다.
마물이라고 얕잡아 봐서는 안 된다. 놈은 갈란이 개조에 개조를 거듭한 괴물. 최대한 빠르게 놈의 패턴과 약점을 파악하고, 속전속결로 숨통을 끊어야 한다.
그리고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건 내 전문 분야라는 거지.
다시금 나를 향해 달려드는 마물의 움직임을 눈으로 읽고,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뺨을 스치며 뿔을 피해냈다.
하지만,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몸을 돌리며 피하는 동시에, 놈의 목을 향해 왼손에 장전된 쇠뇌를 겨누고 쏘았다.
너무 빠른 속도 때문에 급소에 맞지는 않았으나, 단단한 볼트는 놈의 안면을 덮은 뼈를 긁으며 어깨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 크르륵...!!!!!! ]
“이런 얼빵한 새끼. 내가 우습냐?”
애써 웃는 낯을 하며 뺨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긴 했지만, 솔직히 얼마나 빨리 쓰러트릴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하겠다.
내가 다시금 회피하는 자세를 취하자, 별의 기사가 다가와 검을 빼어 들고 내 옆에 섰다.
“제자가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데, 스승이라는 인간이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아저씨. 머리에 난 뿔이 불균형해요. 오른쪽이 조금 더 두껍게 자라 있으니까, 오른쪽은 시야가 조금 더 좁을 거예요. 오른쪽에서 빈틈을 노려주세요.”
“그러마.”
나와 별의 기사 간의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계속해서 우리를 노려보던 정체불명의 마물이 눈을 붉게 빛내며 달려들었다.
“제... 제가 막아 볼게요!”
카가가가각—!
성난 황소처럼 달려드는 마물의 뿔과, 알렉시스 공녀의 손에 들린 방패가 맞부딪치며 불똥을 튀겼다.
“으극...! 무슨 힘이...!”
“잠시 붙들고 있어라!”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간 별의 기사가 마물의 오른쪽으로 돌아 번개같이 검을 휘둘렀으나, 놈은 역시나 빠른 속도로 몸을 비틀며 아저씨의 검을 피해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마물의 회피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검은 놈의 안면과 뿔을 조금 베어내며 커다란 자상을 남겨 주었다.
[ ...!!!!!! ]
피가 줄줄 흐르는 자상에 놀란 모양인지, 마물은 재빨리 우리와 거리를 벌리고 상처를 가렸다.
그리고, 다시 대치상황.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낸 별의 기사가 다시금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쯧... 겉만 긁었군. 조심해라, 오스틴. 놈은 생각보다 빠르다.”
“...뒷다리를 노려야겠어요. 저희랑 합 좀 맞춰주세요.”
“준비되면 신호해라.”
알렉시스 공녀를 정면에 세우고, 별의 기사가 놈의 다리를 공격하면 내가 숨통을 끊는다.
좋아. 단순하고 효율적인 전술이다. 마음에 들어.
나는 빈틈을 노리기 위해, 거친 숨을 내뱉으며 흥분한 마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비어있는 쇠뇌에 갈고리 볼트를 장전하고, 마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노려 본다.
우리를 노려보던 마물은 다시금 달려드는 자세를 취하다가,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돌아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앞으로 스무 걸음... 열 다섯 걸음... 열 걸음... 그리고...
“...지금!”
“흐읍...!”
까앙!
순식간에 달려든 놈의 뿔을 알렉시스 공녀의 방패가 맞받아치고, 그 바람에 마물의 머리가 왼쪽으로 비틀린 탓에 찰나의 순간, 오른쪽이 비었다.
별빛으로 달궈진 별의 기사의 검이, 놈의 오른쪽 앞다리와 뒷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퉁!
오른쪽 다리의 힘줄이 끊어진 마물의 몸체가 조금 기울어짐과 동시에, 내 쇠뇌에서 쏘아져 나간 갈고리 볼트가 마물의 왼다리에 보기 좋게 걸렸다.
그대로 확 잡아당기자, 마물의 커다란 몸이 균형을 잃고 기우뚱 넘어졌다.
“죽어 이 씹새야!!!”
나는 재빨리 갈고리 볼트의 밧줄을 끊어내고, 검을 꽉 움켜쥔 채 놈에게 달려가 뼈로 뒤덮이지 않은 물렁한 목을 쑤셨다.
옥빛으로 빛나는 검날에 찢겨 나간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던 마물은, 이윽고 다리를 축 늘어뜨리며 힘이 다했다.
“후우... 자, 잡았다...”
오랜만에 격한 전투를 치르고 나니, 몸이 단번에 무거워졌다. 역시 근육은 쉬지 않고 단련해야지, 오늘처럼 갑작스럽게 힘을 쓰면 근육통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오스틴... 저 팔이 저려서...”
“아, 공녀님. 진짜 수고하셨습니다. 좀 쉬고 계세요.”
저렇게 강한 놈의 박치기를 정면에서 받아 냈는데, 팔이 저린 정도로 끝난 게 오히려 대단하다.
나는 팔을 조물거리는 알렉시스 공녀를 뒤로 하고, 쓰러진 마물의 시체로 다가가 갈란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머리를 뒤덮은 금 간 뼈를 깨부수고 나니, 이마에 새겨져 있는 수레바퀴 모양의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이게 그놈의 흔적인가?”
“갈란이 개조시킨 마물이에요. 여기... 갈란의 표식이 새겨져 있죠.”
“흥미롭군.”
대체 어디가 흥미롭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 저 멀리서 로빈과 루나, 그리고 로이먼이 각자의 무장을 갖춘 채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 이쪽이야!”
“허억... 형제님...! 벌써 잡으셨군요...”
“오는 길에 별일 없었어?”
“저희도 오는 길에 이렇게 생긴 마물을 상대하느라, 조금 늦었어요. 어후... 되게 빠르더라구요.”
로빈과 로이먼, 루나 역시 여관에서 이쪽으로 오는 길에 마물과 마주친 모양이었으나, 싸우는 도중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마물이 깔린 덕분에 빠르게 죽일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오스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아직 도시에 퍼져있는 마물들이 정리되지 않았다.”
“이대로 갈란을 내버려 두면, 다음 기회는 영영 없을지도 몰라. 우선 갈란을 찾으면서 도시에 퍼져있는 마물들은 눈에 띄는 선에서만 정리하고, 나머지는 수비대에게 맡기는 수밖에...”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일행들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는 곧바로 갈란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스읍... 하아... 이쪽입니다.”
“...로이먼. 진짜 이쪽에 있는 거 맞지?”
“더러운 피의 냄새가 진하게 나고 있습니다. 제 코는 틀리지 않습니다.”
로이먼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렇게 로이먼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저 멀리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모두 정지.”
선두에 서 있던 로이먼이 무기를 빼어 들고, 우리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저 앞의 검은 인영을 노려 보았다.
로이먼보다 큰 장신의 몸과, 조금 마른 체형, 천으로 꽁꽁 싸인 채 등에 메여 있는 원판.
“...갈란.”
우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던 갈란은, 어느 순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피처럼 새빨간 갈란의 눈이, 우리를 핥고 지나가며 기분 나쁜 느낌을 주었다.
“역시, 용사가 아니었군.”
...용사라고?
“방대한 힘이 느껴지기에, 용사인 줄 알았건만... 별의 기사, 네놈이었나.”
힘 빠지는 갈란의 목소리에, 별의 기사가 한걸음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설마 용사를 건드리려 했나.”
“네놈들은 내 앞길에 방해가 되겠군. 특히나... 별의 기사, 너는 더더욱.”
갈란의 창백한 손가락이 천천히 들어 올려져, 별의 기사를 가리켰다.
“더군다나... 별의 기사, 이곳은 네놈이 나설 자리가 아닐 텐데?”
“...네놈에게 알려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자리에서 처단해주지.”
“확실히, 여기서 네놈들을 전부 상대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겠지.”
그리 말한 갈란은, 우리가 천천히 놈을 포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헌틀리. 끌고 가라.”
“뭐...”
그 순간, 갑작스레 땅을 뚫고 튀어나온 시체가 순식간에 별의 기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크윽...?! 무슨...!”
당황한 별의 기사가 다리에 달라붙는 썩어 문드러진 팔들을 베어 내었으나, 잘려나가는 팔 보다 땅속에서 튀어나오는 시체들이 더욱더 빨리 불어나기 시작했다.
“아저씨!!!”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내가 검을 뽑아 들고 별의 기사를 돕기도 전에, 시체 더미들은 별의 기사를 붙잡아 끌고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가 손수 개조한 구울들이지. 마음에 드나? 별의 기사는 그런 구울들을 수 천, 수 만 마리는 상대해야 할 거다.”
“...헌틀리도 여기에 와 있었냐?”
“유감이지만, 네놈들에게 대답해 줄 이유는 없군.”
“글쎄. 두들겨 맞고도 입이 안 열릴지, 두고 보자고.”
우리는 전투태세를 갖춘 채,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갈란을 노려 보았다.
잠시 우리를 향해 걸어오던 갈란은 별안간 우뚝 멈춰 서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눈을 빛내었다.
놈의 피부에 떠오른 붉은 핏줄이, 점점 더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 신선한 피 냄새... 너...! 마나 코어가 없군! 크하하하!!! 좋은 재료가 되겠어!!!”
“좆까 이 새끼야!!!”
내가 쇠뇌를 발사함과 동시에, 무기를 겨누고 있던 로빈과 루나, 로이먼이 한꺼번에 갈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내 연구 소재로 써 주마!”
피 냄새가, 더 짙어지기 시작했다.
* * * * *
“크으윽...! 이 역겨운 놈이...!”
정신없이 땅을 가르며 끌려가던 별의 기사는, 이윽고 커다란 굉음과 함께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튕겨져 나가는 그 순간에도 검을 휘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던 덕분에, 별의 힘을 머금은 검기가 수십 마리의 구울을 가르고 나아갔다.
가까스로 땅에 착지한 별의 기사는, 뭉개 뭉개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걷어내며 주변을 살폈다.
“콜록콜록! 가, 갑자기 뭐야!”
“마야! 광원 마법!”
“콜록...! 아, 알겠어...!”
언뜻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들.
어느 정도 흙먼지가 걷힌 곳에는, 마차 옆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용사 파티가 서 있었다.
“...용사?”
용사 파티와 별의 기사의 눈이, 그레이시와 별의 기사의 눈이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 아빠?”
“...그레이시.”
“자, 잠깐! 그레이시! 아빠라니?!”
그레이시의 발언에 용사와 나머지 일행들이 당황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이윽고 커다란 굉음과 함께 한 남자가 흙더미를 파헤치고 바깥으로 나오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손잡이에 랜턴이 대롱대롱 매달린 삽과, 여기저기 흙먼지가 묻은 장신의 코트, 하관을 가리는 기묘한 입마개.
전장의 장의사, 시체 수집가, 헌틀리.
갈란의 도움으로 엄청난 전력을 얻은 헌틀리는,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해진 하수인들의 힘에 흡족해하며 삽을 들어 올렸다.
“...갈란은 네놈만을 상대하라고 했지만, 기왕 상대하는 김에 용사까지 처리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레이시. 나중에 따로 이야기 하마.”
“...네, 아ㅃ... 아버지.”
전투태세를 갖춘 용사 파티와 별의 기사들을 바라보며 전력을 가늠하던 헌틀리는, 기고만장한 기세로 삽 머리를 들어 올려 땅을 내리쳤다.
“일어나라!!!”
콰앙!!!
순식간에 땅을 뚫고 튀어나온 수백 마리의 좀비와 구울 떼가, 용사 파티와 별의 기사를 에워쌌다.
“산 자에게 죽음을! 저들의 생명을 앗아와라!!!”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수백 마리의 강화된 시체들을 보며, 용사 파티와 별의 기사는 이를 아득 물었다.
아무래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