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56. 회광반조
* * *
“아버지. 저 사람들은 왜 화내는 거예요?”
소년은, 총기가 들어찬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며 제 아비를 향해 물었다.
다짜고짜 자신들의 집에 들이닥쳐서, 온갖 돈이 되는 물건은 닥치는 대로 가져가는 무서운 아저씨들.
아비 되는 자는, 아들의 물음에 그저 맞잡은 손을 꽉 움켜쥘 뿐이었다.
“...아버지?”
각자의 영지에서 살지 않고 수도에 기거하는 중앙 귀족들은, 대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성공한 장사치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왕국에 소속된 돈 많은 귀족, 그리고 가문의 일원에게 영지를 맡기고 정치판에 뛰어든 고위 귀족.
더글린 자작가는 전자의 경우였다.
순전히 운이 따랐던 선대 가주의 성공으로, 단번에 출세길에 올랐던 전도유망한 가문. 왕국 귀족들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재력.
막대한 양의 재산은 세습되어 왔고, 다행히도 능력 있는 가주들이 연임한 덕에 그 많은 재산을 눈덩이처럼 불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너무 눈에 띄었던 것일까.
수도에서 오랫동안 군림해왔던 토박이 중앙 귀족들은, 난데없이 굴러 들어온 돌을 그리 달갑게 보지 않았다.
겉으로는 친하게 지내자느니, 혼약을 맺어 연을 끈끈하게 만들자느니. 오로지 재산만을 탐내고 입에 발린 말을 해 왔던 놈들이.
더글린 가문의 7대 가주인 길 더글린 역시, 이런 결말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눈물을 글썽이는 아내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미안하구나.”
“아버지...?”
아버지. 그는 과연 아버지라 불릴 자격이 있는 걸까. 길 더글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태껏 선대 가주들이 열심히 불려 왔던 재산을, 중앙 귀족들의 암투에 휘말려 한순간에 잃은 남자.
그런 아버지의 생기 없는 미소를 보며, 어린 나이의 갈란은 그 미소에 담긴 진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재산은 거의 바닥이 나버렸다. 가문의 위세는 크게 위축되었고, 이제는 소수의 농지와 광산을 비롯한 사업장 몇 군데밖에 남지 않았다.
가문의 재건은 힘들 것이고, 재건을 한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눈물을 삼키며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 모아 갈란을 아카데미에 입학시켰다.
아들만큼은, 부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가길. 부족한 것 없이 살아가길.
그러나, 그들은 현실을 간과하지 못했다.
아카데미에서, 갈란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갈란 더글린. 네 가문이 우리 가문에 빚을 졌다면서? 알아서 기어주면 좋겠네.”
“이 무능한 새끼가! 훈련장에서 꺼지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는 거냐! 너 같은 반푼이가 훈련을 해서 뭘 어쩌겠다고!”
“자네, 마나 코어가 없다고? 으음...”
“갈란 더글린. 당신과의 약혼은 파기하도록 하겠어요. 조만간 파혼에 관련된 서류를 보내 드릴 테니, 그런 줄 아세요.”
“어... 갈란. 우리 엄마가, 이제 너랑 어울리지 말래... 그, 미안해...”
기대했던 아카데미 생활도, 약혼자도, 하나 남은 친구마저 지키지 못했음에도, 그는 아카데미의 수업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특히나, 무언가를 지킬 힘이 없었던 갈란에게는 더더욱.
마나 코어가 존재하지 않아서, 마법 수업에서는 매번 구박을 들어야 했다.
슬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갈란은 끝내 울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조수로 일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갈란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가문에서 보내주는 돈이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끊겼다. 밥을 사 먹을 돈조차 없어 끼니를 걸렀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갈란은 낙담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이면, 어디선가 날아온 마력 뭉치에 뒤통수가 성 할 날이 없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 한 명 없었고,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의 품에 안길 수도 없었다.
갈란은 꺾이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조수로 일해도 돈이 모자라, 자는 시간을 줄여 마탑의 서고 사서로 일했다.
마탑은 오로지 실력주의로 대우가 달라지는, 어찌 보면 지독하게도 차가운 이 사회의 축소판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갈란은 굴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
마나 코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큰 열등감을 겪었던 갈란은, 언제나 서재를 청소하는 짧은 시간 동안 남몰래 마력에 관한 책을 속독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2년이 흐르고.
어느 날 찾아온 이름도 모르는 마탑주의 눈에 띈 갈란은, 그와 함께 수시간 동안 마력과 마법의 이해에 관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갈란이 토해내는 열변을 한참 동안 묵묵히 들어주던 마탑주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갈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는 것이었다.
“자네는 마력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뛰어나군.”
갈란은 인생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다.
순수하게 기뻤다. 반푼이에 쓸모도 없다고 조롱을 받던 자신이,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처음이라서.
“어떤가. 내 밑에서 일해볼 생각은 없나? 봉급은 섭섭지 않게 얹어주지.”
그 후, 갈란의 인생은 조금이나마 꽃이 핀 듯 했다.
말이 잘 맞는 마탑주와 함께 마법에 대한 심층 있는 토론과 연구를 할 수 있었으며, 어느새 마탑주의 딸과 좋은 인연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을, 어서 부모님께 전해드리자.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편지도 뚝 끊기고, 생활비도 보내주지 않는 것이 마음에 크게 걸린 갈란은, 이 기회에 번듯한 청년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넝쿨이 지저분하게 자라 있는 담장. 새까맣게 전소되어 있는 저택.
중앙 귀족들은, 더글린 가문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갈란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힘이 없어서. 아무런 힘도 없었기에, 그는 멍하니 불타버린 과거의 추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죽음을 확인한 뒤,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만, 어느새 연인 관계로 발전한 마탑주의 딸은 그런 갈란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다.
갈란에게, 지켜야 할 것이 새로이 생겼다.
갈란은 애써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그 후로, 갈란은 마법과 마력에 대한 연구에 더욱 집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내를, 소중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딸이 태어났다. 눈에 들어가도 안 아플 정도로, 예쁜 딸이었다.
갈란은 행복했다. 이런 나날이, 언제까지고 이어졌으면.
마탑주가 죽고 그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여러 연구 성과를 내어 마법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여러 해가 지나고, 갈란은 점차 생기를 되찾아 갔다.
아내와 딸이, 그런 그를 아니꼽게 보던 이들의 손에 죽기 전까지는.
* * * * *
갑작스레 난입한 실비아. 주먹을 내지르려 할 때마다 굳어지는 몸. 처절한 전투로 인해 찢기고 꿰뚫린 오른팔과 다리.
“하하...”
힘겹게 우리의 합공을 막아내던 갈란이, 별안간 힘없이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노을. 잘 익은 해가, 지평선 너머로 반쯤 모습을 감추었다.
“...쟤 왜 저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선배님! 지금이 기회예요!”
그런 갈란의 모습에, 나는 재빠르게 놈을 향해 달려들어 가슴팍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다.
“크윽...!”
“슬슬 끝을 보자고, 갈란.”
갈란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막지 않은 걸까.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칼을 뽑아내고 심장을 향해 다시금 칼을 겨누자, 입으로 피를 흘리던 갈란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뭘 그리 잘못한 거냐.”
“...뭐?”
나를 바라보는 갈란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고통도, 미련도, 분노도, 아무것도.
공허함. 그저 어둠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바닷속 깊은 심해처럼 끝도 없는 어둠만이 나를 바라보고 있음에, 문득 소름이 돋았다.
“내가... 내가 뭘 그리 잘못했냔 말이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넌 무고한 사람들을...”
“내 아내는.”
한 차례 숨을 돌린 갈란이, 말을 이어 나갔다.
“내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여자였다.”
“무슨...”
“평소 마탑의 서고에만 틀어박혀 있던지라... 쿨럭!... 나 같은 소심한 인간도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지.”
나를 향하고 있는 갈란의 눈동자에, 미약한 광채가 들어찼다.
“언제나 나를 챙겨주던... 나에게는 과분한 여자였다. 마탑주의 딸이었던 그녀는, 내가 마나 코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위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갑자기 뭔 소리야?”
로이먼의 시신을 가져가야 하니,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나는 갈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그대로 칼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칼을 박아 넣는 순간, 빠르게 움직인 갈란의 손에 붙잡혀 꿈쩍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라, 오스틴.”
“...야, 너...”
“암살자들이었다. 내가 마탑주의 자리를 이은 것을... 크읍...! 아니꼬워하던 자들이 보낸.”
갈란의 독백에, 알렉시스 공녀와 루나가 입가를 틀어막으며 헛숨을 들이켰다.
잠시나마 희망이라는 것이 들이찼던 갈란의 눈동자가, 또다시 어둠에 뒤덮였다.
“내 딸과 아내가 죽을 동안, 나는 온몸을 꽁꽁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아내와 딸은 무고한 자들이 아니었나? 대답해 봐라, 오스틴.”
“...이봐, 갈란.”
“대답해!!!!!!”
울분이 섞인 고함에,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나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힘이 없었으니까... 그 빌어먹을 마나 코어가 없었으니까!!!”
“핑계 대지 마라, 갈란! 나도 마나 코어가 없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멀쩡하게...”
“어미는 유명한 사냥꾼. 아비는 길드의 지도 제작자.”
...이 새끼가 우리 엄마랑 아빠를 어떻게 아는 거지?
“내 뒷조사라도 했냐?”
“모자란 것 없이 자랐겠지. 적어도 가족의 품에서, 편안한 잠자리를 가질 수 있었겠지.”
“......”
생각해 보면, 내가 마나 코어가 없다고 마을 어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때에도, 부모님께서 항상 나서서 나를 감싸 주셨다.
갈란의 과거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놈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너와 나는 시작선부터 불공평했건만, 어째서 비교질을 하는 것이냐.”
갈란의 눈이 광기에 젖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놈의 가슴팍에 생긴 상처는, 어느샌가 새 살이 차올라 멀쩡하게 수복되어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
“세상은 그런 법이지... 언제나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껍데기만 남긴 채 내던져 버린다.”
순간 갈란이 팔 힘을 뺀 탓에,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던 나는 그대로 뒷걸음질을 쳐 버렸다.
“네놈은 죽이기 위해 싸워왔겠지만, 나는 지키기 위해 싸워왔다.”
그리 말하며, 갈란은 붙잡고 있던 칼을 손으로 쓱 훑었다. 검날에 훑어진 갈란의 손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놈이, 등에 메고 있던 수레바퀴를 들어 올렸다.
자신의 제 2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수레바퀴를 들어 올렸다는 건, 단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놈은, 여기서 우리와 함께 죽을 생각이다.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어 간다.
꿀꺽—
목 울대를 움직이며 크게 삼켜진 침은, 긴장감 탓에 쉽사리 넘어가질 않았다.
“...야, 실비아. 아니, 아가일. 저거 어떻게 좀 해봐.”
“쳇... 틀렸어. 놈은 이미 광폭화 상태야. 맞서 싸워야 해.”
“이 씨발...”
나는 눈동자를 굴려, 갈란의 뒤에서 붉게 물들어 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불의 일렁임. 지평선 인근에서 뜨겁게 타오르던 태양은, 어느새 진하게 익어가며 성벽 너머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갈란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나를 막아서는 너희들은... 너희들은, 반역자다.”
피처럼 붉게 익어가는 태양을 등에 짊어진 채, 한 걸음.
“인류의 배신자다. 세상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지성체들에 대한 반역이다.”
“...헛소리.”
또 한 걸음.
“삶이라는 길은 언제나 장애물 투성이에 가시밭길이고, 나약한 자들에게 지름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온갖 상처로 찢기고 부르튼 발을 질질 끌며 걸어보지만, 이 고지식하고 답답한 세상을 향해 소리칠 힘조차 없다.”
다시, 한 걸음.
“약자들은 언제나 온갖 부조리를 몸소 겪다가, 결국 전쟁터에서 소모품으로 쓰이거나, 비가 새는 썩은 나무 지붕 아래에서 눈을 감는 경우가 부지기수. 꼴에 강자라고 으스대는 치들은, 약자들의 사정 따위에는 콧방귀를 뀐다.”
놈이 등에 짊어진 태양은, 마치 심장이 박동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선배님.”
“로빈. 루나와 함께 뒤에서 공격해.”
갈란이 수레바퀴를 들어 올려 광폭화 상태에 들어간 이상, 놈을 막아 세울 방법은 현저히 적어진다.
다행인 점은, 놈이 광폭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 정도.
“힘없는 자들은 나약하다. 힘 있는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이 나약하면서도, 한계를 부수기 위해 움직이지도 않는다! 왜냐! 그들은 이 막막한 상황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철창을 타파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차르르르륵—!
피에 젖은 놈의 수레바퀴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강해져야 한다! 우리는 진보해야만 한다! 인류는, 특히나 약자들은 더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대체 언제까지 잠만 자고 있어야 하는가! 태생부터 힘을 적게 가져야 하는 운명은 대체 누가 정하는 것이지! 네놈들이 믿는 신이냐! 아니면, 대륙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던 아랑곳하지 않는, 한계를 초월한 이들이냐!”
기이이잉—!
조금 전까지 있었던 격렬한 전투의 여파가, 혈석으로 만들어진 수레바퀴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가판대의 잔해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피와, 심지어 흙에 젖어 들어간 피까지 남김없이 빨아들인 수레바퀴는,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핏빛을 발하며 회전에 회전을 거듭해 나갔다.
“마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나 코어도 없다! 지식을 배울 터전 조차 힘 있는 자들만 우선시되니, 제대로 된 지식도 얻을 수 없다! 하다못해 재능도 없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조용히 사회에서 도태된다! 하지만!!!”
삶의 애환이 뒤섞인 갈란의 고함이, 불타는 전장을 쩌렁쩌렁 울리며 퍼져 나갔다.
약자로서 태어난 이상, 짊어져야 했던 숙명.
그것은 일종의 저주요, 이 지옥 같은 현실에 육신을 묶어두는 쇠사슬이었다.
갈란은, 나약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약자였기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고, 약자였기에 가장 소중한 것들을 빼앗겼고, 약자였기에 지키지 못했다.
타닥. 타닥—
타오르는 불길과,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하는 수레바퀴.
“내가! 바로 내가 그들의 메시아가 되어 주겠다! 피와 살이 튀길 정도로 처절하고, 시작선부터 불공평한 이 생존 경쟁에서, 나약한 존재들을 구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갈란의 비명에 가까운 절규에, 루나가 창을 꼭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미친 소리...”
“인류는 언제나 발견과 혁명, 그리고 연구에 연구, 희생에 희생을 거듭하면서 발전해 왔다! 마나의 발견! 신성력의 발현! 기술의 발전!”
갈란의 눈이 피에 젖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광기가 충만한, 사납고 미친개들의 눈처럼 빨갛게 변한 눈에서는 진득한 피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광인. 놈은 미쳐버렸다.
“대답해 봐라! 저기 누워있는, 신앙심에 눈이 먼 사제가 내 손에 죽어 나갔건만, 그 잘난 신들은 대체 뭘 하고 있지! 내가 고통받을 때, 약자들이 힘 없이 목숨을 잃어갈 때! 그 신이라는 작자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느냔 말이다!!!”
정적.
우리는 그저, 갈란을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뿐이었다.
우리도 몰랐기에.
지금 이 상황에서, 아니. 비단 지금 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대륙 곳곳에서 뻗쳐오는 악의 마수에 천상의 날개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로이먼처럼 종교인도 아닌 우리가 알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나약한 자들은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약자들은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 몸을 아끼지 않고 있다! 나는 그들이 그런 부조리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을 알고 있다! 태생부터 마나 코어가 존재하지 않았던 나는, 오히려 그렇기에 비로소 그 해답을 찾아내었다!”
카가가가가각—!!!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진 수레바퀴의 회전은, 그 주변의 땅을 짐승처럼 파헤치며 피와 광기, 그리고 힘에 대한 도를 넘는 집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모든 생명의 근원! 우리는 피로써 힘을 발휘해야 한다! 생명력의 총집합! 이는 우리들이 살고자 하는 의지요, 진보의 수레바퀴를 막아 세우려는 장애물을 깨부술, 약자들의 무기이다! 마나는 도태될 것이고, 피는 영원하다!!!”
별안간 번쩍 들어 올려진, 전투의 여파로 찢기고 뚫려 넝마가 된 갈란의 오른팔이 정확히 우리를 가리켰다.
“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약자들과 인류를 진보시키기 위해서, 그 과정에서 마나와 같은 구시대의 유산은 사라져야 한다고 해도! 그로 인해, 설령 이 세상이 불길에 휩싸여야만 한다면! 정녕 그리 해야만 한다면!!!”
꾸드드득—!
전투의 여파로 갈가리 찢겨 넝마가 되어버린 갈란의 신체가 뒤틀리고, 살과 살이 붙기 시작했다.
“내가 기꺼이, 이 세상을 불태워 버릴 것이다. 나 자신이 장작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눈 깜짝할 새에 신체를 수복시킨 갈란은, 곧이어 수레바퀴를 들어 올려 우리를 겨누었다.
피를 잔뜩 흡수한 수레바퀴는, 바큇살 사이사이마다 빈틈없이 피가 메워져 넘실거리고 있었다.
해가 지기 직전에는, 햇살이 가장 강해진다고 하던가. 촛불은, 마지막에 가장 화려하게 불 타오른다고들 하던가.
놈은 자신의 생명을 불태우고 있었다.
“...와라. 한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주겠다.”
“...모두, 전투 준비.”
왼손으로는 쇠뇌를, 오른손으로는 모그단이 건네주었던 숏 소드를 꽉 움켜쥐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미리 각오를 하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