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58. 종언
* * *
“빨리빨리 움직여!”
“이러다 뚫리겠어!”
“좋아! 앞다리는 묶어뒀다! 다들 공격해!”
괴상하게 돋아난 뿔로 머리가 뒤덮인,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물을 상대하는 모험가 무리들.
“쳇... 금 뱃지 모험가 라더니, 한 마리 잡는데 얼마나 걸리는 거야?”
그런 그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베키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오스틴의 경고를 들은 덕에 미리 실력 있는 모험가를 수배했지만, 들인 돈에 비해 실력이 형편없는 것 같았다.
오스틴이었다면, 벌써 두 마리는 잡았을 텐데.
‘그래도, 갈란이 직접 나타나지 않은 게 어디야.’
도박장을 비롯한 다른 사업장들은, 다행히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끽해야 저런 마물이 한 두 마리 나타난 정도였으니. 미리 고용한 모험가들로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멀찍이서 모험가 무리를 보고 있자니, 저 멀리서 다가온 조직원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보스. 약방에 나타난 마물은 성공적으로 토벌했다고 합니다.”
“...잘 됐네. 다른 사업장의 상황도 보고해.”
“알겠습니다.”
약방은 마약을 제조하는 지하 사업장을 뜻하는 은어로, 베키의 사업장 중에서도 높은 수익률을 자랑하는 효자 돈벌이였다.
도시 곳곳에 숨겨져 있는 사업장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이 정도는 금방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유통책이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것보다...’
“갈란이 시장 한복판에 나타났다고?”
“그렇습니다.”
“캬하...!”
베키는 조직원들 앞에서도 드물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쾌재를 불렀다. 상인 조합장 이랍시고 시장을 휘어잡곤, 사업장을 뒤집어엎겠다며 건방지게 협박하던 그 빌어먹을 노친네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될 것이다.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갈란과 오스틴 일행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면, 필시 멀쩡히 남아나는 것이 없을 터. 피해를 입은 상인들은 아마 상인 조합에 따지고 들겠지. 왜 미리 방비를 해두지 않았냐며.
상인 조합은 저절로 힘이 약해질 터이니, 그 틈에 상인들에게 접근해 포섭하고,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면 된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던가? 그 말이 꼭 들어맞는군.”
“예. 그리고, 오스틴과 그의 동료들이 맞서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베키는 표정을 살짝 굳히며, 오스틴과 갈란의 싸움이 어떻게 흘러갈지 곰곰이 생각했다.
오스틴과 갈란의 싸움. 오스틴이 조금 빠져 보일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용사 파티에 당당히 들어갈 정도의 실력을 갖춘 실력자다.
오스틴의 주특기는 대인 전투. 한 때 오스틴의 싸움 실력을 보고 조직원으로 영입하려 한 적도 있으니, 베키 역시 오스틴의 전투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군단장이다. 그것도 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로 마탑에서 쫓겨났다는 그 미치광이 갈란. 물론, 소문의 출처가 불분명하기에 큰 신뢰는 가지 않는 소문이었다.
“...뭐, 같이 있던 동료들도 나름 한 가닥 하는 것 같았으니, 괜찮겠지.”
베키는 되도록이면 오스틴이 무사히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방금 막 쓰러진 마물을 향해 칼을 꽂아 넣고 있는 모험가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그 뺀질이 오스틴이라면, 아마 별일 없을 것이다. 아마도.
* * * * *
“로, 이먼...?”
로이먼이 살아있다. 처참하게 찢겨 나갔던 몸뚱이가 멀쩡해진 상태로, 저렇게 서 있다.
분명히 숨이 끊어진 걸 확인했는데. 내가 몇 번이고 맥을 짚었는데.
로이먼은 확실히 죽었었다. 심장 박동도 뛰지 않았고, 방금 막 죽은 시체 특유의 탁 풀린 눈동자도 내 두 눈으로 직접 봤었고, 숨도 쉬지 않았다. 분명히 그랬을 텐데.
“로이먼 사제...?”
“로이먼 사제님!”
“흐에...? 사제님?!”
로빈과 루나, 알렉시스 공녀 역시, 분명 죽었던 로이먼이 멀쩡히 서 있는 모습에 당황스러워했다.
“아니, 너 어떻게...”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내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있자, 갈란이 날아간 방향을 노려보고 있던 로이먼이 이쪽을 돌아보며 활짝 웃어 주었다.
“형제님. 정의는 죽지 않습니다.”
“뭔 개소리야, 병신아...”
순간 벅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내고, 로이먼의 상태를 훑어보았다.
로이먼에게 당했던 배 부위의 커다란 상처는 물론이요, 잔 상처 조차 없이 깨끗하다. 물론, 여기저기 찢어지고 피에 물든 사제복은 어쩔 수 없지만...
“어떻게 된 거야? 어? 너 분명히 죽었잖아!”
“맞아요! 로이먼 사제님이 쓰러지셔서, 선배님이 얼마나 화가 나셨는데...”
로빈 역시 로이먼이 돌아온 것에 화색을 띄우며, 쉴 새 없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저 말을 들으니, 로이먼이 쓰러지고 나서 갈란에게 지랄 발광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화악 뜨거워졌다.
시발... 진짜 개 쪽팔리네.
“여러분들께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로이먼은 말끝을 흐리며, 저 멀리 잔해 속에서 다리를 부들거리며 일어서는 갈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전에, 끝을 봐야겠지요.”
“...그래.”
몸에 붙은 잔해를 부스스— 떨구며 비틀거리던 갈란은, 반쯤 무너져 내린 건물의 외벽을 붙잡고 우리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쿨럭! 크흐...!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로이먼의 채찍에 휘감겨 있던 갈란의 오른팔은, 휘감겨 있던 채찍의 흔적을 따라 마치 불에 탄 듯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다른 상처들은 금방 살이 돋아나고, 뒤틀린 뼈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으나, 유독 로이먼의 채찍에 닿은 부분만 눈에 띄게 재생이 느렸다.
이윽고 완전히 멀쩡해진 몸을 일으킨 갈란은, 오른손으로 수레바퀴를 들어 올리며 우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대체... 대체 그 힘은 뭐냐! 대체 뭘 하면,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느냔 말이다!!!”
갈란이 입가로 피를 흘리며 외쳤다.
“나는 모든 걸 포기했건만...! 이 힘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삶도, 내 인간성도, 모든 걸 포기했건만!!!”
아마 억울하겠지. 자신은 인간이길 포기하며 모든 걸 버리고 겨우 힘을 얻었건만, 로이먼은 한 번 죽었다 살아나더니 정체 모를 강력한 힘을 얻었으니.
“이보다 불공평할 수는 없다! 이건 말도 안 된단 말이다!!! 이게 너희들이 바라는 정의로운 세상이냐!!!”
갈란의 처절한 울부짖음에, 로이먼이 얼굴을 굳히며 오른손에 들린 플레일을 꽉 움켜쥐었다.
“그분의 힘을 욕보이지 마라!”
순간, 로이먼의 몸이 번개같이 움직이며 갈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
“설교는 필요 없다! 정녕 그분의 진정한 힘을 모르겠다면, 몸으로 가르쳐 주겠다!”
콰앙! 쾅! 쾅!
붉은 번개를 두른 로이먼의 플레일이, 갈란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쳤다. 갈란은 그저 수레바퀴를 들어 올려, 로이먼의 공격을 막아내기 급급했다.
수레바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로이먼의 공격을 가로막던 갈란은, 별안간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수레바퀴를 빠르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기이이잉—!
저건...!
“로이먼! 피해!!!”
새빨간 피가 로이먼에게 쏘아지려는 찰나, 플레일이 들린 로이먼의 오른팔이 옆으로 확 빠지더니, 그대로 갈란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콰드득!
“크아악...!”
어깨를 강타당하는 바람에 갈란의 수레바퀴가 미끄러졌고, 그 덕에 갈란의 수레바퀴에서 쏘아진 혈포가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이 미친...!”
“꺄아악!”
당연하게도, 우리 쪽으로도 쏘아졌다.
아가일과 알렉시스 공녀의 목덜미를 붙잡고 고개를 숙이니, 갈란의 혈포가 우리의 머리 바로 위를 지나쳐 갔다.
“로빈! 루나! 우리도 가세해야 해!”
“네!”
“아, 알겠다!”
“나도 도울게!”
각자의 무기를 거머쥔 우리는, 아가일의 도움을 받아 이리저리 방향을 잃고 날뛰는 혈포를 피하며 갈란과 로이먼을 향해 달려갔다.
“신! 그놈의 가증스러운 신!!! 신이 있다면, 내가 겪은 부조리한 일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아라!!!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쾅!
로이먼의 플레일에 몸 이곳저곳이 찌그러지던 갈란은,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플레일의 추를 손으로 움켜쥐고 수레바퀴를 휘둘렀다.
로이먼 역시 놈의 수레바퀴를 붙잡으며, 피눈물을 흘리는 갈란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니! 네놈들이 믿는 신이, 그런 부조리한 일들조차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정녕 그것을 신이라고 칭할 수 있느냐! 대체 악마와 다른 것이 뭐지!!!”
“그 입 다물라!!!!!!”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는 갈란의 발언에, 분노한 로이먼이 인정사정없이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놈아!!! 우리도 맞는다고!!!”
우리는 이리저리 휘둘리는 성난 로이먼의 채찍을 힘겹게 피하며, 갈란을 향해 합공을 시도했다.
“이까짓 거...!”
“놓치지 않는다—!”
우리의 공격을 막아내려는 갈란의 시도는, 수레바퀴에 둘둘 휘감긴 로이먼의 채찍과 아가일의 밀랍에 가로막혀 무산되었다.
지금이 기회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의 끝을 낼, 절호의 기회.
수레바퀴를 움직이지 못함에도, 놈은 남은 팔 한쪽으로 필사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여기서 쓰러질 수 없다...! 내 원대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크으윽...! 로빈! 루나! 목을 노려!!!”
내가 놈의 한쪽 팔을 힘겹게 붙들고 외치자, 루나의 창과 로빈의 단도가 갈란의 목을 향해 내질러졌다.
“커헉...! 그르르륵...”
목을 찔린 갈란은,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올려 꿰뚫린 목에서 흐르는 피를 가로막기 시작했다.
갈란의 팔이 자유롭지 못한 틈을 타서, 나는 곧바로 상체를 숙여 놈의 오금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오금이 깊게 베인 갈린의 몸이 절로 허물어졌다. 로이먼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놈의 뒤통수를 붙잡아 땅으로 내리쳤다.
상처를 수복한 로이먼이 발버둥 치지 않도록, 나와 루나, 로빈은 쓰러진 갈란의 팔다리를 붙잡고 온 힘을 다해 짓눌렀다.
아가일의 밀랍이 갈란의 사지를 여러 겹으로 단단하게 고정시키며, 놈이 손가락 하나 꼼짝 못 하도록 마무리를 지었다.
“헉...! 허억...!”
“서, 선배님... 우리...”
“이겼다!!!”
놈이 마지막까지 꼭 붙들고 있던 수레바퀴마저, 점차 빛을 잃고 꺼져가고 있었다.
길고 치열했던 싸움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