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56화 (56/106)

〈 56화 〉 55. 수라장

* * *

“크르르륵...!”

“어딜...! 흐얍!”

단호한 기합과 함께, 썩을 대로 썩은 시체의 골통이 부서졌다.

악취를 풍기는 피와 뇌수를 튀기며 쓰러진 시체의 뒤로, 두 마리의 구울이 새로이 나타났다.

이사벨은 철퇴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며, 이를 악 물었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신성력에 약한 언데드라 하여도, 그 교환비는 한계가 있다.

“이사벨! 괜찮아?!”

“저, 저는 괜찮아요! 흐읍...!”

아드리엔의 걱정 어린 물음에 대답하던 이사벨은, 달려드는 좀비들을 향해 신성력을 발산하고, 철퇴를 휘둘러 마무리를 지었다.

끝이 없다. 그야말로 시체의 파도.

“용사님! 이대로 가다간, 저희도 금방 지쳐버릴 거예요! 어서 헌틀리를...!”

“크으윽...! 나도 시도해 보고 있어...! 그레이시! 오른쪽에!”

오른쪽에서 달려드는 구울의 허리를 양단하며, 그레이시는 저 멀리 시체의 산에 앉아 있는 사내를 노려 보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린 헌틀리가, 입꼬리가 찢어지도록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나가 가고, 둘이 오리라...”

조금 전 그레이시의 검에 쓰러졌던 구울의 시체가, 꾸물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뭣...!”

허리가 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체와 하체가 따로 움직이기 시작한 구울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시금 그 둘을 베어내며, 그레이시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예상이 맞다면, 이건...

“둘이 가고, 넷이 오리라...”

헌틀리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방금 전 베어 냈던 구울과 좀비들이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윽... 아, 아버... 아빠!!! 헌틀리 좀 어떻게 해 봐!!!”

“길을 뚫겠다!”

딸이나 다름없는 그레이시의 외침에, 별의 기사는 검을 꽉 움켜쥐었다.

죽은 자들의 공세는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주군의 명이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물불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꽉 부여잡은 검신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고, 상상을 뛰어넘는 고열을 머금은, 별빛의 힘이 검에 모여들었다.

별빛이 농축된 검에, 무한한 힘이 흘러넘쳤다.

“흐읍—!”

어느덧 눈부심 빛을 뿜게 된 검을, 그는 망설임 없이 내질렀다.

콰과과광—!!!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광채.

마치 별이 추락하듯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별의 기사의 검은 썩어가는 대지와 죽은 자들의 파도를 갈랐다.

“크으... 용사!!!”

“마야! 신속 마법을 부탁해!”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라...! 신속!”

마야의 지팡이에서 퍼져 나온 녹색의 마력이 용사의 다리에 깃들어, 용사가 순식간에 헌틀리의 앞까지 달려 나갈 힘을 주었다.

허나 용사가 지근거리까지 도달했음에도, 헌틀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뭐, 뭐야...?”

검으로 놈을 찌르려는 순간, 용사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내었다.

다년간 전장을 휘젓고 다녔던 그녀의 감각이, 그녀의 생존 본능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더 들어가면, 죽는다.

“넷이 가고, 여덟이 오리라...! ”

놈의 삽자루에 매달린 랜턴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체 썩는 악취가 한층 더진동을 하고, 이미 제 역할들 다하지 못하고 있는 후각이 점점 마비되어 간다.

“여덟이 가고, 열여섯... 서른둘...! 예순넷! 더!!! 더 일어나라!!! 마침내 죽은 자들의 군세가 산 자들을 넘어설 때!!!”

콰앙—!

땅을 내려찍은 헌틀리의 삽을 기점으로, 지진이 난 듯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마침내 진동이 잦아들던 그때, 별안간 커다란 시체 더미가 땅을 뚫고 튀어나왔다.

콰드드드득!

“저, 저게 뭐야...”

온갖 시체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것이, 죽음의 향기로 눅눅해진 땅을 헤집고 올라 왔다.

­ 그어어어... 으어어...

인종도, 성별도, 신분도 가리지 않는 시체들이 서로 엉겨 붙은 거대한 산이, 커다란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저물어 가는 해를 가렸다.

죽은 자들의 우상. 시체 거인.

“맙소사...”

이사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묵주를 꽉 움켜쥐었다.

헌틀리가 갈란과 연합해 강해졌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설마 저 정도의 언데드를 사역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산 자들의 생명을 빼앗고, 살을 취해라!!!”

헌틀리의 고함이 전장을 가로 지름과 동시에, 죽은 자들의 우상이 썩은 육편들을 떨구며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별의 기사는, 얼어붙은 용사와 파티원들을 보곤 검을 한층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 빌어먹을.”

용사의 성검이, 부디 제 역할을 해내기를.

* * * * *

“하아...! 하아...!”

카악—! 퉤!

나는 찐득해진 침을 저 멀리 내뱉으며, 시야를 가리던 연기가 옅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갈란을 죽이지는 못했다. 저놈이 어디 보통 놈이어야 말이지.

“쿨럭! 쿨럭! 크학...! 크흐흐흐... 끝이냐! 오스틴!!!”

“쯧...!”

내 옆에 서있던 로빈이, 피를 한 움큼 토해내고 천천히 상처를 수복시키는 갈란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미친놈. 그렇게 베어 넘기고, 찢고, 투척 단검과 볼트로 몸을 뚫었음에도, 놈은 아슬아슬하게 치명상을 피하며 팔다리로 공격을 막아 내었다.

이 정도면 아파서 비명이라도 지를만한데도, 놈은 싫은 소리 한 번 내뱉지 않으며 오히려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갈란은 고통을 쾌락으로 치환한다. 스스로의 몸에서 통각을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

때리면 때릴수록 손해인 것 같은데, 이거.

원래는 수레바퀴를 공격해서 단번에 끝낼 심산이었지만, 놈은 수레바퀴를 향한 공격은 귀신같이 피하거나 몸으로 막아 내었다.

예리한 전투 감각. 놈은 나를 한 수 앞서 나갔다. 저건 더 이상,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흐흐... 큰일 났네...”

연막 볼트는 방금 사용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비장의 한 수를 사용했음에도, 놈의 숨통을 끊어내진 못했다. 완전히 외통수에 몰렸다.

“... 알렉시스 공녀님.”

“오스틴...! 괜찮으신가요?!”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알렉시스 공녀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여기서 도망치십시오.”

“... 네?”

“로이먼이 없는 지금, 갈란을 상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제가 최대한 시간을 끌 테니, 로빈이랑 루나를 데리고...”

짜악—!

별안간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고개가 돌아갔다.

화끈한 고통이 느껴지는 뺨을 어루만지며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알렉시스 공녀가 눈물을 머금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 공녀님?”

“저희는 오스틴을 버림 말로 쓸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구요. 아시겠어요?”

“하, 하지만...!”

“잡담은 거기까지다!”

귀를 때리는 고함에, 우리는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차르르르륵—!

갈란의 수레바퀴가 다시금 세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찮은 벌레 같은 놈들이 왜 계속 내 앞길을 가로막느냔 말이다!!!”

갈란의 눈이 한층 더 붉게 빛나고 있었다. 피 냄새가 조금 더 진해지고, 땅에 흩뿌려진 피가 갈란의 수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공녀님,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더 늦기 전에, 로이먼 사제님을 교회로 모셔 가야죠.”

“하지만, 공녀님. 로이먼은...”

“알아요. 오스틴.”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에,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저,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손 놓고 있을 건가요...?”

... 아.

맑은 눈물을 또르륵 흘리는 알렉시스 공녀를 보고, 나는 깨달았다.

나만 아픈 게 아니었구나.

나만 슬픈 게, 아니었구나.

“... 알겠습니다.”

어느새 상처를 거의 다 수복한 갈란을 보며, 검에 묻은 피를 장갑으로 닦아 내었다.

“아무도 날 막지 못한다! 아무도! 네놈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진보의 수레바퀴를, 나의 원대한 계획을 막아 세울 수는 없다! 그것이 설령 신이라도!!!”

심한 꼴이 된 갈란이, 아픈 기색도 없이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네놈들의 이중성이 역겹다...! 지긋지긋하다! 오스틴! 네놈도 마나 코어가 존재하지 않는 자라면, 내 심정을 이해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헛소리 하지 말고, 덤벼.”

“건방진 놈...! 오냐!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그리 해 주겠다! 모든 것은 인류의 진보를 위해!!!”

오늘 이곳에서, 갈란의 숨통을 끊겠다.

내가 그리 정했고, 그리 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로이먼을 봐서라도, 너는 내 손에 죽어줘야겠다.”

“고작 그 정도 힘으로는, 나를 쓰러뜨리지 못한다!!!”

갈란의 희열 섞인 외침과 함께, 놈의 주먹에 피가 덧씌워졌다.

힘든 싸움이 되겠지. 자칫 잘못하면 죽거나, 어디 하나를 못쓰게 될지도 모른다.

불가능에 가까운 싸움.

하지만.

“더 이상, 눈을 돌리지 않을 거야.”

내 친구들의, 동료들의 죽음 앞에서 눈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을, 로이먼의 희생을 좌시하지 않겠다.

“이건 뭐, 내가 용사인지 척후인지...”

쓰게 웃으며, 눈앞의 강적과 눈을 마주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 어디 한 번, 들어와 봐.”

“벌레 같은 놈! 죽여버릴 테다!!!”

나를 향해 달려드는 갈란을 바라보며, 놈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해 눈을 부릅 떴다.

왼쪽 허벅지의 근육이 꿈틀거린다. 발로 차려는 건가? 아니, 왼다리는 축이다.

왼다리를 지지대 삼아, 오른 다리를 뻗으려는 심산이다. 그렇다면, 오른 다리로 발차기를 하려는 건가?

아니, 오른쪽 다리로 한 걸음 내딛으려는 거겠지. 왼 다리를 기둥 삼고, 오른 다리를 앞으로 뻗어서, 주먹을 내지른다.

짧은 시간에 놈의 행동을 예측한 나는, 곧바로 고개를 비틀어 놈의 주먹을 피했다.

“크으...!”

스치고 지나간 귀 끝이 얼얼하다. 손으로 대충 더듬어 보니, 귀 끝의 살이 조금 찢어졌다.

맞으면 즉사. 어설프게 막아도 빈사.

나는 망설임 없이 지원을 요청했다.

“루나!!!”

“흐읍—!”

완벽한 타이밍에 파고 들어온 루나의 창을, 갈란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몸으로 받아 내었다.

“뭣...!”

루나의 창이 갈란의 옆구리를 깊게 찌르고 들어갔음 에도, 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살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창대를 붙잡으려 했다.

“이익...!”

다행히 루나가 재빨리 창을 뽑아내긴 했지만, 루나의 창에 의해 난 갈란의 상처는 금방 수복되어 버렸다.

놈의 비정상적인 재생 능력이, 한층 더 강해졌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인형 주제에!”

“루나! 이리로 오세요!”

루나의 배를 노리고 쏜살같이 내질러진 갈란의 주먹은, 급히 달려온 알렉시스 공녀의 방패에 가로막혔다.

나는 재빨리 검을 고쳐 잡고, 미끄러지듯 몸을 날려 놈의 발목을 노렸다.

발 뒤꿈치의 위에 자리한 힘줄. 저기만 끊어내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시간을 벌던, 놈의 숨통을 끊던...

하지만, 흉폭하게 변한 갈란을 상대로 몸을 날리는 것은, 아무래도 잘못된 판단이었다.

나름 빠르게 몸을 날렸으나, 갈란은 내 움직임을 보곤 재빨리 발을 옮기는 바람에 숏 소드는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내 손목을 노리고 내려 찍으려는 갈란의 발.

“이 씨ㅂ...”

좆됐다. 좀 더 생각하고 몸을 날릴걸.

“선배님!”

다행히도, 갈란의 공격은 놈의 목을 노리고 달려든 로빈의 단도에 의해 무산되었다.

재빨리 몸을 굴려 일어났지만, 왼손에 들려있던 쇠뇌를 흘리고 말았다.

“저거 비싼 건데...!”

지금 달려가서 줍기에는, 놈의 발치에 떨어지는 바람에 너무 위험하다.

나는 두 손으로 숏 소드를 꽉 움켜 쥐었다.

“이런 식으로, 초심으로 돌아갈 줄은 몰랐네. 흐흐흐...”

한 차례 격전을 펼친 뒤, 우리는 거리를 벌리고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놈이 힘을 끌어내는 원천은 혈석 수레바퀴. 지금처럼 일시적으로 신체가 강화된 갈란을 제치고 수레바퀴를 노리는 건 무리다.

하지만, 힘을 쓰면 그에 따른 대가도 있는 법. 놈의 힘은 영원하지 않다.

“후우... 후욱...”

“루나. 괜찮냐?”

“후으... 좋지 않지만, 그래도 버틸만하다.”

로이먼의 주먹을 창대로 몇 차례나 막은 루나는, 손바닥을 주무르며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저 미친놈을 상대로도 쉽사리 부러지지 않으니, 모그단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 파직!

“앗 따거.”

순간, 팔에 무언가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한겨울날 정전기가 난 듯한...

“... 뭐지, 이거?”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언제부터 인지 모르겠지만, 허공에 붉은빛의 전기가 파지직 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갈란은 마법을 쓸 수 없을 텐데.

“허튼 생각 마라!”

갈란이 미친놈처럼 다시 달려드는 바람에, 저게 정확히 무엇인지 자세히 볼 시간은 없었다.

챙—!

“크이익...! 이 미친놈아...!”

“날 막아서는 머저리들은, 내 손으로 직접 죽여주겠다!!!”

별의 기사, 그 양반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네. 하다못해 용사라도...

철퍽!

“...?”

어디선가 날아온 끈적하고 하얀 액체를 보고, 갈란과 힘겨루기를 하던 나는 재빨리 놈과의 거리를 벌렸다.

“뭐냐! 또 무슨...?”

갈란의 발치에 떨어진 그것은 자아를 가진 듯 꾸물꾸물 움직이다가, 순식간의 갈란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건...

“... 밀랍?”

“이건...! 아가일!!!”

아가일? 아가일이 여기서 왜 나와?

갈란의 분노에 찬 표정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저 멀리서 익숙한 외형의 소녀가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대피소에 있지 않고 바깥으로 나왔냐고 호통 치려던 나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아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실... 비아?”

나와 눈을 마주친 실비아는 어딘가 슬픈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돌려 갈란을 노려 보며 지팡이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갈란. 오랜만이야. 꼴이 말이 아니네?”

“크윽...! 당장 풀어라! 지금 네가 하는 짓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알아. 나도 바보는 아니거든.”

둘이 구면인... 아니, 그보다 아가일이라고?

“아가일, 님...?”

힘 빠지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니, 루나가 허탈한 표정으로 실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

난장판이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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