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53. 희생, 그리고 회생
* * *
심장에 마나 코어가 없는 자는 드물다. 천에 하나... 아니, 어쩌면 만에 하나에 근접할 만큼 희귀한 것이, 바로 마나 코어를 갖추지 않은 채로 태어난 존재들이다.
‘존재들’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비단 인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인도 마나 코어를 갖지 않고 태어날 수 있고, 드워프도, 엘프도, 심지어 마물도 아주 낮은 확률로 그러한 존재들이 태어난다.
마나 코어가 자리한 심장은 쉴 새 없이 피를 만들어 내고, 이렇게 만들어진 피는 마나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온몸에 순환시켜 준다고 알려져 있다.
마나 코어는 차오르는 마나량의 한계치가 있고, 따라서 마나를 전부 사용했다 라는 말의 의미는, 마나 코어에 담겨 있는 마나를 모두 소모하여 더 이상 몸에 마나가 돌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마나가 몸에 순환되지 않으면 당연하게도 마나를 이용한 모든 행동에 제약이 걸리고, 평소 마나에 의존하는 성향이 큰 마법사들은 신체 능력마저 저하되며, 심한 경우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마나 결핍. 세간에는 그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태생부터 마나 코어를 갖지 않고 태어난 이들은, 과연 어떻게 힘을 쓴단 말인가?
마나가 없다고 해서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나가 없을 경우 거의 모든 행동에 제약이 걸리고, 보통 온갖 잔병치레를 겪으며 병약하게 자라다가 일찍이 요절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허나, 마나 코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 역시 다수 존재한다.
이들은 과연, 전자와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이는 인류에게 있어 난제로 알려져 있으며, 아직 명확한 결론이 밝혀지지 않은 인류의 숙제이다.
그리고, 나는 이 난제의 해답을 알아냈다.
이는 인류의 오랜 숙원이었으며, 마침내 나 갈란 더글린의 오랜 연구 끝에 다다른 결론임을 밝힌다.
대륙 곳곳에서는 마나 코어가 없는 이들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공공연히 존재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나는 이러한 불평등을 바로 잡고자, 이 일지를 서술한다.
우리는 구시대적인 사고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된다.
인류는, 진보해야 한다.
갈란 더글린의 연구 일지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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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갈란의 오른손에 뭉쳐져 있던 피가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피 안개를 뿜으며 터졌다.
그것을 간신히 피해낸 루나를 확 끌어당겨 안전한 위치로 데려오고, 다시금 쇠뇌를 장전했다.
“고, 고맙다...”
“정신 바짝 차려. 저거, 맞으면 바로 골로 간다.”
폭발 볼트는 생각보다 효과가 좋지 않았다. 만약, 냉기 볼트가 있었다면 놈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지난날의 나는 안일하게도 냉기 볼트를 구비해 두지 않았다.
뭐, 별수 있나. 몸을 굴려서 어떻게든 해야지.
루나가 창을 고쳐 잡고, 그 사이 로이먼의 가시 채찍이 갈란의 오른팔을 휘감았다.
“지금입니다!”
그 찰나의 빈틈에, 불길과 연기, 흙먼지에 절묘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던 로빈이 마치 허공에서 튀어나오듯 모습을 드러내고, 갈란의 급소를 노리고 들어갔다.
“하! 가증스러운 신의 종자로군! 고작 이딴 걸로 날 묶어 두려고!”
그러나, 로이먼의 시도가 무색하게 갈란은 오히려 채찍을 역으로 붙잡아 부웅— 휘둘렀다.
쾅—!
“크하악...!”
“로이먼 사제님!!!”
채찍과 함께 날아간 로이먼이 벽돌로 된 집과 부딪히는 바람에, 로이먼의 위로 벽돌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알렉시스 공녀는 재빨리 로이먼의 앞으로 달려가 방패를 치켜세우고 그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었다.
그 사이, 급습에 실패한 로빈은 고운 얼굴을 한껏 구기며 다시 흙먼지와 연기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로빈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갈란을 향해, 나 역시 숏 소드를 움켜쥐고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촤악—!
살을 가르며 터져 나오는 피와 함께, 깊게 베인 갈란의 오른 다리가 잠시 휘청거렸다.
“이런 버러지 같은 놈들이...!”
비록 내가 베어낸 상처가 깊진 않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루나가 창을 쥐고 달려드는 데 성공했다.
쾅!!!
피에 젖어 빛나는 갈란의 팔과, 루나의 옥빛 창이 충격파를 발산하며 맞부딪혔다.
“너... 낯이 익은데...! 그 약해 빠진 아가일의 인형 아니신가!”
“크으윽...! 어떻게 맨 손으로...!”
“크하하하!!! 그 아가일의 인형이, 결국 주인에게 버림받아 인간들과 함께 다니는 꼴이라니!!!”
“닥... 쳐라!”
채앵! 챙! 챙!
수차례 합을 주고받던 갈란은, 갑자기 루나의 창날을 막던 오른팔을 내리고 루나의 몸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설마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을 할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던 루나는 급히 창대를 들어 올렸으나, 이어지는 갈란의 발차기에 멀리 나가떨어져 버렸다.
“크흡...!”
나는 곧바로 달려 나가, 갈란을 향해 재빠르게 볼트를 쏘아내고 루나의 목덜미를 잡아 거리를 벌렸다.
순식간에 로이먼과 루나를 쓰러뜨린 갈란은, 내 검으로 인해 생겨난 상처를 보고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손바닥을 펼쳐 바닥을 짚었다.
“피가... 피가 더 필요해...!”
매끈한 돌로 잘 포장되어 있는 길바닥을, 갈란의 손이 으스러뜨리며 붉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거... 좋지 않다.
“로이먼! 방호 성법 부탁해!”
“크으...! 해 보겠습니다!”
갈란에게 내던져진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피가 흐르는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던 로이먼이 손을 뻗어 신성력을 발산했다.
모두의 몸에 얇고 푸른 막이 생겨남과 동시에, 대지가 갈라지며 붉은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순간적으로 머리가 약간의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으그극...!”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진하고, 비릿한 혈향이 내 콧속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젠장, 다른 오감마저 둔해지기 시작했다.
“네놈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진보의 수레바퀴를 막아 세울 수는 없다!!!”
치열한 전투로 인해, 거의 넝마가 되어버린 천이 나가떨어지면서, 갈란의 등에 메인 새빨간 수레바퀴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르르르륵—!
울퉁불퉁한 모양의, 마치 돌을 깎아 만들어진 듯한 질감을 가진 수레바퀴가, 붉은빛을 강하게 뿜어내며 빠르게 돌아간다.
모두에게 방호 성법을 내려주던 로이먼은, 갈란의 등에 메인 수레바퀴를 보고 경악했다.
“저건...! 혀, 혈석!”
혈석은, 마나 코어를 온전히 가지고 있는 생명체의 심장을 녹여 만든 힘의 원천. 그 혈석을 깎고 이어 붙여 만들어진 저 수레바퀴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갔는지 짐작하게 해 주었다.
“빌어먹을...! 저 혈석 수레바퀴를 노려! 저게 약점이다!”
갈란의 비정상적인 재생력과 피를 이용한 힘의 원천임과 동시에, 놈이 가지고 있는 가장 취약한 약점.
내 외침을 들은 알렉시스 공녀가 방패를 앞세우고 돌진하고, 루나가 그 뒤를 따라 달려들어 놈의 수레바퀴를 향해 있는 힘껏 창을 휘둘렀다.
“미련하긴!”
“꺄으윽?!”
하지만, 갈란이 대놓고 약점을 노출한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 놈은 자신의 약점을 적에게 쉽사리 내어줄 만큼, 물렁한 적이 아니었다.
도시 곳곳에 흩뿌려진 피를 흡수하던 갈란은, 곧바로 땅에서 손을 떼어 루나의 창을 한 손으로 막고는, 방패 사이로 검을 내지르는 알렉시스 공녀를 향해 충격파를 발산했다.
풍선처럼 터진 피와 함께, 방패에 막힌 충격파의 여파로 알렉시스 공녀가 속절없이 밀려나 버렸다.
“크하하하! 오스틴!!! 용사에게 버림받은 네놈이, 나를 상대로 뭘 할 수 있지!!!”
“야 이 씨발련아!!!!!! 말 똑바로 안 해!!! 버림받긴 누가 버림받아!!!”
“마나 코어를 갖지 않았음에도, 이만큼이나 강해진 것에는 경의를 표하마!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갈란의 두 손이 허공으로 뻗어짐과 동시에, 놈의 두 손으로 빠르게 피가 모여들었다.
다시금 퍼지는 짙은 혈향과, 갈란의 손 위에서 몽글몽글 구체를 이루는 피... 아니, 사실상 폭탄이나 다름없다.
“이런 씹...! 모두 엄폐해!!!”
멀리서 빈틈을 노리며 단검을 던지던 로빈은 진작에 몸을 숨겼으나, 아직 알렉시스 공녀와 루나가 몸을 피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알렉시스 공녀는 갈란의 발에 차인 탓에 숨을 쉬기 힘든 것 같았고, 루나는 갈란을 저지하려는 듯 창을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에라이, 썅!”
나는 등을 기대고 있던 가판대의 잔해를 훌쩍 뛰어넘고, 재빨리 달려 나가 루나와 알렉시스 공녀를 있는 힘껏 밀쳤다.
“콜록...! 오스틴, 고마워요...!”
“오, 오스틴! 어서 피해라!”
그와 동시에, 비어있는 쇠뇌에 재빨리 연막 볼트를 장전한 다음, 갈란을 향해 발사.
“어림없다!”
하지만, 내 시도가 무색하게도 볼트는 허공에 떠오른 핏방울에 잠겨 힘없이 툭 떨어져 버렸다.
“오, 오스틴!!!”
“선배님! 안 돼요!!!”
재빨리 몸을 뒤로 날렸으나, 갈란의 행동이 더 빨랐다.
“끝이다!!!”
갈란의 손 위에서 확 터져 버린 피의 구체는, 마치 작은 화살처럼 뾰족하게 굳은 피 결정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아.”
좆됐다. 진짜 개 좆됐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다.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내 몸이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결정들에 맞으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겠지.
로이먼의 방호 성법이 있지만, 솔직히 저 많은 결정을 막아낼 수 있을지는 요원했다.
주변의 시간이 점점 느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면서, 시야가 좁아진다. 눈을 새빨갛게 빛내며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 갈란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런 씨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 불찰이다. 알렉시스 공녀와 루나가 달려 나가는 것을 막았어야 했는데.
네가 그러고도 리더를 맡을 자격이 있어?!
내 잘못. 오롯이 내 실수에서 비롯된 결과다.
화가 난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 건지. 원래 이놈을 상대하는 것은 용사의 역할인데, 굳이 미련하게 나서 가지곤.
끝이다. 정말로.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려는 순간, 저 멀리서 땅을 박차고 몸을 날린 로이먼이, 막 터지기 시작한 피의 구체를 온몸으로 감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
뭐야... 로이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면 안 되는데. 저걸 몸으로 받아내면, 분명히 죽을 텐데.
“커억...!”
느려졌던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곧이어 살을 찢어 발기는 소리와 함께 로이먼의 커다란 등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너, 무슨...”
엉망진창으로 찢어진 로이먼의 배는, 이미 피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고성이 오가던 전장에, 잠깐의 침묵이 맴돌았다.
갈란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낸 로이먼의 몸이, 힘없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털썩—
“로이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