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69. 우리들의 인간관계
* * *
“으음….”
눈을 뜨자마자, 눅진하고 끈적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왜 이렇게 찝찝한….
“…아.”
생각해보니, 맞다. 어제 로빈과 이런저런 일을 하고….
고개를 돌려 왼편을 바라보니, 내 몸을 꼭 끌어안은 로빈이 곤히 자고 있다. 아주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맞닿은 살결 너머로,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내 몸에 둘러져 있는 팔을 떼어 내었다.
레아, 레이 자매와 할 때도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열심히 허리를 쓰다 보니 허리에 조금 무리가 왔던 것뿐이지, 물에 젖은 걸레를 비틀듯이 마구잡이로 쥐어 짜내지는 않았다.
복상사가 왜 있나 했더니,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어제는 진짜… 너무 쥐어짜서 피가 나오는 줄 알았다.
“무, 물….”
마치 말라비틀어진 고목나무처럼 목이 바싹 마른 탓에 괴로웠다. 아직 바들바들 떨리는 팔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키니,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빈 술병들과 술을 따라 마셨던 컵이 눈에 들어왔다.
팔과 마찬가지로 덜덜 떨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겨우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는 데 성공했다.
“애미, 진짜 사람 잡네….”
간신히 컵을 손에 쥐고, 화장실에서 물을 받아 침대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니, 쩍쩍 갈라지던 목이 촉촉이 젖어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후우….”
단숨에 물을 전부 들이켜고, 그래도 모자라서 한 컵을 더 떠왔다. 그사이 로빈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침대에 앉아 멍하니 축 늘어져 있는 로빈에게, 말없이 남은 물을 건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아….”
물을 마시며 목울대를 움직이는 로빈의 모습을 보니,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서 조금 어색해졌다.
몸까지 섞었는데, 평소의 로빈으로 대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내가 뭐 여자를 사귄 경험이 있어야지.
“로빈. 그, 우리 이제….”
“…선배님.”
로빈과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물으려니, 로빈 쪽에서 말을 자르고 입을 열었다.
“어제는, 그… 죄송했어요. 억지로 해서….”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는 로빈의 눈꼬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하긴, 어제 조금 강압적으로 한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
“아냐. 나도 그… 좋았으니까.”
내가 멋쩍게 웃으며 말하자, 로빈이 배시시 웃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있잖아.”
“…네. 선배님.”
“이제 우리, 그… 무슨 관계야?”
설마, 이렇게 바로 사귀게 되는 건가?
로빈이라면 싫지는 않지만… 아니, 로빈 정도면 확실히 예쁘고 성격도 싹싹한 편이니까 좋지만, 나는 알고 있다. 파티 내에서 연인이 생겨나면, 여러모로 피곤하고 곤란해진다는 것을.
게다가, 어제 그레이시에게….
나에게도 조금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하룻밤의 유흥으로 끝내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일 할 생각은 없었다. 책임져 달라고 하면, 내가 확실히 책임져야지.
잠시 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던 로빈이,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선배님은, 제가 연인이 되어 달라고 하면… 받아주실 수 있나요?”
“…네가 책임져 달라고 하면, 책임져 줄 수 있어.”
“그걸 묻는 게 아니에요.”
로빈의 얼굴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책임져 달라고 하는 강압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그… 좋아하는 사이로 이어질 수 있냐구요.”
나는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로빈을 향한 내 감정은, 과연 좋아하는 마음일까?
좋아하긴 하지. 로빈이 나에게 연심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나 역시 로빈을 상당히 호의적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로빈 이외의 다른 파티원들도 비슷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과연, 이성을 향한 호감이라고 봐도 되는 걸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렇기에, 로빈의 물음에 즉답을 주지 못하고 입만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거 봐요. 바로 대답 못하잖아요.”
잠시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로빈은, 쓰게 웃으며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을 떨어뜨렸다.
“어제는 조금 흥분하기도 했고, 용사 파티원 분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도 있어서… 조금 조급했어요. 하지만, 저는 선배님과 서로 좋아하는 관계가 되어서, 이성으로서 이어지고 싶어요. 동료나 강압적인 관계가 아니라요.”
먼산을 바라보던 로빈은, 이내 몸을 일으키며 주섬주섬 옷을 챙겨 들었다.
“저는 선배님 좋아… 아니, 사랑해요. 이성으로서요. 15살 무렵에 저를 구해주신 날로부터, 지금까지. 쭉.”
“…그래.”
“멋대로 레인저를 나가셨을 때는, 조금 화가 나더라구요.”
“…응.”
“선배님께서 레인저를 나가신 뒤로, 사냥개 0조는 해체됐어요. 저도 자연스럽게 레인저를 나왔구요.”
그러고 보니, 내가 레인저를 나온 뒤로 로빈이 어떻게 지냈는지, 들어본 적이 있던가?
아니. 없었다. 로빈이 어째서 레인저를 나왔는지는, 나와 마찬가지로 레인저에 진저리가 나서 나온 줄로만 알았는데.
“선배님 때문에, 저도 레인저를 나왔다구요. 선배님이 보고 싶어서요.”
“…….”
“저, 선배님을 이성으로서 좋아해요. 선배님이 좋아요.”
“나도 좋아해.”
“그건,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맞아. 이성으로서 좋아하느냐고 하면, 아직 잘 모르겠어.”
나를 바라보는 로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로빈은 그 상태로 잠시 동안 나를 노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부터 시작하죠.”
“나는….”
내가 입을 열자, 로빈의 검지 손가락이 내 입술을 살포시 짚었다.
“…이것마저 거절당했다간, 저 울어버릴 것 같거든요.”
“하지만, 로빈.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이라니, 그게 무슨….”
“그냥 평소처럼 하시면 돼요.”
로빈의 말을 끝으로,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평소처럼 대하되,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라니.
…애매하네.
하지만, 내가 우유부단한 탓이니까. 아니, 우유부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로빈에게 이렇다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결국,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부터.
로빈은 그제야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옷가지를 대충 챙겨 입고 문쪽으로 향했다.
“저는 저쪽 방에 가서 씻을 테니까, 선배님도 얼른 씻으세요. 의심이라도 받았다간 곤란하니까요.”
“…그래.”
로빈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그녀에게 말했다.
“…고맙다.”
“…고마우면, 빨리 저한테 반하시라구요.”
로빈이 방을 나가고, 방 안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직 방안에 맴도는 로빈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셨다.
“…미치겠네.”
용사 파티도 그렇고, 로빈도 그렇고.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 * * * *
몸을 꼼꼼히 씻고, 옷을 챙겨 입었다. 아까부터 시침이 잘 돌아가지 않는 벽시계를 손으로 탁 치니, 제자리에서 덜덜 떨어대던 시침이 뽈뽈 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쉬며, 창문을 꽁꽁 덮고 있던 암막을 확 재꼈다. 아직 꼭대기에 도달하지 않은 태양. 다행히 오늘은 늦게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아직 아침임에도,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든다는 것을 증명하듯 따뜻한 바람이 확 불어왔다.
옷과 장비를 갖추고 문을 여니, 로이먼이 복도에 서서 경전을 읽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로이먼.”
“아, 형제님. 일어나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으면, 그냥 들어와서 깨우지 그랬어. 다른 애들은?”
“다들 먼저 내려가셨습니다. 아마 아직 아래층에서 식사 중이실 겁니다.”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으며,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교회에 다녀왔다면서?”
“예. 알렉시스 공녀님과 함께 미사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공녀님께서는 겸사겸사 본가에 편지를 부치셨고, 저는 새로운 의복을 받아왔습니다.”
로이먼의 손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과연. 피에 물들고 갈기갈기 찢어졌던 로이먼의 전투 사제복이 말끔해져 있었다.
“그나저나, 형제님. 어딘가 몸이 불편하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치유의 빛이라도….”
“…아무것도 아냐. 그냥….”
로이먼의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질문에, 나는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어제 로빈과 질펀하게 하룻밤 잤다고 할 수도 없고.
1층으로 내려오니, 저쪽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일행들이 눈에 들어왔다.
“좀 이따, 식사가 끝나면 모이자. 모두에게 할 말이 있어.”
“알겠습니다. 헌데, 할 말이라 함은…?”
열심히 밥을 먹는 아가일, 현 실비아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로이먼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가일 말이야. 루나와 화해한 건 그렇다 쳐도,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지.”
“음… 알겠습니다.”
아가일에게는,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가령, 어째서 갈란이 아닌 우리를 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아가일을 억지로 내칠 생각은 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녀를 계속 데리고 다니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본다. 본인 말로는 전선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어서, 머리카락만 잘 숨기고 다니면 괜찮다고야 하지만….
“오스틴. 좋은 아침이에요.”
평소와 다르게 비어있는 로빈의 옆자리에 앉으니, 건너편에 앉아있는 알렉시스 공녀가 인사를 건네어 왔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이 정도 식사로도 충분히 맛있어요. 고마워요.”
“입에 맞으시다니, 다ㅎ…!”
알렉시스 공녀와 자연스럽게 아침 인사를 주고받던 찰나, 옆자리에 앉은 로빈이 내 허벅지를 꽉 꼬집었다.
“선배님. 이것도 드셔 보세요.”
“어, 응.”
평소처럼 행동하라더니, 뭐하는 짓인지.
나 같은 놈 때문에 질투하는 것도 퍽 웃겨서, 볼을 살짝 부풀리고 있는 로빈의 모습이 조금 귀여워 보였다.
* * * * *
식사를 끝낸 뒤, 내 요청에 따라 모두가 내 방으로 모였다.
“오스틴. 할 이야기라 함은?”
“좋은 질문이야, 루나.”
루나 역시 연관이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아가일. 네 향후 처분에 관해서 의논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진지한 어투로 말하자, 아가일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내 향후 처분이라니, 무슨 소리야?”
“너는 마왕군의 군단장이야. 루나의 경우에는 마왕군에서 입지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너는 달라.”
내 말을 들은 아가일의 눈꼬리가 조금 처졌다. 서운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네가 전선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 얼굴을 보고 들킬 가능성이 없다손 쳐도… 네 오빠는 아직 마왕군 소속이라며? 그것도, 참모장이라는 아가토가 말이야.”
“…그놈 얘기가 왜 나와.”
“아가토는 마왕군의 유능한 참모장이고, 어찌됐건 네 오빠니까 말이야. 혹시 네가 마왕군을 나온 것도 계획된 일인가 싶어서.”
“나는 그런 게…!”
몸을 벌떡 일으킨 아가일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전부 추측에 불과한 이야기이긴 해. 하지만, 까놓고 말해서 적을 동료로 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야. 루나만 해도, 네 밑에서 일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인간들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그럼, 루나는 왜….”
“루나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어. 애초에, 네가 루나에게 건네줬던 마나석 말이야. 인간들을 죄책감 없이 죽일 수 있도록, 세뇌의 마법이 걸려 있었어. 루나가 살인을 저지른 건, 네가 건네준 마나석 때문이라고 봐야겠지.”
“…….”
아가일 역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말을 묵묵히 듣기만 할 뿐이었다.
“지난번에 루나와 어떻게 화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직 너를 완전히 신뢰하기 힘들어.”
땅을 바라보고 있는 아가일의 머리를 살며시 잡아 올리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건 너의 향후 처분을 결정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너를 신뢰하기 위해서 이기도 해. 그러니까, 네 이야기를 조금 해 줘야겠어.”
어째서 갈란을 배신했는지. 군단장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전선에 투입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마왕군에 들어간 계기는 무엇인지. 루나에게 그런 짓을 한 이유는 무엇인지. 아가토와는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갈란이 용사 파티에게 심었던 불신의 씨앗의 정체가 무엇인지. 마왕군은 대체 무슨 속셈인지.
마왕군을 배신하면서까지, 우리와 함께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내 눈을 바라보던 아가일은, 떨리는 눈동자를 애써 다잡으며 눈을 한 차례 감았다 떴다.
“…좋아. 말할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