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73. 동작 그만
* * *
“잘 왔어, 오스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한 손에 술잔을 들고 있는 베키를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베키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깔끔하면서도 적당히 몸매를 드러내는 진녹색의 턱시도를 입은 베키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녹색 턱시도네? 어디 귀한 분이라도 만나 뵙고 오셨나?”
“흐흥. 기억해 주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골라 준 옷인데, 당연히 기억하지. 너 누구 만나러 갈 때마다 그 옷 입고 입었잖아.”
나는 등 뒤로 묶인 손목을 몇 차례 흔들어 보곤, 베키에게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손님 대접이 살벌한데.”
“손님이라. 정말 손님이었다면 이렇게 안 하지.”
베키의 차가운 눈빛 속에, 희열이라는 감정이 미약하게 담겨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성질 더러운 뒷 세계 여왕님은, 사람을 이렇게 꽁꽁 묶어서 꿇어 앉혀놓고 희열을 느끼는 미친년이니까.
“우리 애들은 어디로 데려갔어?”
“건너편 방에 모셔 놨어. 맛있는 음식도 대접했으니까, 그렇게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는 건 그만두지 그래?”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내게, 베키가 다가와 속삭였다.
“그 눈깔, 파버리고 싶어 지니까.”
“진짜 씨발, 적당히 좀 하면 안 되냐? 옛날에 내가 실수 좀 해서 수비대한테 털린 적이 있다고 하기로서니, 이렇게까지 나올 필요는 없지 않나?”
“그때, 내 사업은 완전히 끝장날 뻔했다고. 운반책이 중간에 수비대에 끌려갔는지 안 끌려갔는지, 똥줄이 타게 기다리던 내 심정을 네가 알기나 해?”
“오늘은 진짜 별거 아닌 걸로 온 거니까, 이것 좀 풀어줘.”
“음….”
베키는 고민하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손에 들린 술잔을 한 차례 기울이더니, 이내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입김을 후 불었다.
“아니. 우리 오스틴은, 지금 이 상태가 제일 잘 어울려.”
“어우, 술냄새.”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면,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나도 여자야, 오스틴.”
말은 저렇게 해도, 나는 지금 베키가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포니테일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는 것은, 베키가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버릇 중 하나니까. 본인은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 같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지난번에는 진짜 죽일 듯이 달려들었으면서.”
“흐흥. 그럴 일이 있었어. 아니, 사실상 네 덕분이라고 봐야겠지?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오스틴 너도 쓸모가 있었네.”
“그래? 그럼, 금전적인 보상을 기대해도….”
“장님이 되고 싶니?”
“농담입니다. 누님.”
서로 농담까지 주고받는 사이가 될 정도로 기분이 좋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봤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런 내게, 베키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내게 소파를 권했다.
“앉아.”
“이거부터 풀어 줘야 앉던 말던 하지.”
“이미 풀었잖아. 생색내지 말고 빨리 앉아.”
방금 막 내 손목을 꽁꽁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낸 찰나인지라, 나도 모르고 어깨를 들썩이며 뜨끔하고 말았다.
“누, 눈치 빠른데?”
“그럼. 이 바닥에서 대가리 행세를 하려면, 이 정도 눈치도 없으면 안 된다구.”
주춤주춤 몸을 일으켜, 여전히 싱긋 웃고 있는 베키의 건너편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고급 소파의 푹신한 감촉에,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쭉 늘어뜨렸다.
그런 내 모습에도, 베키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단검이 날아왔을 텐데, 살다 보니 신기한 일도 다 있네.
“그래서, 왜 왔어?”
“별건 아니고, 우리는 이제 곧 떠날 생각이라서 말이야. 얼굴도 보고, 가게 꼬락서니도 볼 겸 해서 찾아왔지. 갈란의 마물이 여기에도 들이닥쳤다면서?”
“그렇지. 다른 사업장에도 조금 피해가 있긴 했지만, 큰 타격은 아니야.”
“나 덕분에 대처가 빨랐던 거, 알지?”
“잘난 체 하지 마. 네가 없었어도, 그 정도 마물은 우리 애들 만으로도 어떻게든 막았을 거니까.”
“이 덩어리들로 마물을 어떻게 막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 말에, 베키를 포함해서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몇 명의 조직원들이 나를 노려보기에, 나도 똑같이 험악한 눈빛으로 마주 보았다.
“뭐. 어쩔 건데. 꼽냐?”
“…보스 앞에서,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라.”
“아주 꼴값을 싼다. 달건이 새끼들이 무슨.”
내 옆에 서 있던 근육질의 조직원이 순간 몸을 움찔했지만,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서로 마주 노려보고 있으니, 베키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아…. 너희, 잠깐 나가 있어.”
“하지만, 보스….”
“아니면, 뭐. 너희들이 쟤 담궈버릴 실력이나 돼? 우리끼리 할 얘기 있으니까, 전부 나가.”
“…알겠습니다.”
베키가 고개를 까딱이자, 그녀의 조직원들이 각자 목례를 올리며 신속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에 나가던 새끼가 나를 끝까지 노려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해야 깡패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그래서, 오스틴. 할 말은 그게 다야?”
“음. 그렇지?”
할 말도 다 했으니, 슬슬 나가야겠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베키가 손을 들어 올려 나를 저지했다.
“아니, 앉아. 아직 할 얘기가 남아있어.”
“…뭔데?”
내 덕분에 사업장들이 큰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었으니, 부스러기라도 던져 주려나? 나는 일으키려던 몸을 다시금 소파에 뉘었다.
한동안 탁자를 두들기며 나를 빤히 바라보는 베키의 시선에, 슬쩍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뭐, 뭔데 그래?”
“이번에 네가 시장에서 갈란과 한바탕 해준 덕분에, 시장 쪽 상권의 절반을 가져올 수 있었거든.”
“…아.”
확실히, 우리 파티와 갈란이 박 터지게 싸우는 동안 주변 피해가 만만치 않았지. 마물들 몇몇도 시장을 휘젓고 다녔고.
거의 반파가 된 하르만 중앙 시장과, 조금의 피해만 보고 끝난 베키의 사업장. 똑같이 보호세를 낸다면, 상인들이 어느 쪽에 붙고 싶어 할지는 당연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던 거구나. 하긴, 베키는 매번 상인 조합장을 꼴도 보기 싫어했으니까.
“이번에 만나고 온 것도, 영지 대리인과 상인 조합장이야. 시장 상권의 절반을 양도 받음으로써, 우리도 양지에 진출할 수 있게 됐거든.”
“이야… 그건…. 확실히 잘 된 일이네.”
“그렇지.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일이지. 그런데….”
말끝을 흐린 베키는, 술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쭉 기대었다. 내가 방에 들어온 이후로, 베키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웠다.
잠시 뜸을 들이던 베키가, 이내 몸을 가까이하며 진지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상인 조합장, 그 노친네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더라고. 우리에게 따지고 들자니 우리가 저지른 짓도 아닌지라, 우리 쪽으로 화살을 돌릴 수도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갈란이라는 놈 때문에, 밥줄이 위태로워졌으니 말이야.”
…이거 어째 내 잘못 같은데.
아니, 갈란 잘못이지. 음. 나는 오히려 이 도시의 영웅이라고.
“나도 비슷한 경험을 겪은 적이 있는 만큼…. 상인 조합장, 그 노친네의 심정을 이해해줄 수 있단 말이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베키는 목이 타는 듯, 술잔에 술을 따르고 한꺼번에 들이켰다.
베키의 눈빛은, 이미 조금 전의 기뻐 보였던 베키가 아니었다.
저건, 살인마의 눈빛이다.
“그 노친네가 노망이 난 건지, 우리 약방들 중 하나를 수비대에 찔렀더라고? 저쪽 상인들도 몇몇 거래하는 곳이라서 지금까지 찌르지 않고 있었는데…. 우리가 상권의 반을 가져가니, 노친네 쪽에서도 제대로 칼을 갈았어.”
“엄….”
“지금까지는 그 노친네와 신경전만 벌여왔지만, 이번에는 선을 넘었어. 내 사업장을 건드리는 걸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너도 잘 알지?”
“그… 렇지…?”
시발. 그냥 나가고 싶다. 우리 엄마 다음으로 무서운 여자인 베키의 싸늘한 태도에, 한시라도 빨리 이 방에서 나가고 싶어졌다.
“이번 기회에, 그 노친네에게 제대로 매운맛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어.”
“아하하…. 그렇구나? 꼭 성공하길 빌게! 그럼, 나는 이만….”
“잠깐. 어딜 가려고?”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건만, 베키의 심상치 않은 말투에 다소곳이 자리에 착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노친네의 직속 상단이 운영하는 사업장 중에서, 돈이 가장 많이 굴러다니는 곳이 있어.”
감이 온다. 분명히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이라고, 내 직감이 온몸으로 경고하고 있었다.
“르베너 환전소. 중앙 시장에서 서쪽으로 3 골목 거리에 있어. 수인, 엘프, 드워프, 신성교국까지. 온갖 나라에서 물건이 들어오는지라, 환전소만큼 돈 냄새가 진한 곳이 또 없거든.”
“음…. 그래서, 왜 나한테 그 얘기를…?”
“그쪽 환전소장도,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상인 조합에 불만을 가지고 있어. 이번에 확실하게 침을 발라 두면, 분명 우리 쪽으로 넘어올 텐데…. ”
“으흠, 그렇구만. 오호….”
“작업을 치려 해도 마땅한 인원이 없어서 말이야. 우리 애들로 작업을 치면, 우리 짓이라는 게 대번에 들통나잖아? 미안하지만, 일 좀 거들어 주면 좋겠어.”
그럼 그렇지. 시팔. 뭘 하라는 건가 했더니, 결국 강도짓이나 하라는 거 아니야.
내가 그런 짓을 언제 해 봤다고….
…마차 훔칠 때 해 보긴 했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조금….”
“중앙 마탑의 게이트 관리사 둘.”
베키의 말에,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가려던 도중에 몸이 굳어 버렸다.
“싸움에 휘말린 건지, 아니면 마물들에게 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칼에 찔려서 죽었다던데?”
“어, 음…”
“이번 일을 도와주면 예전에 있었던 일도 묻어주고, 더불어서 게이트 관리사에 대한 것도 깔끔하게 정리해 주지. 물론, 물질적인 보상도 조금은 얹어줄 수 있어.”
베키의 제안에 순간 확 끌렸지만,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는 강도가 아니다. 나는 범죄자가 아니다. 베키가 도와주지 않더라도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나는….”
* * * * *
대륙 각국의 물자와 돈이 흘러 들어오는 상업도시 하르만은, 각국의 통화에 맞추기 위해 상인 조합에서 지원해 주는 거대한 환전소가 존재한다.
그곳이 바로 이곳, 르베너 환전소.
“하암… 지루해라….”
평소에는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던 환전소 이건만, 최근 군단장이 날뛰는 바람에 상인들의 출입이 조금 뜸해졌다.
“이번에 교대하면, 조금만 자고 올까….”
환전소에서 일하는 소피아는, 흔치 않은 휴식시간을 만끽하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환전소를 찾는 상인들이 그리 많지 않으니, 오늘은 일찍 퇴근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렇게 업무가 널널했던 것이 얼마만인가.
그래 봤자 하루 이틀 정도 지나면 다시 바빠지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여유로운 시간을 마음껏 만끽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다른 이들은 모를 것이다.
“소피아! 소장님께서는?”
“아, 올가. 소장님께서는 상인 조합에 가셨어. 조합장님과 볼일이 있으신가 봐.”
“최근에 조합장님과 말싸움하시는 걸 봤는데, 무슨 일 있나?”
“글쎄…? 나도 자세히는….”
쾅—!!!!!!
“꺄아악?!”
“뭐, 뭐야…!”
환전소의 입구를 굳건히 지키던 커다란 문이, 굉음과 함께 저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히는 비상식적인 광경을 보곤, 소피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다, 당신들 누구야!”
문 옆에 서있던 상인 조합 소속의 경비들이 곧바로 창을 들어 올렸지만, 누군가의 발차기에 힘없이 나가떨어져 버렸다.
소피아와 올가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카운터에 고개만 빼꼼 내밀고 상황을 살펴보았다.
밤색의 로브로 온몸을 꽁꽁 둘러 싸매고, 커다란 가면으로 얼굴을 감춘 여섯 명의 괴한들이, 각자 커다란 자루를 등에 메고 천천히 환전소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맨 앞에 서 있던 괴한은, 이윽고 바닥에 자루를 털썩 내려놓더니, 쇠뇌를 빼 들곤 환전소 안의 사람들을 겨누며 소리쳤다.
“동작 그만!!! 이 씨발련들, 뒤지기 싫으면 전부 엎드려!!!!!!”
환전소가 생긴 이래 최초로, 무장 강도가 들이닥친 역사적인 날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