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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67화 (67/106)

〈 67화 〉 66. 기사는 잠 못 이루고

* * *

“안녕! 처음 보는 얼굴이네?”

소년은, 흙투성이로 지저분한 손을 옷에 슥슥 문지르곤, 소녀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

“…….”

“어디서 왔어? 아까 그 아저씨가 너희 아버지 셔?”

“…….”

“도시에서 왔어? 나도 도시에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아….”

“응? 뭐라고?”

“아, 안녕….”

“…뭐야, 말할 수 있잖아! 목소리도 예쁘네!”

천성이 내향적이었던 소녀는, 쾌활하게 웃으며 이런저런 말을 거는 소년을 뿌리치지도, 그렇다고 선뜻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쭈뼛거릴 뿐이었다.

시원한 산들바람이 부는 봄. 작고 예쁜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언덕 위에서, 그 언덕의 꼭대기에 우뚝 자라 있는 매화나무 아래에서, 소녀와 소년은 그렇게 만났다.

이 마을에 온 지 일주일. 그 일주일 동안 혼자 언덕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며 시간을 때우던 소녀의 옆에, 소년은 털썩 주저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처음에는 갑작스레 다가온 소년을 언짢아했던 소녀 역시,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소년의 입담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소년의 이야기를 경청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 엄마랑 토끼 덫 확인하기로 약속했는데!”

순식간에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해 질 무렵. 별안간 소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 못 하기 시작했다.

“으… 혼나겠다…! 야! 오늘 재밌었어! 난 먼저 가볼게! 다음에 또 보자!”

허둥지둥 언덕을 내려가는 소년을, 소녀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처음이었다. 그 아저씨 말고, 누군가 소녀에게 다가온 일이.

처음이었다. 대답도 잘하지 못하는, 수줍음이 많아 답답한 소녀에게, 누군가 선뜻 나서서 말을 걸어 준 것이.

처음이었다. 또래 남자아이와 대화한 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 이름 모를 마을 소년은, 여러모로 소녀의 처음을 가져가 버렸다.

“또… 보자….”

어쩌면, 소녀의 마음까지도.

* * * * *

“그레이시. 오늘은 조금 늦었구나.”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아저씨다. 그레이시는 언제나 그리 생각했다.

뒷골목에서 태어나 부모에게 버려지고, 사창가의 창녀들에게 거두어져 젖을 빌려 먹으며 자라왔던 그레이시는, 3살 무렵에 이 아저씨에게 거두어졌다. 아니, 사실상 구원받았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는 그레이시에게 있어서 아버지였다. 비록 아저씨를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힘들었으나, 아저씨가 언제나 그레이시의 편의를 봐준다는 것을, 그레이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두껍고 차가운 갑주를 입은 아저씨는, 그레이시에게 절대로 맨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아저씨.”

“…그레이시. 늘 말했지만… 이젠 슬슬 아빠나 아버지라고 부를 때가 되지 않았니?”

단순히 착각인 걸까. 오늘 그 소년과 이야기를 나눈 뒤, 차갑기만 해 보였던 아저씨의 말투가, 어째서인지 다정하게 느껴졌다.

“…우리, 이 마을에 얼마나 머무를 거야?.”

“이번에는 조금… 오래 머물러야겠더구나. 별의 파편이 너무 깊숙한 곳에 있어.”

그 말을 듣고, 그레이시는 내심 기뻐하는 자신의 속마음에 조금 당황했다. 기뻐하다니. 왜?

그 소년 때문이다. 그 소년을 만난 뒤로, 어째서인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아저씨. 나, 내일도 놀다 와도 돼?”

쭈뼛거리며 말하는 그레이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사는, 이내 손질하던 검을 마저 닦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일이 기대되었다.

* * * * *

“야! 오늘도 만났네! 안녕!”

저 멀리서 달려오는 소년을 보며, 그레이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일어나 언덕 위에 올라서, 멍하니 마을을 내려다보며 소년을 기다렸다. 혹시, 오늘은 안 오면 어쩌지. 만난다면, 인사를 건네야 할까? 어제 하루 만났는데, 너무 친한 척하는 건 아닐까?

그러한 불안감은 기우였다. 소년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레이시에게 허물없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었다.

“아~! 오늘도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옆에 털썩 주저앉는 소년을, 그레이시는 대놓고 바라보지 못하고 곁눈질로 힐끔 거릴 뿐이었다.

언제나 흙이 묻어 지저분한 옷과,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 이곳저곳에 붙어있는 나뭇잎.

대체 오전에 뭘 하다가 오는 것인지. 그레이시는 궁금했으나, 소년에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있잖아, 나도 원래 여기에 자주 왔다?”

소년에게 선뜻 말을 걸지 못하여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그레이시에게, 오늘도 소년이 먼저 말을 건네어 주었다.

“엄마랑 같이 숲 속에서 사냥을 하고 나면, 항상 여기에 올라와서 마을을 구경했거든. 뭐… 저번 주에는 아빠를 따라서 숲에서 야영하느라 못 왔지만.”

사냥. 과연, 소년은 어머니와 함께 사냥을 하고 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렇게 흙투성이에 나뭇잎을 붙이고 오는 꼴도 이해가 되었다.

소년에 대해 하나 더 알았다는 사실에, 소년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는 사실에, 그레이시는 조금 기뻤다.

“이 마을에는 내 또래 친구들이 별로 없어. 대부분 부모님을 도와서 일을 하기 바쁘고. 나랑 놀 수 있는 친구들은 몇 안 돼. 그런데….”

말끝을 흐리던 소년이, 별안간 멍하니 소년을 바라보고 있던 그레이시를 향해 고개를 불쑥 들이미는 바람에, 그레이시는 비명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 내고 소년을 째려보았다.

“…그런데, 네가 있더라고! 어제는 너무 반가워서, 스스럼없이 인사했어. 혹시 불편했다면 미안해!”

다시금 멀어지는 소년의 얼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레이시는 내심 아쉬워했다.

코가 닿을 만큼 가까워졌던 그 순간,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소년의 맑고 파란 눈을 본 순간, 그레이시는 마법에 홀린 듯 소년의 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조금 더 보고 싶었는데.’

그런 그레이시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신나게 제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이곳에 오면 항상 혼자 놀았는데, 오늘부터는 너랑 같이 놀면 되겠다! 싶어서 말이야!”

꽃향기를 가득 머금고 쏴아아—! 불어오는 봄바람에, 소년과 그레이시가 기대고 앉아 있던 매화나무의 가지가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분홍색의 예쁜 꽃잎이 살랑살랑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에, 눈앞에 흐드러진 꽃밭이 바람을 타고 파도치는 모습에, 그레이시는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너무나도 향긋한 꽃내음에, 코가 마비될 것 같았다.

“꽃향기, 기분 좋지? 이곳은 봄만 되면 꽃이 엄청 많이 펴서 예쁘거든.”

꽃내음에 아찔해진 그레이시가 고개를 돌려 보면, 가을 하늘처럼 청명하고 맑은 소년의 파란 눈이 소녀를 향해 휘어지게 웃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 이 매화나무에서 맛있는 매실이 열리니까, 같이 따서 먹자! 내가 나무 타는 법도 알려줄게!”

“나, 나는….”

“응?”

그레이시는, 한 발짝 용기를 내어 다가가기로 결심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하는 그레이시를 멍하니 바라보던 소년은, 이윽고 활짝 웃으며 그레이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우리 꼭 그렇게 하자! 매화나무 아가씨!”

“아, 아우으…! 매, 매화나무 아가씨…?”

“이름을 알려주질 않길래,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아서! 매화나무 아래에서 만났으니까, 매화나무 아가씨야!”

활짝 웃는 소년의 모습에, 그레이시는 이름을 가르쳐 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내 이름도 비밀이야! 언젠가 네가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게 되면, 나도 그때 알려줄게!”

저도 모르는 사이 머리에 사뿐히 올라와 있던 매화꽃의 꽃잎들이, 소년의 손을 따라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한참 동안 그레이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던 소년은, 벌떡 일어나 언덕 아래로 내달리며 그레이시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매화나무 아가씨! 내일 또 보자!”

서로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몰랐지만, 봄바람에 휘날리며 땅으로 떨어지는 저 매화꽃의 꽃잎처럼, 그레이시는 소년에게 강하게 이끌리기 시작했다.

* * * *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봄이 돌아왔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돌아왔음에도, 소년은 하루도 빠짐없이 언덕 위의 매화나무 아가씨를 찾아와 주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의 시간 동안, 소년과 그레이시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레이시는 기사 아저씨를, 드디어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레이시의 아버지와 만나고 싶다는 소년의 말에, 그레이시는 소년을 기사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레이시의 아버지인 기사 아저씨는, 언제나 아침마다 빠짐없이 검을 수련하였다. 그런 기사의 모습에 반한 걸까. 소년 역시 그레이시의 아버지를 따라, 검을 수련하게 되었다.

“기사라니, 멋있잖아! 동화 속 주인공 같아서 멋있어!”

“그, 그래…?”

열심히 검을 배우는 소년의 옆에서, 그레이시 역시 검을 쥐기 시작했다.

소년이 멋있다고 했으니까. 그레이시 역시, 어느 순간부터 기사가 되고 싶어졌다.

“내가 널 지켜줄게!”

힘든 검술 훈련이 끝나면, 소년은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그레이시에게 말했다.

비록, 검술의 잠재력은 소년보다 그레이시가 뛰어났음에도, 소년은 기죽지 않고 해맑게 웃으며 그레이시를 대해 주었다.

“나보다 못하면서….”

“우이씨! 검은 몰라도, 너보다 활은 잘 쏘거든?! 네가 기사가 되면, 내가 궁수가 될게!”

그렇게, 1년. 소년과 그레이시는, 어느덧 서로가 서로를 원하게 되었다.

“…그레이시. 필요한 것만 챙기렴. 짐은 가볍게 꾸려야 해.”

그렇기에, 그레이시는 이별의 순간이 갑작스럽게 찾아왔음에,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꼭, 가야 해…?”

“…그레이시. 우리가 떠나지 않으면, 이 마을이 위험하단다. 어쩌면, 그 소년도….”

기사의 말에, 소심한 그레이시는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레이시는 당장 내일 이 마을을 떠나게 되었음에도,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아 내었다.

오늘은, 아마 마지막으로 소년과 만나는 날이 될 테니까. 퉁퉁 부은 눈으로 소년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익숙한 언덕길을 오르며, 그레이시는 자꾸만 눈물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아 내었다.

언덕을 오르면 보이는 것은, 1년 전 그때와 똑같은 풍경.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꽃들과, 분홍색의 꽃이 풍성하게 피어있는 매화나무.

“안녕!”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매화나무 아래에서 그레이시를 기다리던 소년의 존재일 것이다.

“…안녕.”

“오늘은 훈련도 안 했네?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아빠가 조금 피곤하신가 봐.”

“그래? 나는 말이지….”

언제 말을 꺼내야 할지, 그레이시는 내심 말을 꺼낼 기회를 엿보았지만, 어느덧 해가 저무는 시간이 되었음에도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망할 성격 때문에. 상대방이 먼저 말을 꺼내어 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말도 못 하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아~! 오늘도 재밌었어! 난 이만 가봐야겠다!”

그때는,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평소 눈치가 빨랐던 소년의 목소리가, 어딘가 살짝 떨린다는 것을.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녀 자신의 눈이, 어느덧 촉촉해졌다는 것을.

지난해 여름, 힘들게 딴 매실을 먹으면서. 잠시 지나가던 마을이라는 것을, 아마 평생 이곳에 머물지는 못 할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에게 왜 말해 주었던 것일까.

“매화나무 아가씨! 언젠가 또 보자!”

“아, 잠…!”

그레이시가 소년을 붙잡기도 전에, 이미 소년은 언덕 아래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제야, 이름을 알려 줄 용기가 났는데. 소년이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이제는 너의 진짜 이름을 알고 싶었는데.

저물어가는 해를 등지고, 소년을 향해 닿을 수 없는 손을 뻗은 채로.

“언젠가… 또, 보자….”

그레이시는, 한동안 그렇게 울었다.

* * * * *

“…오스틴.”

어느새 비어버린 술잔을 채우며, 그레이시는 퀭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술냄새가 지독하게 풍기는 방 안에는, 그레이시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오스틴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술을 닥치는 대로 사들고 와서 들이켰다. 쓰린 속을 달래주길 바라며.

공허한 방을 바라보며, 그레이시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오스틴.”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소년을 다시 만났음에도, 그토록 알고 싶었던 소년의 이름을 알았음에도, 이미 소년은 그녀의 곁을 떠난 뒤였다.

그때, 자신이 용기를 냈더라면. 그때, 이름을 물어보았더라면. 어쩌면, 이런 결말을 맞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곤란한 사정 따위는 없었다. 그냥, 그저… 언젠가 헤어질 사이니까, 이름을 알려줬다간, 정말 잊지 못할 것 같아서.

아니. 이것도 곤란한 사정이라면, 곤란한 사정이겠지.

어차피 이렇게 잊지 못할 거면서, 이름을 알려주지 못했다.

…멍청하게도.

눈가가 따가워질 정도로 부어버린 눈에서, 방금 부어 넣은 술이 곧바로 나오는 듯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이미 다섯 병을 넘게 마셨음에도, 그레이시는 계속해서 독한 술을 입에 머금었다.

“구웨에엑…! 으윽…!”

기어코 화장실에서 나무 양동이에 쓴 위액과 술을 게워냈음에도, 이 지독하게 우울한 기분은 가시질 않았다.

“구윽… 윽… 흐윽….”

소심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언젠가, 소년을 만나서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소년이 동경하던 기사가 되었다. 언젠가, 떳떳한 모습으로 소년을 만날 수 있도록.

사실, 오스틴을 처음부터 의심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흔하다 쳐도, 그 맑고 파란 눈은 함부로 흉내내기도, 닮기도 힘든 소년만의 장점이었으니까.

소년은 활 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오스틴은 활이 아니라 쇠뇌를 애용했다. 오히려, 아드리엔이 활을 사용하는 모습을 질색하며 바라보기까지 했다.

소년은 밝고 순수했다. 오스틴처럼 어딘가 음침한 기색이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저 소년과 닮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굳이 오스틴에게 물어보기도 어색했고, 오스틴 역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그다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레인저에 몸을 담으면서 죽고 죽이는 싸움을 이어왔을 것이다. 어른이 되었으니, 그때의 순수하고 밝은 동심을 기대하면 안 됐는데.

애매하게 닮은 모습에, 오스틴에게 내심 불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오스틴을 퉁명스럽게 대한 것도. 어쩌면, 그 소년과 애매하게 닮은 모습에 짜증이 나서 그랬을지도.

“흑… 으흑… 나, 나는 그냥….”

빈 술병이 빼곡한 탁자에, 그레이시는 얼굴을 묻었다.

쿵—! 하고, 이마와 탁자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크흐으… 흐윽… 내, 내가 오스틴을… 오스틴….”

다시 만나면, 그때는 매화나무 아래에서 말하고 싶었다.

너를, 오래전부터 좋아했노라고. 처음 말을 걸어 준 순간부터, 지금까지.

너는 내 머릿속에, 마음속에 지독하게 박혀 있는 말뚝 같았다고.

그리고, 그 말뚝을 거추장스럽다며 뽑아낸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그레이시는 서럽게 울었다.

“흐윽… 윽… 꺼흑… 끄윽…!”

밤은 깊어만 가고, 소년을 제 손으로 떨쳐버린 소녀는,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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