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72. 우리 얘기 좀 해요
* * *
따사로운 햇볕이, 부드럽게 내 얼굴을 쓸어 줌에도.
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잠을 잘 새도 없었다. 눈물을 흘리느라 바빴기에.
눈을 감으면, 오스틴에게 행했던 나의 못된 행동들이 계속해서 떠올랐기에.
“…으음.”
엉엉 우느라 건조해진 목을 통해,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 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에 뻐근해진 목을 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그런….”
“…….”
“정의로운 빛으로써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여기저기서 퀭한 모습으로 흐트러져 있는 파티원들과, 그 가운데에서 수많은 술병들과 함께 나뒹굴고 있는 그레이시까지.
이딴 게, 세상을 구할 용사 파티.
“아하하….”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벽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으읏….”
밤새도록 같은 자세로 앉아있던 탓인지, 쥐가 난 다리가 여간 아픈 것이 아니었다. 파르르 떨리는 다리의 근육을 주무르며, 이를 악 물었다.
어느 정도 풀린 다리에 다시금 힘을 주고, 벽을 짚으며 화장실까지 천천히 걸어 나갔다.
세면대에 비치되어 있는, 손톱만 한 크기의 조그마한 마나석이 박혀 있는 수도관에 마나를 흘리자, 마나석이 파란색으로 빛나며 차가운 물을 흘려보내 주었다.
나무 양동이에 절반 정도 물을 채우고, 얼굴에 끼얹듯이 세수를 했다.
피부가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감각에, 퉁퉁 부어 올라 화끈했던 눈가가 어느 정도 진정되는 것 같았다. 몇 차례 더 찬물을 끼얹고, 고개를 들어 눈앞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먼지 비슷한 것이 조금 끼어있는 뿌연 거울을, 물 묻은 손으로 한 차례 닦아 내었다.
퀭한 눈. 흉하게 부어오른 눈두덩이. 방금 자다 일어난 듯, 중구난방으로 뻗쳐 있는 머리카락. 아직 새빨간 피가 보이는, 손톱에게 살이 뜯긴 입술.
그럼에도, 거울 속의 여성은 아름다워 보였다.
“얼굴이, 왜 이렇게….”
내 얼굴. 지구에 있을 때는… 원래 세계에 있을 때에도, 이렇게나 예뻐 보였던가.
원래 세계에서나, 이곳에서나 딱히 변한 구석이 없는 얼굴이건만.
오늘따라 유독, 내 얼굴이 낯설어 보였다.
오스틴에게도, 내가 이렇게 예뻐 보였을까.
만약 그랬다면, 정말 그랬다면… 정말… 정말 기쁠 것 같은데… 그런데….
너는 더 이상 내 옆에 없었다. 아마 우리 쪽에서 먼저 만나러 가지 않는 한, 이제 우리 곁에 머무는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흐윽… 흑….”
조금 진정된 눈두덩이가 다시금 새빨갛게 부어오르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용사랍시고 이곳으로 소환되었을 때, 얼마나 혼란스러웠던가.
1년 간의 고된 훈련 끝에 처음으로 만나게 된 너는, 힘든 타지 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내게 빛이 되어 주었다.
항상 파티의 분위기를 신경 써주고, 나를 비롯한 다른 파티원들의 상태를 걱정해 주었다. 너는 그만큼이나 상냥했고, 그런 너에게 내가 푹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언제나 친절하고 상냥했기에, 그 모습이 영원할 줄만 알았다. 그런 오만했던 속마음은 애써 꽁꽁 숨겨 두었건만, 결국 내 추악한 속마음은 배가 갈라져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가슴속이 답답했다. 무언가 기도를 꽉 틀어막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너무나도 답답해서, 가슴팍을 꽉 움켜쥐었다. 무언가 울컥 솟구치는 느낌에,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숙였다.
“흐윽… 오스, 틴… 나, 나… 나 너무, 아파….”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사르륵 흘러내려, 내 얼굴을 가려 주었다. 그것이 어쩐지 너무 편안해서, 그래서, 그저 그렇게.
“흐으… 흐…”
이제 내 얼굴을 볼 사람도, 봐줬으면 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양동이 위로 눈물이 뚝뚝 흐르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길 한참.
“…용사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이사벨….”
성녀, 이사벨.
언제나 차분하고 침착했던 그녀의 눈동자에,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이사벨은 우리들 중에서 유일하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저, 밤새도록 기도문을 외울 뿐이었다.
“…괜찮으신가요?”
그러고 보니, 나를 이 세계에 소환한 것도… 이사벨이었지.
“…네 눈에는 이게, 괜찮아 보여?”
이사벨이 나를 소환하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고등학교 생활을 마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가슴 아픈 일을 겪지도 않았을 텐데. 네가 나를 소환하지 않았다면, 내가 3년의 시간 동안….
“실례하겠습니다.”
점차 증오심을 불태우는 내게, 이사벨이 다가와 치유의 빛을 쬐어 주었다.
따스한 품속에 안겨있는 듯한,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한 느낌. 거칠어졌던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
“조금, 진정이 되셨나요?”
“…응. 미안.”
이사벨이,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얘기 좀 하죠.”
* * * * *
“선배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작별인사도 할 겸, 베키에게도 얼굴 좀 비춰야지. 슬슬 메텔하임으로 떠날 거니까.”
“으흠~. 베키 씨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네요. 좋은 물건을 받았으니까요.”
실비아를 동료로 받아들이고 나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여관에서 대충 점심을 때우고 난 뒤, 우리는 수도로 떠나는 여행길에 필요한 물건들도 살 겸, 베키와 만나기 위해 도박장으로 향했다.
“그래, 그래. 그런데….”
나는 내 옆에 꼭 붙어서 걷는 로빈을 힐끔 바라보았다.
“좀 떨어져서 걷지 그래? 걷기가 불편한데.”
내 팔을 꼭 끌어안은 로빈의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려 하자, 로빈이 내 팔을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선배님. 벌써 잊으셨어요?”
친구 이상 연인 미만부터 시작하자는, 그걸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이라더니, 이건 완전 연인 행세잖아.
…아닌가?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말도 안 되는 애매한 기준에, 나도 조금씩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 맘대로 해.”
“헤헤… 걷기 불편하시면, 조금 풀어드릴게요.”
“아냐. 딱히 걷기 불편한 건 아니고….”
걷기 불편한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것보다는, 나와 로빈을 미묘한 눈초리로 힐끔거리는 루나와 알렉시스 공녀가 더욱더 신경 쓰였다.
대체 뭐냐. 저 살벌한 눈빛은.
알렉시스 공녀의 시선을 의식하기 무섭게, 우리보다 앞에서 걷던 그녀가 발걸음을 늦추며 우리의 옆에 나란히 섰다.
“…로빈. 조금 떨어져서 걷지 그래요?”
“오우….”
말투가 상당히 싸늘하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에, 눈치껏 로빈의 팔짱을 슬쩍 풀었다.
하지만, 로빈은 오히려 팔짱을 낀 팔에 더욱더 힘을 주며 알렉시스 공녀의 말을 되받아 쳤다.
“오르엔. 이렇게 나란히 걸으면, 지나가는 행인분들께 민폐라고?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도 괜찮아.”
“…그건.”
확실히. 세 명이서 나란히 걷고 있으면, 길을 막으니 행인들에게 폐를 끼치긴 하지. 알렉시스 공녀 역시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모양인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혀를 차며 우리와 멀어졌다.
“…로빈. 나중에 얘기 좀 해요.”
“그래. 나중에 단 둘이… 아니, 루나도 껴서 얘기 좀 하자. 나도 할 얘기가 있거든.”
“무슨 얘기인데?”
로빈과 알렉시스 공녀의 대화에 끼어들어 묻자, 로빈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 치며 대답했다.
“선배님은 모르셔도 돼요.”
“쩝… 그런 거야?”
“그런 거예요.”
결국 로빈을 질질 끌다시피 걸으며, 베키의 도박장으로 향했다. 루나와 알렉시스 공녀의 눈초리가 여전히 따갑기는 했지만, 나중에 자기들끼리 얘기한다고 했으니까.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
“그나저나, 너 알렉시스 공녀님 하고 말 놓은 거야?”
“네. 좀 됐어요. 알렉시스 공녀님도 존댓말은 안 하셔도 되는데, 입에 붙은 말투라서 어쩔 수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친해지면 좋지, 뭐.”
로빈에게 한눈팔다가 넘어지지 않도록 시선을 앞으로 돌리고, 메텔하임까지의 여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마차를 타고 있다는 가정 하에, 쉬지 않고 달린다면 대략 이틀 정도가 걸린다. 말들을 혹사시켰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넉넉히 삼일 정도로 잡으면 충분할 것 같다.
“메텔하임… 수도는 오랜만에 가게 됐네.”
레인저에서 생활하느라 메텔하임에서 나름 오래 살았다고 자신하지만, 마지막으로 메텔하임에 갔던 것이 자그마치 2년 전이다. 군단장인 기간트와 갈란을 잡고, 군단장의 현상금을 받을 생각에 흥분한 상태로 메텔하임에 갔었지. 그때, 현상금으로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금화 더미를 보고, 용사가 얼마나 입이 떡 벌어졌던지….
…그립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갈 텐데.
“…쯧.”
머리를 흔들어,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을 털어 내었다. 이제 남남인 사람들한테, 굳이 마음 쓸 필요는 없지.
그 와중에, 앞장서서 걷고 있던 로이먼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퀼른으로 파견을 갈 때만 하더라도 조금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기는 했습니다만….”
“좋지 않은 소문?”
“예. 메텔하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미약한 지진이 발생하다 보니, 중앙 마탑과 메텔하임 대성당 측에서 진상규명에 나섰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진? 뜬금없이?”
“예. 그렇습니다.”
“그건 좀… 희한하네.”
로이먼의 말에, 알렉시스 공녀 역시 증거를 보태어 주었다.
“저희 아카데미의 교수님들도, 메텔하임에서 일어나는 정체불명의 지진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흠.”
메텔하임은 건국 초기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던 곳이다. 건물을 지탱하는 지반 또한 단단하고, 애초에 메텔하임 자체가 건국 초기부터 정밀하게 계획되었던 도시이기 때문에, 건물들 또한 내구성이 높다.
그런 메텔하임에서, 뜬금없이 지진이라?
지진은 천재지변에 속하며,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먼 옛날 존재했던 대지의 정령들이 남아 있다면 마법으로 어떻게든 되겠지만, 최후의 바위 정령이었던 기간트가 소멸한 이상, 대지의 정령은 사실상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상태라고 봐야 한다.
만약 정말로 천재지변에 해당하는 지진이라면, 막을 방법이 거의 없을 텐데.
“그래서, 원인은 알아냈대?”
“고위 마법사들의 조사 결과, 지반 깊숙한 곳에 넓은 동공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들었습니다. 마탑 측에서는 고대 드워프들의 도시가 아니냐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만,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그래? 나도 고대 드워프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내 말에 부정하듯, 로이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을 이었다.
“고대 드워프들의 도시는 절대 아닐 겁니다. 메텔하임이 위치한 곳에 지하 대도시를 건설했다는 기록은, 고대 문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알렉시스 공녀는 나와 같이 고대 드워프들의 도시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고대 드워프 제국과 관련된 문헌들은 대부분 소실된 상태이지 않나요? 지금에 이르러서는 고대 드워프들의 제국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 그때 당시와 관련된 자료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요.”
“하지만, 그렇게나 넓은 지하 대도시를 건설할 기술력이 된다고 보십니까?”
“강철의 도시인 벨리온만 해도, 고대 드워프들이 지었다고 하니까.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겠군.”
“루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이거, 로이먼 빼고 전부 고대 드워프들의 지하 도시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혼자 남은 로이먼의 외로운 싸움에, 왜 이렇게까지 물러서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그럼, 로이먼. 너는 뭐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 로이먼이 눈을 희번득하게 빛내며 바싹 다가왔다.
“좋은 질문입니다. 형제님.”
“아니, 얼굴 좀.”
“저는 그곳이, 고대 악마가 봉인되어 있는 곳이라고 확신합니다. 일종의 무덤과 같은 셈이지요.”
아. 그럼 그렇지. 신앙에 미친 로이먼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
“이번에 메텔하임으로 올라가게 된다면, 대성당을 방문해 추기경 전하를 만나 뵐 생각입니다. 그곳은 고대의 악마가 봉인되어 있는 무덤이 확실합니다.”
“…추기경 전하께서 너 같은 별종을 만나 주시냐?”
“모름지기 부딪혀 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입니다. 예법 상으로 상급 전투 사제는 주교급에 해당하니, 만나 뵙지 못 할 것도 없지요.”
“넌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야. 너도 알고 있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신념이 강하다고 봐주십시오.”
“그 신념도 지나치면 병이야. 넌 이미 중증 같다.”
로이먼의 헛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우리는 어느새 도착한 베키의 도박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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