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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62화 (62/106)

〈 62화 〉 61. 내 말 좀 들어봐

* * *

문득 눈을 뜨니, 점심 시간대 특유의 나른하고 편안한 기분이 느껴졌다.

살짝 열려있는 창문 틈 사이로, 어젯밤 있었던 참사를 알리는 듯 희미하게 불에 탄 냄새가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고개만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점심이라도 먹으러 간 모양인지 여관방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

아니. 한 명 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꾸물 꾸물. 꿈틀꿈틀.

“...와. 뭐지?”

애벌레인가?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꽁꽁 둘러싼 채 내 옆에 꼭 붙어있는 동그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조금 춥다 싶더니만, 누군가 이불을 다 뺏어 썼으니 안 춥고 배기겠나.

“흐으... 흐...”

내 이불을 몽땅 빼앗고 잠들어 있는 정체불명의 누군가는, 가끔씩 이상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찔 거리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분명 이 방은 나와 로이먼이 자는 방이고, 여자들은 기껏 따로 방을 잡아 줬는데. 대체 왜 내 침대 위에서 자는 거니.

“...흠.”

일단, 깨우고 보자. 나는 어제 있었던 전투의 여파로 인해 비명을 지르는 팔을 힘겹게 들어 올려, 이불 애벌레를 붙잡고 흔들었다.

“야.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슬슬 일어나. 해가 중천에 떴어.”

“으흐... 뭐, 뭐야...”

이윽고 부화한 이불 고치 속에서, 푸른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뻗친 거렁뱅이 꼴의 루나가 눈가를 비비며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아. 루나였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제 루나와 아가일을 뜯어말리다가 졸음이 쏟아져 정신없이 잠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거의 한 시간 동안 뜯어말렸는데, 막바지에는 그냥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냅다 침대로 뛰어든지라, 지금의 상황은 내가 설명하기 어렵겠다.

다행히 뭐 하나 박살 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막바지에는 서로 지쳐서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조곤조곤 대화하기 시작했었으니까.

나는 뻣뻣하게 굳은 손을 들어 올려, 산발이 된 머리에 계속해서 눈이 찔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루나의 앞머리를 넘겨주며 루나를 깨우기 시작했다.

“빨리 일어나. 지금이 몇 신데 여태 자고 있어?”

루나의 어깨를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며 시계를 힐끔 바라보니, 시침은 벌써 1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요즘 늦잠 자는 게 버릇이 되는 것 같은데...

“으우... 조, 졸려어...”

나도 늦잠을 자긴 했지만, 어제 누구 때문에 새벽까지 잠을 못 잤는데. 나만큼은 정상참작을 해 줬으면 좋겠다.

“안 덥냐? 초여름에 그렇게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으면, 밤에는 몰라도 낮에는 더울 텐데.”

“하아암... 별로... 끄으응...! 으햑?!”

루나는 아직 비몽사몽 한 모양인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다가 곡소리를 내며 도로 몸이 허물어졌다.

아무래도, 루나 역시 어제의 전투로 인해 몸에 피로가 상당히 많이 쌓인 것 같았다.

“흐으읏...! 아흣, 허리가...”

어딘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몸을 일으키려던 루나는, 결국 일어나는 것을 포기한 채 내 다리 위로 무너져 내렸다.

“아니. 시발, 좀.”

“으으... 무리다, 오스틴... 허리가 너무 아파...”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 하면...”

누가 들으면 어젯밤에 격렬한 정사라도 치른 줄 알겠다. 나는 내 뺨을 탁탁 두들기고, 뻐근한 어깨를 휙휙 돌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가가 저절로 찡그려졌다. 나는 삐그덕 거리는 팔을 뻗어,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물컵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기분 좋게 목을 타고 넘어가고, 덕분에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후... 이제 좀 살겠네...”

째깍... 째깍...

다시금 조용해진 방 안에는, 규칙적으로 들리는 시곗바늘 소리와 루나의 색색 거리는 숨소리만이 고즈넉하게 울려 퍼졌다.

내 다리를 베고 누워있는 루나의 고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제 하루,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차가운 물을 들이켜 환기된 머릿속이, 다시금 어지러워 지는 것 같았다.

어제 그 게이트 관리사들은 어떡하지? 물론 죽이고 싶을 정도로 꼴 보기 싫긴 했지만, 진짜 죽일 마음은 없었는데. 갈란의 처연한 하소연을 듣고, 나도 모르게 감정에 휩쓸려 무심코 죽여 버리고 말았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중앙 마탑 소속이라면 수도인 메텔하임에 있을 텐데, 나는 지금 용사 파티를 관둔 상태다. 그곳에서까지 아직 용사 파티의 일원이라는 개 뻥카를 쓸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냥 갑질을 하는 거면 모르겠는데, 죽여 버리는 건 말이 다르다.

그러고 보니, 별의 기사 그 양반은 무사하려나? 분명 용사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말을 했었는데. 대체 뭐가 아쉽다고 나를 계속 쫓아오는 걸까.

“...나한테 그따위 푸대접을 할 땐 언제고.”

용사와 똘마니들을 생각하니, 절로 이죽거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지. 다시 생각해보면, 갈란과 헌틀리가 이곳에 있었잖아. 아가일도 용사에게 패배해서 겨우 도망쳐 왔다고 했으니, 나를 쫓아온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럼, 뜬금없이 갈란을 토벌하러 이곳으로 오는 길이었다고? 위치는 어떻게 알고? 차라리 줄행랑친 아가일을 쫓아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편이... 아니, 아가일은 하르만이 아니라 숲 한복판에 떨어졌다고 했다. 아가일을 쫓아왔으면 하르만으로 올 게 아니라... 참. 아가일은 중간에 우리와 합류했지? 그렇다면, 아가일을 쫓아왔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닌...

“아. 씨이팔...”

나는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탄식을 내뱉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그래도, 설마 마주칠 일은 없겠지.”

설령 용사 파티가 지금 이곳에 와 있다고 해도, 서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르만은 퀼른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기도 했고, 유동 인구도 많은 편이니까. 애초에 우리는 요양 좀 하다가, 몸이 멀쩡 해지는 대로 마차를 잡아 탈 생각이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보니, 내 다리를 베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루나의 모습이 새삼 배알이 꼴렸다.

나는 곧바로 루나의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으에에?! 아흐...! 아, 아프아...!”

“잠이 오냐? 어? 잠이 와? 너는 지금 눈이 감기냐?”

“가자기 애 그러느 거아...!”

“뭐라는거야. 너도 퍼질러 자기만 하지 말고, 일어나서 좀 씻어.”

쫀득하게 쭉 늘어나던 볼을 놓자, 빨개진 볼을 문지르던 루나가 무어라 궁시렁거리며 억지로 몸을 일으...

“으흐...! 역시, 안 돼... 허리가 너무 아프다아...!”

...키다가, 결국 다시 내 다리 위로 흘러내렸다. 하긴, 어제 갈란에게 창을 내지를 때 엄청나게 아크로바틱 한 몸놀림을 보여주던데, 몸이 멀쩡하면 사람이 아니다.

“이제 그만 씻고, 밥 좀 먹으러 가자. 다른 애들은 이미 밥 먹으러 간 것 같은데.”

“흐... 조금만 쉬다가...”

“아니, 나 슬슬 배고프거든?”

“으음... 물... 물 좀...”

...물은 아까 내가 마시고 남은 것 밖에 없는데. 어쩔 수 없지.

“자. 천천히 마셔.”

내가 반쯤 마시고 남은 물컵을 기울여 주자, 루나가 상체를 살짝 일으키더니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처럼 입을 살짝 벌리고 꼴깍꼴깍 물을 삼켰다.

차가운 물이 들어가니, 루나 역시 정신을 좀 차린 것 같았다.

“꿀꺽... 크흐... 더 없나?”

“어... 내가 이미 반 마셔버려서. 더 마시고 싶으면 떠 와야겠는데.”

“그럼 어쩔 수... 잠깐, 뭐?”

내 말을 납득하려던 루나가, 갑작스럽게 눈을 크게 뜨곤 나를 바라보았다.

“더 마시고 싶으면 물 떠 와야 된다고.”

“아니, 그전에...”

“...아. 이거, 내가 반 마셔버려서...”

내 말을 들은 루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왜, 왜... 왜 네가 마시던 걸 그냥 준 거냐!”

“아니, 뭘 새삼스럽게...”

“자, 잠깐... 나는 왜 오스틴과 동침을...”

같이 마차 타고 부대끼던 사이인데, 반응 한 번 유별나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기껏 여자들은 방 따로 잡아 줬더니, 왜 여기서...”

“돼, 됐다! 방금 그건 잊어라!”

“어, 응.”

먹을거 안 사줘서 삐진 로빈도 아니고, 루나는 얼굴을 휙 돌리더니 도로 내 다리를 베고 풀썩 누웠다.

“근데, 슬슬 일어나자니까? 나 배고프다고.”

내가 어깨를 살살 흔들며 재촉하자, 귀까지 빨개진 루나가 손가락을 조금 꼼지락 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조금만 더 이렇게...”

“아휴,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난 먼저 내려가서 뭐라도 먹고 올 테니까...”

“자, 잠깐만! 역시 같이...!”

내가 침대 바깥으로 몸을 일으키자, 루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내 허리춤을 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갑작스레 몸을 움직인 대가는 컸다.

“으힉?! 허, 허리...!”

“야, 야...! 잠깐! 시발 이거 좀 놓고...!”

벌떡 일어난 루나는, 허리를 붙잡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내 바지의 허릿단을 붙잡은 상태 그대로.

“엇...”

덕분에, 내 바지는 보기 좋게 발 끝자락까지 주르륵 흘러 내려갔다.

내 속옷 차림을 를 본 루나 역시, 아직까지 바지를 잡고 있는 상태 그대로 몸이 우뚝 굳었다.

시간이 멈춘 듯, 서로 몸이 굳어있던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선배님! 손님이 왔어요! 들어가도 괜찮죠?”

로빈. 아니, 시발. 로빈한테 이 꼴을 보여줄 수는 없는데.

“어, 어...! 잠깐 기다려!”

나는 허겁지겁 바지를 붙잡고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아직까지 바지를 붙잡고 있던 루나가 쑤욱 딸려 올라왔다.

“야! 이거 좀 놓으라고!”

“모, 몸에 힘이... 힘이 안 들어간다...”

“아니, 힘이 안 들어간다면서 손가락은 왜 꼭 붙잡고 있는데!”

이 미친! 아무리 손가락을 떼어 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도, 루나의 손가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끄아아악?!”

근육통으로 골골대던 나도 억지로 힘을 주니,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무너진 우리는, 루나가 내 위에 올라탄 모양새로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서, 선배님?! 괜찮으세요?!”

내 비명을 들은 모양인지, 문 바깥에서 로빈이 문고리를 철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 지금 열게요! 엽니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바지를 벗고 속옷 차림인 나. 그런 내 위에 올라타 있는, 머리가 이리저리 헝클어진 루나.

시발...! 빼도 박도 못 한다, 이거!

“아니야! 안 돼! 아직 열지 마! 열지 말라고!!! 열지 마아악!!!!!!”

벌컥—!

신도 무심하시지. 이미 방문은 로빈의 손에 의해 따인 뒤였다.

“서, 선배... 님...?”

나와 루나를 바라본 로빈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로빈의 옆에는, 익숙한 마법사 고깔모자와, 모자 옆으로 삐죽 튀어나온 고양이 귀를 쫑긋거리는 한 마법사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스틴?”

아니, 시발 왜 쟤가 여기에...

내 얼굴을 보고 잠시 화색이 돌았던 마야의 얼굴이, 무슨 길거리에서 발가벗은 변태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돌변했다.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야의 눈동자가, 나를 덮쳤던 그때처럼 좁아지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아니. 잠깐만.”

좆 됐 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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