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68화 (68/106)

〈 68화 〉 67. 취중진담

* * *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 잠시 잡화점에 들른 나와 로빈은 닥치는 대로 술병을 긁어모았다.

오늘은… 오늘만큼은, 정말이지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묵묵히 내 옆에서 걷던 로빈은 고맙게도, 눈에 보이는 술병을 죄다 손에 집는 내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저물어가는 노을에 길게 늘어진 사람들의 그림자를 보며, 그렇게 여관까지 비척 비척 걸어갔다.

철컥! 끼이익….

문이 열리고 보이는 것은, 나와 로이먼의 침대가 놓여 있는 방 안. 아침에 나갈 때 모습 그대로인 것을 보아하니, 로이먼을 비롯한 다른 일행들은 아직 여관에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탁자에 술병들을 올려 두고, 의자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본다. 마야의 애처로운 부탁에 못 이겨,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던 일. 그곳에서, 그녀들을 만난 일. 그녀들의 자세한 사정을 들은 일. 이윽고 밝혀진 내막. 그럼에도, 그녀들을 뿌리쳐 버릴 수밖에 없었던 나의 처지.

누군가 이기적이라고 하면, 그래. 타인의 시선에서 보면, 나는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하긴, 홧김에 멋대로 파티를 나온 것부터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조금이라도 나와 함께했던 사람이라면, 그런 말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나는 홧김에 파티를 뛰쳐나올 만큼 힘들었다는 소리다.

만약, 내가 웃는 얼굴로 용서했더라면. 만약, 내가 다시 웃는 낯으로 파티에 돌아갔….

“…쯧.”

또다시 헛된 미래를 상상하던 나는, 소리가 나게 혀를 차며 인상을 구겼다.

한심하기 짝이 없지. 내 손으로 쳐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만약이라는 단어는, 정말이지 지독한 마약과 같다. 인간의 뇌가 만들어 낸 환상 속의 동물과 같다.

만약에,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이러이러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절지동물들의 관절처럼, 달콤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렇기에, 만약이라는 단어는 마약과 같다.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마음을 좀먹는다.

“좋게 생각하자.”

그렇기에, 최대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이라는 단어로 현실에서 도피하려 들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물론, 최대한 좋은 쪽으로.

우선, 용사 파티에 속함으로써 겪어야 했던 정신적인 트라우마와 스트레스,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음. 이건 아주 좋은….

“…도망쳤으니까 말이지.”

…?

“이 겁쟁이 새끼… 뭐야.”

아까부터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내가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내가 하는 말은 맞지만, 내 의지로 내뱉는 말이 아닌 것 같다고 할까. 아직 술도 안 마셨는데.

내가 다시는 상종하지 말자고 말했을 때, 그녀들의 얼빠진 얼굴을 다시금 상기해 보았다.

…생각보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씨발. 좀.”

다시는 상종 안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막상 절연을 하고 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만큼, 어느새 그녀들에게 정이 들었던 것일까.

아니, 정이 들지 않을 리가 없지. 2년 동안 핍박받은 탓에 홧김에 파티를 나왔다고는 하지만, 나는 3년의 세월 동안….

나는, 아직 그녀들을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부정할 지라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레이시는….는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얘는 왜 안 와.”

로빈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 했건만, 슬슬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그냥 먼저 마시고 있을까?

로빈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결심은, 생각보다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나는 곧장 손을 뻗어, 차가운 물방울이 맺힌 술병을 덥석 움켜쥐었다. 내가 이렇게 자제심이 없던가.

철컥!

이빨로 마개를 뽑으려 하던 찰나, 타이밍 좋게 로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죄송해요. 오늘 땀을 좀 흘려서, 목욕을 하고 오느라….”

“로빈. 다른 애들은?”

“다른 분들이요? 로이먼 사제님은 교회에 가셨고, 루나와 아가일….”

“실비아.”

“…루나와 실비아는 시장 구경을 한다고 나갔어요. 알렉시스 공녀님은 방에서 주무시고 계시더라구요. 로이먼 사제님을 따라서 교회에 다녀오셨다는데,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그래.”

반대쪽 의자를 끌어당기며 자리를 권하자, 로빈이 다가와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아, 맞다. 선배님. 이걸 술에 타서 마시면, 숙취가 덜 하대요.”

이미 술이 가득 들어찬 내 잔에, 로빈이 어떤 가루 같은 것을 넣어 주었다.

“그래, 고마워. 자! 건배!”

“어, 그… 건배!”

텅!

잔이 맞부딪히고, 냄새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독한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확 올라왔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그렇게 몇 잔을 주고받았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잔을 집어던지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병나발을 불게 되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로빈이 술에 강하네. 평소에는 세 잔만 마시면 뻗었는데.

“…로빈.”

“네, 선배님.”

“아까는 내가, 진짜 참기 힘들었거든? 근데, 지금은… 조금 후련하기도 해.”

“…….”

이렇게 로빈과 단둘이 앉아서 술을 마시니, 절로 옛날 생각이 났다.

“…오랜만에, 옛날 얘기나 할까?”

“옛날 얘기요?”

“그래. 옛날 얘기.”

* * * * *

[ 산에서 추적하고, 숲에서 사냥한다. ]

레인저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구호. 이보다 레인저에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레인저는 왕실 기사단, 그리고 칼라이아 기마대와 건국 초창기부터 함께 해 온, 나름 오랜 역사를 가진 집단이다. 메텔 왕국은 거대한 크기의 국토를 자랑하는 만큼 산지와 숲이 많았고, 무거운 중갑을 짊어진 왕실 기사들은 숲과 산지 같은 험지에서 제대로 활약할 수 없었다. 기마대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나, 동쪽에 위치해 있는 엘프들의 땅과 경계를 가르는 송곳 산맥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험지에 특화된 전투 집단이 필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메텔 왕국의 레인저.

나름대로 왕실 기사단과 메텔 기마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곳인 만큼, 레인저의 훈련은 혹독하다.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레인저로서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다.

얼마나 빨리 일을, 사람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가. 경갑을 걸쳐 빠른 속도의 전투가 가능한 레인저에게는, 속도가 생명이었으니까.

험지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고, 험지에서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하며, 나무가 빽빽하게 들이 차서 마치 미궁과 같은, 울창한 숲 속에서 길을 찾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보통 한 해에 2천 명 가량이, 레인저 양성소에 발을 들인다. 예비 레인저들 중에서, 양성소를 졸업하고 실전에 배치되는 인원은 2할에 불과하다.

2천 명의 훈련생 중 2백 여명 만이, 양성소를 졸업하고 레인저 본대에 배치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윗 기수의 선배들에게 배정 받음으로써, ‘들개’의 칭호를 얻을 수 있다.

보통 레인저는 윗 기수 한 명과 아랫 기수 한 명으로, 2인 1조가 기본이다. 둘이 모여서 1조가 되며, 또 그 두 개의 조가 모여서야, 비로소 실전에 배치받을 수 있는 척후조가 된다.

이렇게 3~4인으로 이루어진 이 전문 살인마 무리를 이끄는 이가, 바로 ‘사냥개’의 칭호를 가진 조장이다.

사냥개들은 사람을 가장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 이들이다. 중갑을 걸친 노련한 왕실 기사들이 균형 잡힌 육각형의, 마치 방패와 같은 포지션이라면, 레인저에서 능력을 입증받은 사냥개들은 오로지 1대 1의 대인전을 목표로 훈련을 받아온 예리한 단검과 같다.

그리고 이러한 사냥개들 중 유독 특출 나고 재능 있는 이들이 엄선되어 모이면, 그들은 비로소 레인저의 그림자에서 암약하는 최정예 척후 집단이 되는 것이다.

극소수만이 그 존재를 알고 있는, 레인저의 창단과 함께해 온 레인저의 그림자. 오직 재능 있고 숙련된 사냥개들만이 모인 최정예 척후조, 사냥개 0조.

이제 막 들어온 신참인 들개들은 이름이 없다. 하지만, 사냥개부터는 본래 이름을 쓰지 않고, 각자 배정받은 암호명을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냥개 0조의 조장이었던 나, 오스틴. 암호명 하운드.

그게 나였다.

조장인 나와, 탐지 마법과 투척술이 특기였던 로빈, 그리고 쌍둥이 수인 자매인 로트와 와일러.

우리는 레인저의 정예들 중에서도 거르고 거른 최정예 인원들이었고, 실적으로 증명했다.

내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때마다, 레인저 단장이 나를 얼마나 예뻐했던지.

당시의 레인저 단장은 빈말로라도 좋은 레인저는 아니었다. 항상 귀족들의 뒷돈을 받아 쓸만한 사냥개들을 요인 암살에 내보내기도 했고, 가끔씩 우리에게 무리한 임무를 하달하기도 했다.

불평을 하긴 했어도, 딱히 항명을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때까지의 내 임무 성공률은 100%에 달했고, 보상과 지원도 빵빵했으니까.

그리고… 그래. 내가 처음 임무를 실패했을 때도,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6월 말의 여름, 초여름이 끝나가고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들 때였다.

언제나처럼 무리한 임무였고, 나는 언제나처럼 성공할 것이라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다.

마족 암살이었다. 그것도 최전선의 마왕군 심부에 위치한, 상급 마족.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의심해 보았어야 했다. 조금 더 철저히 준비했어야 했다.

설마 우리를 잡기 위한 함정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목표 마족이, 자신의 목숨을 미끼 삼아 마족들을 암살하던 우리들을 끌어들이려 할 줄은 몰랐다.

­조장님. 경비가 너무 삼엄해요. 일단 오늘은 물러나고, 경비가 약해지는 틈을 노려서….

­로트. 단장의 명령은 절대적인 거, 너도 알잖아. 지금까지 우리의 임무 성공률은 100%라고. 걱정하지 말고, 평소처럼 하자.

그때, 로트의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는데.

자신만만하게 잠입한 우리는 그대로 함정에 빠졌고, 가까스로 마족을 죽인 뒤 사방을 포위한 마물들의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지.”

내가 허공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자, 내 이야기를 듣던 로빈이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로트….”

“…로트의 일은, 평생 속죄해도 모자라.”

그래. 그땐 정말 죽을 뻔했다. 로트가 희생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무리하게 임무를 속행하다가, 동료가 죽어 버렸다. 임무마저 실패했다.

로트의 시체를 안아 들고, 와일러가 얼마나 서글프게 울부짖었던가.

로트와 와일러는 쌍둥이 자매였다. 둘은 어려서부터 함께 해 왔고, 손발이 착착 맞았다. 암호명도 로트와 와일러. 합쳐서 로트와일러.

­하운드… 아니, 오스틴… 당신은 사냥개를 부를 자격도, 사냥개라고 불릴 자격도 없어…!

팀원을 죽이는 게, 사냥개로서 할 짓이냐. 너 때문에 죽었다. 네가 죽였다. 와일러는 그리 울부짖고 있었다.

나 때문에 죽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나를 죽일 듯이 달려드는 와일러를 말리는 로빈을 뒤로하고, 나는 멍하니 로트의 시체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복귀한 날 곧바로 단장에게 찾아간 나는, 곧바로 단장에게 찾아가 제대를 요청했다.

더 이상 죽고 죽이는 싸움을 원치 않는다고. 기계처럼 죽이기만 해 왔으니, 이제 새 삶을 살고 싶다고.

그런 내게, 의자에 앉아 건들거리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단장이 말했다.

­…누가 네게 바람을 넣었는지 모르겠군. 랜버트인가? 로빈? 아니, 네놈과 함께 있던 연놈들은 죄다 쓸데없는 생각을 품었으니, 네놈이 원인이었겠지.

임무 중 사망한 로트는 어느새 이 세상에 없던 사람이 되어 있었고, 단장은 와일러마저 지워 버리려 했었다. 그는 우리를 소모품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아마 그날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팬 날이었을 것이다.

반 병신이 된 단장이 곧바로 교체된 것도, 새로 온 단장이 내가 일으킨 항명을 조용히 묻어주고, 내 요구에 따라 나를 제대시켜 준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 * * * *

“파멜라 교관님의 도움이 컸어… 그 누나가 나름 짬밥을 제일 오래 먹었으니까….”

“그분은 저도 기억이 나네요. 선배님께서 아줌마라고 부르면 죽일 듯이….”

“음… 그랴….”

술을 너무 마신 탓일까?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켰더니, 혀가 점점 꼬였다.

로빈의 얼굴이 두 개로 보이는….

“아으… 씨이팔, 골이야….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며언…”

조금 흐릿해진 시야에, 로빈이 히죽히죽 웃으며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내가, 어! 로트한테 미안해서라도… 동료에게는 그래도, 잘 대해 줘야 된다! 이 말이야! 알아들어?!”

“네. 히히… 그쵸.”

“그런데 말이야! 내가 씨팔, 용사 파티를 얼마나… 힘들게 들어갔는데… 그 따위로 나를 대하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어이구. 힘들었겠네요.”

“그래서! 내가 비록, 그 년들과 연을 끊은 건 조금… 많이 가슴이 아프지만!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말이야….”

“그래요. 우리 수도에 올라가면, 와일러에게 찾아가 보는 건 어때요?”

“조오치! 내가 상병신같이, 무리 하지만 않았더라도… 흐어어엉!!!!!! 로트!!!!!! 내가 미아내!!!!!!”

어우 시팔, 내가 뭐라는지도 잘 모르겠네. 시야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어쩐지 아랫도리도 조금씩 불끈불끈하는 것 같고….

“자, 선배님. 뚝. 왜 갑자기 울고 그러세요.”

“크흥… 그런데, 로빈. 너 오늘따라 술 되게 잘 마시네? 난 좀 취하는 것 같은데….”

“…아~ 그거요?”

꾸벅꾸벅 고개를 까딱이는 내게, 어딘가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던 로빈이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왜냐하면, 제가 마시던 건… 그냥 물이거든요.”

“응? 뭔 소리야….”

“…원래는 그냥 위로만 해 드리려 했는데.”

“어, 어…?”

로빈은 내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는, 번쩍 들어 올려 침대 위에 살포시 눕혔다.

“뭔가, 선배님이 약한 틈을 이용하는 것 같네요. 죄송해요.”

그런 내 위에 슬며시 올라탄 로빈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물었다.

“선배님은,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 뭐야….”

로빈의 돌발행동에, 술로 인해 어지러웠던 정신이 차차 돌아오는 것 같았다.

“있잖아요. 제가 아까 술잔에 넣어 드린 숙취 해소제, 정체가 뭔지 아세요?”

“무, 뭔데…?”

“그건 말이죠….”

이상하게 아까부터 정신도 몽롱하고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은 내게, 로빈이 상체를 숙여 내 귀에 속삭였다.

“미약이에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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