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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61화 (61/106)

〈 61화 〉 60. 말의 이면

* * *

쿠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대한 산처럼 버티고 서있던 시체 거인이, 절대로 쓰러트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시체 거인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축축한 진흙을 튀기며 쓰러졌다.

성검과 별의 기사의 공격으로 인해, 시체 거인의 상체는 하얗게 불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단일 영혼을 매개체로 한 언데드도 아니니, 다시 부활시킬 수도 없는 노릇.

“...흠.”

이건... 예상외의 전개로군.

헌틀리는 얼굴을 굳히며, 어깻죽지부터 잘려나가 거무죽죽한 피를 흘리는, 오른팔이 있어야 할 자리를 손으로 짚었다.

“이제 끝이야. 헌틀리.”

용사와 별의 기사를 한꺼번에 상대하려던 과욕이 불러온 참사. 변명의 여지가 없다.

헌틀리는 패배했다. 뜬금없이 성검의 힘을 발휘하게 된 용사에 의해.

“대단하군 그래, 용사. 그 시체 거인을, 내 대부분의 힘을 쏟아부은 일생일대의 역작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다니...”

“...그러게. 나도 지금, 나 자신이 놀라워.”

용사는 결국 한계를 돌파하고, 성검의 진정한 힘을 이끌어 냈다. 예고도 없이, 아주 짧은 시간에 머리를 짓누르던 천장을, 몸을 가두고 있던 상자를 깨뜨려 버렸다.

“과연. 내가 너무 오만했군.”

그런 헌틀리에게 다가오던 용사 일행은, 일순간 갑작스레 올라오는 구역감에 너나 할 것 없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우웁..?!”

가슴속에 무언가 박혀있는 듯한, 마치 목에 가래가 잔뜩 낀...

“카학! 쿨럭! 쿨럭...!”

철퍽—!

마침내 답답한 속을 꽉 막고 있던 것이 입 밖으로 나오고, 헌틀리는 그것을 목격한 순간 제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갈란이, 패배했나.”

거무죽죽한 액체를 뒤집어쓴 채 녹아내리는 그것은, 그녀들의 마나 코어에 자리 잡고 있던 불신의 씨앗.

정신체인 갈란이 사망했으니, 주인을 잃은 그것들은 스스로 산화하여 체외로 내보내진 것이었다.

“콜록! 콜록! 크흐...!”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를 향해 다가온 별의 기사는, 손을 뻗어 아직 따듯한 그것을 어루만졌다.

“...이런 벌레를 심었나. 과연, 어째서 이 아이들이 오스틴에게 험한 짓을 저질렀는지... 이제야 알겠군.”

그리 말하며 조용히 자신을 노려보는 별의 기사를 마주 보던 헌틀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심은 것은 아니다.”

“크흐...! 됐어요! 이제 끝을 봐야 합니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헌틀리에게, 입가를 닦던 이사벨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섭리를 거스르는 언데드에게는 죽음뿐입니다! 당신의 손에 죽어나간 무고한 이들에게, 죽어서도 속죄하세요!”

언데드. 죽음이라는 문을 건넌 뒤에, 잠긴 문을 억지로 부수고 돌아온 저주받은 존재.

“...푸흡.”

헌틀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봐도 희생자들을 조롱하는 듯한 태도에, 이사벨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철퇴에 빛을 둘렀다.

용사가 성검을 사용한 이후로, 이사벨 역시 신성력이 증폭된 것이 느껴졌기에, 그녀는 헌틀리를 일격에 끝낼 자신이 있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

“내가, 언데드라고?”

“당신이 언데드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이제 그만...!”

팍!

분노한 이사벨이 철퇴를 높이 들어 올린 순간, 주인 모를 손 하나가 지면을 뚫고 바깥으로 나왔다.

“...응?”

“...뭐야.”

주변의 시체들을 마무리하고 다가온 아드리엔과 마야는, 헌틀리의 앞에 튀어나온 그 손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겁고 눅눅한 흙을 파헤치고 나온 이름 모를 이의 손이, 무언가를 찾는 듯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본 적이 없다.”

헌틀리는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왼팔을 움직여, 땅을 뚫고 튀어나온 주인 없는 팔을 쑤욱 뽑았다. 찢어진 살점과 근육이 덜렁거리는 팔을 들고, 그대로 오른쪽 어깻죽지로 가져가는 헌틀리의 기행에, 용사 파티는 곧바로 각자의 무기를 겨누었다.

“개소리하지 마!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순순히...!”

꾸드득—! 하며 헌틀리의 오른팔이 잘린 단면과 맞물린 주인 없는 팔은, 이내 혈색이 돌며 헌틀리의 움직임에 따라 까딱이기 시작했다.

“너, 너...?!”

“이게 무슨...”

경악에 찬 용사 일행을 바라보던 헌틀리는, 눈앞에 꽂힌 삽자루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방금 기워 넣은 오른팔로 처음으로 느낀 감각은, 차갑고 묵직한 삽자루의 감촉이었다.

“죽은 적이 없으니, 언데드 또한 아니지. 잘못 알고 있었군.”

언데드가 아니다. 헌틀리의 충격적인 발언에, 용사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거, 거짓말! 당신이 언데드가 아니라면, 방금 그 기행은 어떻게...!”

“칫...! 확실히 마무리를 짓는 건데!”

“에이씨! 별 쓸데없는 얘기 듣다가 생고생하게 생겼네!”

당장이라도 목을 내려치려는 용사 일행과 별의 기사를 향해, 삽을 지지대 삼아 간신히 몸을 일으킨 헌틀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 경계하지 말아라. 마지막 가는 길, 선물 하나 줄 터이니.”

일전의 전투로 인해, 비축해두었던 대부분의 영혼을 소진한 헌틀리는,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삽자루를 들어 올렸다.

“...선물?”

“용사. 놈의 감언이설에 넘어가면 안 된다. 지금 놈을 베어버려야...”

“...내가 보기엔. 곧 죽을 것 같은데.”

마야의 말이 맞았다. 용사와 그레이시의 경계가 무색하게도, 실제로 헌틀리는 더 이상 싸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갈란처럼 이렇다 할 신체 재생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미 죽은 자의 신체를 '빌려' 쓰는 행위로 생명을 연장해 온 탓에, 이미 몸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그 몸을 지탱해 줄 지지대인 영혼을 대부분 소진해 버렸으니, 헌틀리의 생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삽을 들어 올린 헌틀리는, 곧바로 땅을 향해 삽 머리를 내리 찍었다.

푹—! 하고 흙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헌틀리의 삽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직선으로 곧게 세워졌다.

그 순간, 지면에 박혀 있는 삽을 기점으로 청록색의 빛무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삽자루의 끄트머리로, 모이고 모인 청록색의 빛무리가 하나의 구체를 이루었다.

간신히 팔을 들어 올려 빛무리를 손에 얹은 헌틀리는, 이내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구체를 용사에게 건네어 주었다.

“내가 구속하고 있던 영혼들이다. 장의사가 사라졌으니... 용사, 네게 맡기마.”

“어, 음...”

갑작스레 순해진 헌틀리의 태도에, 용사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얼떨결에 구체를 받아 들었다.

“이사벨, 이거...”

“제가 책임지고... 편한 곳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 구체를 이사벨이 옮겨 받음으로써, 헌틀리에게 남은 짧은 유예 기간이 끝났다.

“그럼, 이제...”

곧장 성검을 들어 올린 용사는, 헌틀리의 심장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헌틀리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용사의 성검을 밀어 버리는 것이었다.

“죽은 자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과, 산 자들의 생명을 묻어 주는 것은... 내 일이었다.”

“무슨...”

“그리고, 나 자신을 묻어주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너희들이 할 일이 아니다.

내 영혼을 갈무리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다.

“언제나처럼.”

그 순간, 번쩍 들어 올려진 헌틀리의 오른팔이, 스스로의 심장을 꿰뚫었다.

“커헉...!”

헌틀리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용... 사. 마지막으로, 잊을 수 없을 말을... 새겨주지...”

영혼들을 정화시키는 이사벨을 바라보던 용사가, 고개를 돌려 헌틀리를 바라보았다.

“마왕은... 네 손으로 만든 존재다...”

“...뭐?”

영문을 모를 한마디에, 용사는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야!”

하지만, 그 물음에 정확한 설명을 해 줄 헌틀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힘없이 무너져 내린 헌틀리의 몸에서 떠오른 커다랗게 빛나는 영혼 마저,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을 타고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 * * * *

갈란의 시체를 수습하고 난 뒤,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로이먼의 정체 모를 힘은, 전투가 끝난 후 서서히 사라졌다. 로이먼은 그 힘에 대해 ‘믿음의 결실이다’라고만 말하는 바람에, 힘의 출처에 대해 알아내는 것은 진작에 포기했다. 그냥 신앙의 힘이라고 생각하자.

이 지랄판이 났는데도 여관이 문을 열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문을 열고 있더라. 하마터면 이 꼴로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베키에게도 얼굴을 한 번 비춰야겠지만, 오늘은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피로감이 머리 끝까지 쌓여있는 상태라고 해도, 한시라도 빨리 끝장을 봐야 하는 일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꿀꺽—!

나는 침을 크게 한 번 삼키며, 끔뻑 끔뻑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부릅 떴다.

“......”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있는 실비아... 그러니까, 아가일과, 의자에 앉아 그런 아가일을 내려다보는 루나 사이에서 묘한 한기가 감돌았다.

“어, 음... 일단... 우리 초면이죠? 아니, 초면은 아닌... 가?”

이걸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솔직히, 아가일의 정체가 까발려졌다고 해서 지금 당장 아가일의 모가지를 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아가일.”

하지만, 아무래도 루나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루나의 입장에서는 토사구팽 당한 꼴인데, 그 당사자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면...

“루나. 그렇다고 죽이진 말고.”

“......”

“...루나?”

...대답은 좀 해주면 좋겠는데. 혹시나 루나가 급발진해서 아가일의 목을 조르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봐, 아가일.”

“.....”

루나와 아가일의 시선이, 허공에서 강렬하게 맞부딪혔다.

“형제님. 조금 주무셔도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제가...”

“아냐. 너 혼자서는 못 말릴 것 같아서 그래.”

그래. 솔직히 이 둘이 이판사판으로 싸우게 되면, 이 방이 아예 박살이 날 것 같거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대답이 없는 아가일을 바라보던 루나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뻔뻔하군. 대답도 하기 싫다, 이건가.”

“...왜 반말하는 거야?”

“...뭐?”

저건 좀 쌘데. 아가일이 예상외로 강하게 나왔다.

“아니, 솔직히...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사과라도 해 주길 바랬어?”

아가일은 대놓고 뻔뻔한 태도를 고수하며,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있던 다리를 편하게 풀어 앉았다.

“이야... 로이먼, 무섭지 않니? 오줌 지릴 것 같다 야.”

“그건 좀...”

여자들의 기싸움이란... 알면서도 모르겠다.

“다, 당신이... 당신이 나를 버렸잖아!”

아가일의 뻔뻔한 모습에 루나는 화가 많이 났는지, 목소리까지 떨어가며 소리를 빽 질렀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당장이라도 아가일을 향해 달려들 것처럼 씩씩거리는 루나의 모습에, 아가일이 순간 몸을 흠칫하며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자기도 조금 찔리는 부분이 있다는 거겠지.

“그, 그건...”

그렇지. 그냥 사과하고, 오늘은 여기서 끝내자. 나 졸려 죽을 것 같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던 아가일은, 한결 풀어진 눈으로 루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 건데?”

“무릎 꿇고 사과해. 당장.”

으르렁 거리는 루나의 말투에, 아가일이 허둥지둥 무릎을 꿇었다.

“미, 미...”

그래. 계속 말해. 미안하다고. 내가 그때는 미친년이었다고...

“미...! 미친년아! 얻다 대고 창조자한테 반말이야!!!”

“이익...! 더는 못 참는다!”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아가일은 상상 이상으로 자존심이 쌘 모양이었다.

“로이먼! 아가일 좀 붙잡아!”

“이익...! 이거 놔라, 오스틴! 오늘 내가 하극상을 제대로 보여주겠다!”

“끝까지 반말이야! 너 혼나고 싶어?!”

“두 분 다 진정하십시오!”

아무래도, 일찍 자긴 그른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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