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58화 (58/106)

〈 58화 〉 57. 신의 뜻이다

* * *

신화시대의 이야기. 사람들은 그리 말했다.

하늘이 열린다. 진군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퍼지고, 곧이어 찬란하게 빛나는 빛줄기가 지상으로 내려온다.

붉은 벼락의 힘을 두르고, 정의를 집행하기 위한 검을 높이 치켜든 빛과 정의의 신.

신과 악마의 싸움은 치열했고, 신화로 내려오는 그들의 전투는 태초의 땅에 커다란 구멍을 남기고 막을 내렸다.

지금까지도 동대륙과 서대륙을 갈라놓고 있는 거대한 바다. 카디프 내해.

정의는 죽지 않았으나, 악 또한 건재하다.

허나 지금만큼은 정의가 조금 더 유리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그리 믿고 싶었다. 언제까지나.

정의와 빛의 신, 아크론. 붉은 번개로 악을 단죄하며, 이 땅에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용맹하고 자애로운 신.

자신만의 올곧은 정의.

아크론을 믿는 정의와 빛의 교단은,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신만의 올곧은 정의를 확립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래.

부모님을 모두 잃고 홀로 남은, 복수심에 불타는 듯 새빨간 눈이 인상적인 이 소년을 두고 이야기를 해 보자.

복수심은, 자신만의 정의를 확립하기 위한 훌륭한 수단이다.

한술 더 떠서, 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마물의 손에 목숨을 잃은 어머니를 위한 복수라면, 더더욱 훌륭한 정의를 세울 수 있을 테지.

혹은, 혼자 남은 아버지마저 불의의 사고로 인해 팔이 잘려,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밥을 굶어야 하는 처지라고 생각해 보자.

아들을 먹여 살릴 능력을 잃은 소년의 아버지가, 결국 소년을 교회에 맡기고 목을 메단 안타까운 일은, 복수심과는 또 다른 별개의 의미를 새길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 이르길. 숭고한 희생이 아닌, 그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살은 중죄이고, 자신의 피를 이은 자식을 버리는 것은 부모로서 어긋난 행위이기에, 대죄로 받아들여진다.

매일 교회의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던 소년의 아버지는, 한순간에 죄인이 되어 교인들의 경멸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그의 사정이 어떻든, 그가 저지른 짓은 신의 경전에 위배되는 행위였기에.

소년은 그런 아버지의 자식이었기에, 따가운 시선을 한 몸으로 받으면서도 묵묵히 교인으로서 성장해 나갔다.

선교사가 이르길, 소년의 아버지는 죄를 속죄하지 않으면 영혼이 버려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으니, 소년이 대신 속죄해 주어야 한다고.

소년은 아비를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사후에도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것에 크게 슬퍼했다.

어머니께서 마물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음에도, 아버지께서는 하나 남은 외팔로 소년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음을 알기에.

힘겹게 얻은 궂은 일거리를 겨우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피곤하면서도 넓은 아비의 등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그 옛날, 어머니가 살아 계시던 시절의, 따스하고 안락하던 어머니의 품이 그리웠다.

소년은 좌절하지 않았다. 다만, 현실을 직시할 뿐이었다.

아버지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어머니의 죽음을 되갚아 주고자 굳게 결심했다.

그 후, 소년은 여타 교인들과 다르게 경전을 외우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몸을 단련했고, 무기를 들어 올렸다. 소년은 그 많은 무기들 중에서도, 사슬의 끝에 달린 추가 위협적인 플레일과, 중거리에서도 적을 속박하고 갉아 내릴 수 있는 채찍을 선호했다.

처음에는 소년을 차갑게 대하던 다른 교인들 역시, 소년의 피나는 노력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소년은 성기사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성기사는 생각 외로 제약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성기사들은 신성력을 다루는 것에 독보적인 실력을 가져야 했고, 어떠한 난관에도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육체와 정신력이 필요했으며, 숙련된 성기사는 성녀를 호위하기 위해 교단의 본거지인 신성교국으로 보내어진다는 것을, 소년은 알아 버렸다.

소년의 신성력은 다른 교인들에 비해 많긴 했으나, 그것은 결코 성기사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강인한 육체와 정신력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으나, 성기사단에 속하게 되면 속죄를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소년은 전투 사제단에 지원했다.

본래 전투 사제단이라 하면, 동료의 뒤에서 치유를 해주며 어느 정도 자기 방어가 가능한 이들을 말한다.

하지만, 소년은 마물들을 토벌할 때가 오면 언제나 앞장서서 마물들을 도륙했다.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마물들의 피와 살을 그분의 제물로 바쳤다.

“그분께서, 네놈의 사지를 원하신다.”

팔을 잘라 내었다.

“그분께서, 네놈의 머리를 원하신다.”

머리를 뜯어 내었고.

“그분께서, 네놈의 심장을 원하신다.”

더러운 피를 순환시키는 심장을 뽑아 들었다.

아버지의 속죄를 위해,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어느덧 청년이 된 그는, 다른 교인들과 달리 그분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는 죄인이었기에. 아버지의 죄를 짊어진 이상, 그는 속죄해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방금,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의 순간,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으니.

‘나는 과연, 올바른 정의를 믿고 따랐는가.’

아버지를 위한, 어머니를 위한 정의. 오로지 속죄와 복수만을 위해 살아왔다. 그분의 정의에는 발끝만큼도 미치지 못했다.

죽음의 순간, 로이먼은 과거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천상의 빛이 잠깐이나마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하지만, 로이먼에게는 그것 만으로 충분했다.

속죄와 복수는, 이제 충분하다. 새로이 생긴, 내 주변의 소중한 이들을 위해 이 한 몸을 불사를 때다.

* * * * *

“허억...! 허억...!”

용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앞의 거대한 시체 더미를 노려보았다.

승산이... 없다.

놈의 덩치에 비해 성검은 턱없이 작고, 이사벨의 신성력으로도 저만한 언데드를 단번에 소멸시키는 것은 무리다.

“씨발...!”

다시금 쇄도해오는 거대한 시체 주먹을 피하며, 용사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무슨 방법이...

그때, 그레이시와 함께 끝도 없이 밀려오는 구울들을 베어 넘기던 별의 기사가 다급히 외쳤다.

“용사! 성검을 이용해라! 성검의 힘을 이끌어 내야 해!”

“성검의 힘...?”

용사는, 자신의 손에 들린, 희미하게 빛이 나는 성검을 바라보았다.

성검. 성검의 힘.

신이 용사로 하여금, 마왕을 무찔러 주길 바라며 건네주었던 검. 신의 힘이 깃든...

“신의 힘.”

성검에는 한계가 없다. 다만, 그 성검을 다루는 자에게 한계가 있을 뿐이다. 한계를 뛰어넘는 자만이, 진정한 성검의 힘을 다룰 수 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가 바로, 용사.

‘...라고, 이사벨이 예전에 말해 줬었지.’

힘을 이끌어 내는 방법은 모르지만, 그녀는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눈을 감고, 자신의 손에 들린 성검으로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운. 이전에 다른 군단장과 싸울 때면 어렴풋이 느껴졌던 바로 그 기운이, 성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용사는 느낄 수 있었다.

“용사! 시간이 없어! 어서 돌파구를 찾아야 해!”

아드리엔이 다가오는 시체들의 머리에 화살비를 쏟아부으며 외쳤다.

대답할 시간도 없다. 지금은, 온 신경을 성검에 집중시켜야 한다.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의 힘을 이용하려면...

빛과 정의의 신.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용사. 그리고, 그런 용사에게 주어지는 성검.

‘정의로운 마음이 있어야 하는 건가? 아니, 무슨 파워레인저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정의를 위해 싸워왔다.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져봤자...

“...아.”

지난날, 오스틴에게 행해왔던 수많은 악행들.

외부의 요소에 의해 휘둘러져 왔다고 한들, 핑계에 불과하다.

“하하...”

오스틴. 그 남자에게 저질렀던 일들 때문에.

용사는, 허탈하게 웃으며 성검을 든 팔을 축 늘어뜨렸다.

“...미안해, 오스틴.”

진심을 담아서, 한마디.

이번에는 직접 만나서, 정말 진심을 담아 사과하려고 했는데.

용사는 스스로의 이중성에 자조하며, 눈앞의 거대한 시체 거인을 허망하게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콰아아아—!

“흐읍?! 무슨...!”

찰나의 순간이었다. 저 멀리 도시의 한복판에, 강렬한 붉은빛을 띤 번개가 떨어지는 모습이, 용사의 뇌리에 강하게 틀어 박혔다.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하게 빛나던 번개가 없어지고, 곧이어 엄청난 고통이 용사의 몸을 강타했다.

“끄으으윽...!”

뼈와 살이 재조립되는 느낌과, 그에 따른 엄청난 고통이, 용사의 몸 이곳저곳을 유린했다.

잠깐의 고통이 지나가고, 용사는 조심스레 감았던 눈을 떴다.

“몸이...”

몸이 가볍다. 몸 곳곳에서 엄청난 힘이 느껴지고, 그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성검 또한 힘에 반응하듯, 웅웅 거리며 붉은빛을 흘리고 있었다.

“요, 용사님...?!”

그런 용사의 모습을 본 이사벨은, 눈을 크게 뜨며 헛숨을 들이켰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치 신화 속의 전설로 남은, 고대의 용사의 모습과 같았기에.

“이거라면...!”

용사는 온몸에 끓어오르는 힘을 검으로 집중시키며, 시체 거인을 향해 성검을 겨누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이라면 놈을 물리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 *

“항상 나를 막아 세웠어!!! 내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방해하고, 음해하는 비열한 족속들!!!”

기이이잉—!

세차게 회전하던 갈란의 수레바퀴가 강하게 빛나고, 곧이어 우리를 향해 겨누어졌다.

“피해!!!”

“꺄아악!”

콰과과과!!!

새빨갛게 빛나던 수레바퀴에서, 선명한 붉은색의 피가 솟구치며 혈포가 쏘아졌다.

“미친...!”

그까짓 피 좀 맞으면 어떻겠냐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굳이 우리를 향해 가해지는 공격을 일부러 맞아 가면서 모험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재빠르게 옆으로 굴러 혈포를 피하면서, 놈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 바쁘게 눈동자를 굴렸다.

“네놈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약자들이 얼마나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지! 신체 개조와 혈마법이, 힘없는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네놈들은 모른단 말이다!!!”

“갈란! 의미 없는 짓은 그만둬!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아니! 네놈에겐 아무 의미 없을지 몰라도,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목이 찢어져라 울부짖으며, 갈란이 다시금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쾅! 콰앙!

붉은색으로 흉흉하게 빛나는 수레바퀴를 번쩍 들어 올려서, 우리를 향해 그대로 내려 찍는다. 저런 걸 맞았다간 운이 좋으면 불구, 운이 나쁘면 즉사다.

맹렬하게 돌아가는 울퉁 불퉁한 수레바퀴를 내려치는 바람에, 빗맞은 땅이 처참하게 패이며 흙먼지가 일어났다.

나는 재빠르게 쇠뇌를 장전하며, 알렉시스 공녀의 뒤로 몸을 날렸다.

놈이 광적으로 수레바퀴를 이리저리 내려치는 찰나, 순간의 틈을 노리고 루나의 창이 수레바퀴를 비집고 들어갔다.

콰직—!

하지만, 갈란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몸으로 받아 내는 것이었다.

“무슨...!”

루나가 재빠르게 창을 뽑아내었으나, 놈은 무거운 혈석 수레바퀴를 들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루나를 향해 수레바퀴를 휘둘렀다.

“이런 미친놈이...!”

“고통은 익숙하다!!!”

채앵—!

“피에 잠재된, 진정한 힘을 보여주마! 네놈들의 사고를 진보시켜 주겠다!!!”

“크흡?!”

비틀거리던 루나가 급하게 창대를 들어 올려 놈의 공격을 막았으나, 강력한 공격으로 인해 루나 쪽이 나가떨어져 버렸다.

“마나는 구시대의 유산이요, 피는 영원하다!!!”

수레바퀴가 루나를 향해 내리 찍히는 순간, 갈란의 팔을 타고 올라와 순식간에 굳어진 아가일의 밀랍 덕분에, 갈란의 움직임이 잠시나마 멈추었다.

“로빈! 루나 좀 뒤로 빼 줘!”

“알겠습니다!”

그 사이, 로빈이 재빠르게 달려들어 루나를 빼내 주었다.

루나가 로빈의 손에 끌려 뒤로 빠짐과 동시에, 잠시나마 놈을 묶어 두었던 밀랍이 쩌저적— 갈라졌다.

“아가일! 이 빌어먹을 배신자가!!! 내 아내와 딸을 죽였던 마탑의 배신자들처럼, 피부 가죽을 벗겨 버리겠다!!!”

“으으...!”

밀랍을 조종하던 아가일은 미간을 찌푸리며, 놈의 몸에 붙어 꿈틀거리던 밀랍을 다시금 회수했다.

아가일이 시간을 끌어 줄 수는 있겠지만, 보아하니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밀랍을 소모하는 것 같다. 나는 알렉시스 공녀를 향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공녀님! 공격할 틈이 안 나옵니다! 일단 놈을 저지해야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방패로 한 번만 막아주실 수 있으신가요?!”

“시, 시도해 볼게요!”

“내가 도와줄게!”

아가일의 밀랍이, 알렉시스 공녀의 방패에 흘러내려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좋아! 이 정도면 한 번은 막을 수 있겠어!”

피눈물을 흘리며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갈란의 행동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마치 성난 들소처럼 이리저리 날뛰며 변칙적인 공격을 가하니, 염병할 예측이고 자시고 피하느라 바쁘다.

나는 놈의 시선을 끌고자, 장전되어 있는 쇠뇌를 들어 올려 놈의 가슴팍을 향해 발사했다.

이리저리 날뛰는 바람에 급소를 노리기는 힘드니, 그나마 최선의 선택지였다.

“어림도 없다!!! 이 따위 조잡한 것들보다, 피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마!!!”

좋아...! 내가 쏘아낸 볼트는 방패처럼 들어 올려진 수레바퀴에 가로막혀 버렸지만, 일단 놈의 시선을 끄는 것에는 성공했다.

곧장 들어 올려진 갈란의 수레바퀴가, 알렉시스 공녀의 방패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콰앙—!

“꺄악?!”

알렉시스 공녀의 놀란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의 수레바퀴가 아가일의 밀랍으로 강화된 방패에 가로막힘과 동시에, 아가일의 밀랍이 놈의 손을 타고 휘감겼다.

갈란의 움직임이 잠시나마 멈추었다. 나는 곧바로 숏 소드를 역수로 쥐고, 놈의 사지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로빈! 지금!”

“흐럅!”

재빠르게 땅을 미끄러지며 지나간 로빈의 단도와 내 숏 소드의 날이, 갈란의 발목 힘줄을 보기 좋게 가르고 지나갔다.

...이거, 어째 어디서 본 것 같은...

“어어...!”

비틀거리며 땅을 짚은 갈란이, 곧장 나를 향해 수레바퀴를 휘둘렀다. 마치, 이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끝이다!!!”

“이 씹...! 좆됐...!”

개 좆됐다...!

나도 모르게 팔이 들어 올려지고, 눈이 질끈 감겼다.

파앙—!

“...어?”

왜 안 아프지?

슬며시 감겨있던 눈을 떠 보니, 내 코앞까지 다가온 수레바퀴가 무언가에 휘감겨 멈춰 있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마치 번개처럼 파지직 거리는 그것은...

“...채찍?”

채찍. 갑자기 뜬금없이 채찍이...

“설마.”

나는 다급하게 몸을 뒤로 날리고, 고개를 돌려 채찍이 휘감겨 온 곳을 바라보았다.

“줄곧, 의심해왔다.”

낯익은 목소리. 낯익은 체형. 낯익은 얼굴.

“내가 과연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지. 혹여, 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배 부분이 피로 물든 사제복을 걸친 로이먼이, 불길과 연기 속에서 굳건하게 서 있었다.

“...로이먼?”

온몸에 붉은 번개를 휘감은 로이먼이, 갈란의 팔을 휘감은 채찍을 한차례 잡아당겼다.

그러자, 로이먼의 몸에 둘러져 있던 붉은 번개가 채찍을 타고, 갈란에게 쇄도했다.

파지지지직—!

“크아아악!!!!!!”

“이제부터, 나만의 정의를 실현하겠다.”

순식간에 통구이가 되어버린 갈란이 비명을 지르고, 곧이어 로이먼이 채찍을 잡아당기며 자신의 몸을 날렸다.

콰앙!

안면에 정확히 꽂힌 로이먼의 주먹으로 인해, 갈란이 저 멀리 튕겨져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네놈의 목숨을 원하신다.”

그리 말하며 주먹을 한차례 털어낸 로이먼은, 늘어져 있던 채찍을 다시금 휘감아 손으로 둘러매는 것이었다.

오른손에는 플레일이, 왼손에는 붉은 번개로 이루어진 채찍이 들렸다.

“그러니, 순순히 바치도록.”

신의 뜻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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