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65. 안녕이라고 말해줘
* * *
“그렇게 돼서… 오스틴, 네가 갈란을 물리쳐 준 덕분에, 우리의 마나 코어를 좀먹던 벌레가 사라진 것이다.”
“…….”
“…혼란스럽겠지. 우리 또한 그랬으니까. 이런 말을 하면 염치없겠지만… 하지만, 제발 한 번만… 우리의 입장도 생각해 다오.”
“…좀. 닥쳐봐.”
“아, 알겠다….”
마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을 때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속이 답답하다. 내 목구멍의 너비와 똑같은 크기의 돌멩이로 목이 한껏 막혀 있는 기분이다. 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답답한 무언가를, 어서 빨리 삼켜버리거나 토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눈앞의 물컵에 정신없이 물을 따랐다.
꿀꺽꿀꺽….
탁—!
“후우우…….”
내가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은 술이 미치도록 당긴다. 방금 전 그레이시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잊어버릴 만큼, 아주 아주 독한 술이.
혹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손을 들어 올려 미간을 꾹꾹 짓눌렀다,
‘…아니. 거짓말은 아니야.’
조금 전 대화를 나눴을 때, 그녀들의 태도에 어색함이 없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솔직히,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개뼈다귀 쑤셔먹는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한 뒤 나가면 되는 일인데.
“이런 개 좆같… 하.”
사람이 너무 답답하면, 마치 화산이 분출하듯 마음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금의 내가 그랬다. 나는 답답한 마음을 토해내려 발악하는 내면의 소리를 거르지 않고 분출하였다.
“씨발… 별 병신 같은 게… 애미, 호랑말코 같은… 후우… 아!!!!!!”
우리만 있는 공간이 아닌 공공장소라는 것을 알면서도,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내지르고 싶었다. 이것 또한, 구태여 참지 않았다.
“하아… 하아….”
고함이라도 내지르지 않으면, 이렇게라도 분을 풀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기에.
“훌쩍… 흐윽… 흑….”
내가 지랄 발작을 하자, 조용해진 좌중에서 마야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시작했다.
너무 화가 났다. 아니, 시팔 대체 왜 화가 났냐고?
이 년들이 그 지경이 될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냥 내가 꼴 보기 싫은가 보다.’ 라고 생각했던 내가 병신 같았다.
그 일을 겪은 게, 왜 하필 나였는가. 그것에 대해서도 곧바로 답이 도출되었다.
마나 코어가 없었으니, 내게는 그 불신의 씨앗인지 뭐시기 인지를 심을 수 없었겠지. 듣자 하니, 그 벌레는 마나 코어에 기생하는 것 같았으니.
하지만, 무엇보다 제일 화가 나는 건.
너희들이 나에게 했던 짓들을, 고작 그런 편리한 이유로 어영부영 넘어가려 하는 것 같아서. 그 사실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너희들이 그렇게 나오면, 온전히 나 혼자 감당해야 했던 그 좆같은 일들은?
그래. 그녀들의 사정은 잘 알겠다. 아마 그녀들도 나름대로 억울하겠지.
하지만, 그레이시는 분명 불신의 씨앗에 대해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어지도록 만드는 것’ 이라고 말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그 말인즉슨, 그녀들은 애초에 내게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주 작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편린에 불과할 지라도, 내가 맡았던 척후라는 자리에 대한 못마땅함과, 나에 대한 불만들을 꽁꽁 숨겨두고 있었다는 소리다.
이 사실이, 파티를 나온 지금의 상황에서도 어마어마한 배신감이 들게 만들었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녀들의 태도가 바뀌었던 당시의 나는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상상해 보라. 평소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모든 순간을 함께하며 가족같이 지내 온 이들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점점 나를 싸늘하게 대하고 무시한다. 심지어 이런저런 잡일을 시키며 시종 취급을 하고, 뭐 하나라도 실수하면 죽일 듯이 물어뜯는다. 한술 더 떠서, 왜 그러는지 정확한 이유도 모른다.
나는 정말이지 미치는 줄 알았다. 지난 2년 동안 버텨 온 것도, 사실상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들이 나를 멀쩡하게 대해 주었던 때를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언젠가는, 다시 그 시절의 그녀들로 돌아와 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그 믿음은 지난 2년 간 처참하게 배신당했고, 나는 결국 파티를 떠났다. 나는 너희들을 보기만 해도 화가 나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들은 이제야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세뇌 비슷한 것을 당했다고.
근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했던 그 기억들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진짜, 씨이발….”
“흐윽… 우리도… 우리도 그러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저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이제는 그냥, 그녀들의 이중적인 태도가 역겨웠다. 그녀들이 변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내가 역겨웠고, 사람 간의 인연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파국을 맞는다는 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나는 눈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는 이사벨을 향해 물었다.
“갈란이 그 이상한 벌레를 심어 놓았다. 이거지.”
“훌쩍… 네….”
“너희들은, 갈란의 계획에 놀아난 거고.”
“마, 맞아요….”
“그런데, 이를 어쩌나. 그 갈란은 이미 죽었는데.”
“…….”
내가 제일 화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원인을 제공한 놈이 죽었는데, 그럼 나는 어떻게 하냐고.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하는 거야.”
“그, 그건… 훌쩍!….”
이대로 그녀들을 용서해야 할까? 말이야 쉽지.
“너희들이 그렇게 나오면, 나는 이 화를 어디에 풀어야 하는 건데.”
“오, 오스틴… 미안해….”
“미안하다. 우리가… 우, 우리가 미안… 하니까…!”
나를 바라보는 용사와 그레이시의 눈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너희들에게 맞춰 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그냥,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내가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음속에 꾹꾹 눌러 놓았던 말들이, 뇌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입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3년.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야.”
“히끅… 흑….”
“그중 2년을… 너희라면, 2년 동안 온갖 잡일을 떠맡고 욕을 먹어 가면서 버틸 수 있어?”
“미, 미안해… 미안해….”
애써 담담하게 말을 해도, 아드리엔을 제외한 그녀들은 그저 미안하다며 연거푸 고개를 숙이기만 할 뿐이었다.
“…감정을 조절할 수 없게 만든다고 했지. 분명.”
“히끅… 마, 맞아….”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어서, 내게 그렇게 대했다는 건.”
더 이상 말을 섞기가 싫었다. 다음 기회에 이야기를 나눈다면 몰라도, 지금은 마음속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애초에, 내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내 말 한마디에, 눈물을 흘리던 그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단체 생활을 하는 데 서로 불만이 없을 수는 없다. 레인저에서 훈련을 받은 만큼, 나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내 눈에는, 그 불신의 씨앗이라는 것에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밖에 보이질 않아.”
“아, 아니야… 아니야…!!!”
마야가 미친 듯이 고개를 휘저으며 내 팔을 붙잡았다. 그 태도마저, 가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원망스럽다. 너희들이 원망스럽다.
나는 손쉽게 마야를 떨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은 내가 용서해 주길 바라는 것 같은데… 그 씨발놈의 용서, 얼마든지 해 줄게.”
눈가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나를 바라보는 그녀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서로 모르는 사이로 지내자.”
남으로 지내자. 사실상 연을 끊자는 말과 다름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구석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아드리엔이 내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오, 오스틴…! 제발…!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마…! 제발… 내가 미안하니까… 이렇게 사과할 테니까, 제발….”
“…미안해, 아드리엔. 활 연습 과녁으로 써먹지 못해서 아쉽겠네.”
“아, 아니야…! 그때 그건… 그, 그건 그냥…!”
구차하게 매달리는 아드리엔을 뿌리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너희들은 내게 하소연했다. 불신의 씨앗 때문이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오갈 데 없어진 내 감정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눈앞의 그녀들과는, 더 이상 서로 만날 일은 없었으면 했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 만으로 그녀들에게도, 나에게도 고통이니까.
그래서, 그녀들에게 일방적인 작별을 고했다. 나를 위해, 그녀들을 위해.
“오, 오스틴! 잠깐…! 조금만 더 이야기를 들어줘라…!”
로빈에게 손짓해 나가려는 태도를 취하자, 그레이시가 테이블을 뛰어넘어 내 손을 붙잡았다.
“…그레이시.”
그녀에게는 복잡한 감정이 많았다. 어렸을 적에는,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 살갑게 지냈으면서.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도 실망스러웠지만, 지금의 망가진 그레이시의 모습이 더욱더 실망스러웠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과거의 관계를 붙잡아주지도, 놓아주지도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네가 나를 알아 봐 줄 거라고 생각했다.”
“훌쩍… 그, 그게 무슨….”
“우리가 재회한 지 3년이나 지났는데, 너는 많이 달라졌더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 그 매화나무 밑에서 만나고 싶었는데.”
그레이시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황, 그다음은 의문, 그리고 의심, 이윽고 확신. 최종적으로 경악에 찬 그레이시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매, 매화나무… 자, 잠깐. 오스틴! 네가 그걸 어떻게…!”
“매화나무 아가씨. 내일 또 보자.”
뒷동산에서 함께 놀다가, 해 질 녘에 동산 위의 매화나무 밑에서 빠짐없이 말했던 그 말. 서로 이름도 모르고 놀았던 시절, 내일 또 만나길 바라며 자연스럽게 나왔던 그 말.
“…이제는 볼 일 없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굳어버린 그레이시를 내버려 두고, 나와 로빈은 방을 나섰다.
고맙게도, 그녀들은 나를 붙잡아 주지 않았다.
…고맙게도.
* * * * *
식당 바깥으로 나서니, 여름 특유의 따스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어느새 저녁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로빈. 오랜만에, 둘이서 술 한 잔 할래? 내가 살 테니까.”
“…선배님.”
“아… 너 술 잘 못 마셨지? 그럼, 뭐 맛있는 거라도 따로 사서 여관으로….”
“선배님.”
언제나 나를 올려다보았던 로빈이, 내 목을 붙잡고 머리를 끌어안아 주었다.
“…괜찮아요. 수고하셨어요.”
로빈이 따뜻하게 안아주자, 방금 전까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저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냥… 그냥, 고생 많으셨어요.”
“…로빈. 나, 나는….”
“선배님은, 최선을 다하셨어요.”
“흐윽… 으읍… 윽… 나, 나는… 그냥…”
로빈의 따스한 품이, 천천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냥 웃으면서, 용서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내, 내가… 그냥 웃으면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랬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 나는… 나는….”
“괜찮아요. 괜찮아요….”
사람 간의 관계를 끊는 일은… 더군다나 오해와 이간질로 인해 갈라진 인연을 완전히 끊는 일은, 이렇게나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나는 오늘, 소중했던 인연들을 내 손으로 끊어 내었다.
이전에도 그녀들과 상종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그때는 그녀들의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 홧김에 저지른 일에 가까웠다.
용서할 수도 있었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처음 1년 간의 그때 그 시절처럼 웃으면서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의 기억들은 내 발에 족쇄처럼 묶여있었다.
“흐으… 나, 나도 힘들었는데… 나도, 동료로 인정받고 싶었는데… 쓸모없는 척후라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았는데….”
“…잘, 견뎌, 내셨어요.”
길거리 한복판에서 서로 끌어안으며, 그렇게 한동안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간 쌓였던 억하심정들이, 눈물에 의해 말끔히 씻겨져 나갔다.
용사, 그레이시, 이사벨, 아드리엔, 마야.
지난 3년 동안 고마웠고, 또 많이 원망스러웠던 이들.
이젠 정말로, 안녕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