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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60화 (60/106)

〈 60화 〉 59.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 * *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밀랍과 함께 하얗게 굳은 팔다리는, 온 힘을 다했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리석은... 아니, 어리석었던 갈란은,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끝이구나, 하고.

광폭화 상태를 유지하느라 피를 모조리 소모해버리는 바람에, 지금의 몸상태로는 전투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기껏해야, 지금 입은 상처를 죽지 않을 정도까지만 재생시키는 정도.

하지만, 하지만.

“윽... 으윽...!”

분노와 증오로 타올랐던 붉은 피눈물이 멎고, 애써 참아왔던, 진심이 담긴 투명한 눈물이, 붉은 눈물자국을 덮어쓰며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내와 딸,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님을 향한 염원이 담긴,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고 맑은 눈물이, 흐른다.

“내, 내가...”

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데.

내가 어떤 심정으로, 도망치듯 마탑을 빠져나왔는데.

내가 어떤 심정으로, 복수를 다짐했는데.

내가 어떤 심정으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며 마왕군에 들어갔는데.

하지만, 억지로 누르고 누른 말들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노력해 왔고, 잠을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혈마법에 대해 연구하고, 쉬지 않고 달리며 겨우 힘을 얻어서 이 지경까지 만들어 놓은 결과가, 고작 이런 한심한 결말이라니.

“서, 선배님... 우리...”

“이겼다!!!”

문득 들려오는 기쁨에 찬 목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자신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뻐하는 적수들이, 적수였던 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이렇게 누워있는데. 모든걸 잃고도, 나락으로 떨어지고도, 그보다 더 아래인 심연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는데.

저들은 그게, 내가 패배했다는 사실이 그리도 기쁘단 말인가.

“흐흐...”

화는 나지 않았다. 그저, 헛웃음만이 나왔다.

패배했다. 모든 힘을 쏟아부었건만, 이 자리에서 다 같이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했건만, 바닥에 눕는 것은 저들이 아닌 나였다.

이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내와 딸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그냥, 그냥 이대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오른손에 들린 채 밀랍과 함께 굳어있는 수레바퀴를 눈에 담았다.

혈석을 깎고 이어 붙여 만든 수레바퀴는,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이 꺼지듯 점차 빛을 잃고 있었다. 마치, 뜨겁게 불타오르던 갈란의 생명이 점차 사그라들듯이.

그렇게, 천천히 눈을 감으려던 그 순간.

“이야~! 역시 오스틴 경이십니다! 아주 대단하십니다!”

역겨운 이들의 목소리가, 갈란의 귀를 따갑게 찔렀다.

* * * * *

“정말이지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용사님의 파티원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하하하!”

...뭐지? 이 새끼들은?

이것이, 전투가 끝난 후 뜬금없이 튀어나온 배불뚝이 아재와 빼빼 마른 아재 두 명에 대한 나의 감상이었다.

내가 그 둘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자, 앞장서서 걸어 나오던 뚱뚱한 남자가 몸에 꽉 끼는 로브를 한 차례 펄럭이더니, 갈란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떽—!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크흠... 그나저나, 갈란! 네 이놈! 그렇게 많은 피를 손에 묻히고도,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고고한 마탑의 흠집이로다!”

“암! 그렇고말고! 이런 자가 마탑주를 맡았다니... 세상이 말세로다! 감히, 마나 코어도 없는 비천한 자가...”

“...?”

뚱땡이와 비실이의 손가락질을 받은 갈란은, 대번에 얼굴을 잔뜩 구기며 마치 악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나저나, 진짜 뉘 집 자식새끼들이길래 이렇게 싸가지가 없지? 살다 살다 이런 경우 없는 새끼들은 처음 봤다.

저게 마나 코어 없는 사람 앞에서 할 소리냐?

“너 이 씹년들은 누구길래...”

“으흠. 실례합니다만, 두 분은 누구신지요?”

순간 욱해서 육두문자가 나오려 하자, 알렉시스 공녀가 재빨리 내 말을 틀어막고 끼어들어 주었다.

“음? 그쪽은...”

알렉시스 공녀를 향해 눈길을 돌린 뚱땡이와 비실이는, 그 짧은 순간에 좆같은 눈으로 알렉시스 공녀의 몸을 핥듯이 슥— 훑어보았다. 내가 다 봤다.

아니, 이 미친년들이...

“...?”

...내가 왜 화가 나는 거지? 알렉시스 공녀님이 내 마누라도 아닌데...아무튼.

잠시 알렉시스 공녀를 마주 보던 이들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어느 가문의 영애분 이신지...”

“알렉시스 공작 가문의 장녀, 오르엔 알렉시스입니다.”

“아, 아하하...! 알렉시스 공녀님 이셨군요! 으흠...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희는 중앙 마탑의 게이트 관리사, 닐과 로슨입니다.”

중앙... 중앙 마탑의... 게이트 관리...

“...아.”

하긴, 갈란과 헌틀리가 둘 다 걸어서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고, 아마 둘 중 하나는 게이트를 열어서 넘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중앙 마탑에서도 이를 감지하고 수습할 인원을 보낸 거겠지.

근데, 얘들 봐라?

여태 뭐 하다가 이제서야 기어 나와서, 이렇게 이죽거리는 건지.

“...저기요. 근데, 왜 일이 다 끝난 상황이 되어서야 기어 나오신 겁니까?”

내가 삐딱한 태도로 묻자, 닐과 로슨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기, 기어 나오다니요! 그런...”

“보아하니 방금 도착하신 것 같지도 않고... 저희 싸우는 거... 아니, 말 까도 되죠? 우리 싸우는거 구경만 하고 있던 거 아니냐?”

내가 강하게 나오자, 알렉시스 공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아마 알렉시스 공녀도, 내심 저 둘이 꼴불견이었겠지.

“그, 그건 아니...”

“아니, 뭐... 아니면 말고. 도둑이 자기 입으로 도둑이라고 하겠어?”

“크윽...!”

내 비아냥을 들은 닐과 로슨이 입술을 깨물고 나를 노려보긴 했지만, 뭐. 어쩔 건데. 씨발 용사 파티원이라는 신분은 무적이라고.

“표정이 왜 그래? 꼽냐?”

“아, 아뇨! 하하... 그런 것이 아니라... 저... 으흠! 아무튼!”

내 갈굼을 받아내며 땀을 뻘뻘 흘리던 둘은, 헛기침을 하며 갈란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갈란을 토벌하셨군요! 너무나도 훌륭하셨습니다! 비록, 아직 숨통이 붙어 있긴 하지만... 그건 저희가 마무리 지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 말하며, 아직 내 허락도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닐과 로슨은 각자의 지팡이를 꺼내 들고 갈란을 향해 다가갔다.

“아니, 선배님. 저 둘은 누구길래 저렇게 죽이고 싶게 행동하는 거죠?”

“오스틴. 죽여도 되나?”

“...아니, 얘들아. 좀 진정해봐.”

로빈과 루나가 눈을 번뜩이며 무기를 꼬나쥐었지만, 나는 그녀들을 말리며 닐과 로슨을 지켜보았다.

바닥에 누운 채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갈란의 지척까지 다가간 닐과 로슨은, 곧바로 갈란을 죽이지 않고 지팡이로 갈란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크헤헤... 이 멍청한 놈. 마탑이 그리 우스웠더냐?”

“마나 코어도 없는 반푼이가, 감히 마탑주의 자리를 넘봐? 주제를 알아야지! 크흐흐...”

“으극...!”

놈들의 조롱에도, 갈란은 이미 화를 낼 기운도 다 빠졌는지, 이를 악 물고 둘을 노려 볼 뿐이었다.

그런 갈란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인지, 갈란의 몸을 툭툭 건드리던 닐이 발을 들어 올려 갈란의 머리를 짓밟기 시작했다.

“너 같은 벌레가 주제넘는 짓을 하니, 이런 꼴이 된 거다.”

“크윽...!”

뒤룩뒤룩 살이 찐 몸뚱이로 무게를 실어서 밟고 있으니, 갈란 역시 힘겨운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갈란은 놈들을 노려보는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분노에 차오른 눈. 방금까지만 해도 꺼져가던 눈이, 다시금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야. 좀 꺼져봐.”

“예? 아, 음... 그럼...”

나는 닐과 로슨을 자리에서 물리고, 갈란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갈란. 저 뺀질이 새끼들이랑 아는 사이냐?”

“...오스틴.”

잠시 말을 끊은 갈란은, 처연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 둘을... 내 손으로 죽이고 싶다. 내 마지막, 소원이다. 제발... 제발 부탁한다.”

“...역시, 아는 사이 구만.”

“나를 마탑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아내와 딸을 죽이는 것에 동조했던 마법사들이다... 제발... 제발...!”

내게 애원하는 갈란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아닌 투명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것만 들어준다면, 나를 죽여도 상관없다...! 광장에 매달아 놓고, 돌을 던지게 해도 좋다! 그러니, 제발...!”

“네가 지금, 무슨 수로 저 새끼들을 죽일 건데.”

“아...”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은 듯, 갈란이 입을 다물고 땅을 내려다보았다.

메마른 돌바닥 위로, 갈란의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나는.

“...갈란. 나는, 더 이상 네 손에 피가 묻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천천히 검집에 집어넣었던 숏 소드를 꺼내어 들고, 몸을 일으켰다.

“네가 말했지. 너는 지키기 위해 싸워왔지만, 나는 죽이기 위해 싸워왔다고.”

이보다 맞는 말이 또 있을까. 그래. 나는 죽이기 위해 싸워왔다. 한평생을.

“이런 일은, 죽이기 위해 싸워온 놈한테 맡겨라.”

* * * * *

“끄르르륵...! 오... 오스틴... 경...!”

“커헉...! 어... 째서...!”

오스틴의 칼에 의해 베어 넘겨진 닐과 로슨이, 잠시 목을 부여잡다가 이내 풀썩 쓰러졌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갈란은 눈을 감았다.

...통쾌한가?

아니. 통쾌한 기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처럼, 갈란을 배신했던 주동자들의 살가죽을 벗겨 죽였을 때처럼, 복수심으로 가득 찼던 마음이 그대로 비어 있을 뿐.

‘...갈란. 나는, 더 이상 네 손에 피가 묻지 않았으면 한다.’

오스틴의 말에 담긴 의도를, 갈란은 알고 있었다.

곧 아내와 딸을 만날 테니, 마지막만큼은 궂은일로 손을 더럽히지 말라는... 작은 배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저주스러운 삶을, 지독히도 길었던 삶을 끝낼 때가.

아마 이대로, 심장이 꿰뚫리겠지.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빌어먹을 마왕군의 군단장이니까.

“후우... 갈란.”

기어코, 놈들의 시체를 확인 사살하던 남자가 다가왔다.

오스틴. 마나 코어가 없는, 자신과 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지킬 힘이 있는 자.

갈란을 부른 오스틴은 어째서인지, 맑고 푸르게 빛나는 그 눈으로 갈란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한참 동안 눈을 마주하던 오스틴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봐, 갈란.”

“......”

“갈란.”

“...왜, 부르나.”

“이제, 통쾌하냐?”

“...아니. 그저...”

그런 오스틴을 향해, 갈란은 눈물을 흘리며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다 내려놓고 싶다...”

방금 그 두 놈이, 갈란을 배신했던 마지막 마법사들이었으니. 더 이상 삶에 미련은 없었다.

“...오스틴. 그거 아나?”

“...뭔데.”

그런데, 어째서 자꾸 눈물이 흐르는 걸까. 분명 미련은 없을 텐데.

자꾸만 화가 나고, 이 세상의 부조리함에 분노하게 되고, 아내와 딸의 죽음에 화가 나서... 그래서...

“나도, 이리되고 싶진 않았다.”

나도 이리되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된 것에 화가 나서.

“나, 나도... 나도 평범한 가정의 아버지이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나, 오스틴...! 대답해 줘라!”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뺨을 타고, 빨간 피눈물 자국을 타고. 하염없이.

“아내와 딸이 그리워서... 이제 다 끝났는데...! 놈들을 다 죽였는데...! 그럼에도, 아직 삶에 미련이 남는다...! 미칠 것 같다, 오스틴! 대체 어째서냐! 너는 나와 다른 삶을 살아왔으니, 알 것 아니냐!”

“...갈란. 나는...”

“내가 너희들에게 소리쳤던, 그 웃기지도 않는 사명 때문이냐! 나는...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왜 죽고 싶지 않은 거지...! 이제야 아내와 딸을 만날 수 있는데...!”

시야가 뿌옇게 변한 갈란의 눈앞에서, 흐릿하게 변한 오스틴이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갈란. 내가 용사와 함께 이곳저곳을 누비던 시절,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어.”

오스틴은, 더러운 피가 묻은 숏 소드를 꼼꼼히 닦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용사의 세계에서는, 이런 말이 있대.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바다는... 비에...”

“그래. 그게 대체 무슨 뜻일까... 몇 년 동안 생각을 해 봤었는데. 지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오스틴이 하는 이야기는, 어째서인지 갈란의 마음의 짐을 하나씩 내려 주고 있었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아마 큰 것에는 작은 것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런 상투적인 의미겠지. 하지만...”

그리고 갈란은, 문득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갈란. 나는 네가 바다처럼, 사소한 일들 에는 아무렇지 않아했으면 한다. 물론, 네가 겪은 일들은 사소한 일들이 아니겠지만, 지금은... 지금만큼은 말이야.”

어느덧 오스틴의 눈도, 촉촉하게 젖어 들어 있었다.

“마지막만큼은... 네 아내와 딸을 품어줄 수 있을 만큼 넓고 깊은... 그냥, 바다가 되어주면... 안 될까?”

“아... 아아...”

바다.

넓고 깊어서, 아무리 비가 내려도, 설사 폭풍우가 몰아쳐서 거친 파도가 일 지언정, 그 깊은 곳은 고요한. 그런...

그곳에, 소중한 이들을 간직하자. 아무리 폭풍우가 몰아쳐도, 고요한...

갈란은 그제야, 아내와 딸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

“...이제, 쉬고 싶다. 오스틴.”

“...알겠어.”

잠시 갈란을 바라보던 오스틴은,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푸욱—

오스틴의 차가운 옥빛의 검이, 갈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아, 아...”

리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이 많아요. 린다. 아빠가, 곧...

“바... 다...”

서서히 감기는 갈란의 눈에 마지막으로 아른거린 것은, 해변에서 뛰노는 아내와 딸의 모습이었다.

언제나 폭풍우가 몰아쳤던 사내는, 그렇게 바다가 되었다.

바다 저 깊은 곳에, 아무리 날씨가 궂어도 고요한 곳에, 사랑하는 이들을 품고서. 그렇게, 하염없이.

그저 하염없이, 꼭 안아 주는 것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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