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75화 (75/106)

〈 75화 〉 74.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

* * *

“스읍… 후우…. 그래, 자네도 결국 나가겠다고?”

노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초의 연기에, 르베너 환전소의 소장인 라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 노친네가 진짜…. 손님을 앞에 두고 연초만 뻑뻑 피우는 꼴 하고는….’

과거에는 어떠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 눈앞의 노인은 너무나도 초라하게 늙어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새, 수수한 몸짓, 수수한 응접실. 하지만 그럼에도, 라스는 노인의 몸짓 하나하나를 빠뜨리지 않고 눈에 담아내었다.

늙어서 풍을 맞은 탓인지, 노인의 팔은 가끔씩 허공에서 멈칫하며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머리는 이미 백발이 된 지 오래이고, 언제나 호탕하게 웃어젖혔던 훤칠했던 얼굴은 주름이 자글자글 했다. 그럼에도, 노인의 얼굴은 썩 나빠 보이지 않았다.

중년미라고들 하던가. 눈앞의 노인이 중년의 나이는 아니지만, 이렇게 다 늙어 빠졌음에도 결코 흉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대답은?”

정신없이 노인의 행동을 훔쳐보던 중, 대답을 재촉하는 노인의 말에, 라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예, 어르신. 슬슬 홀로서기를 하고 싶습니다.”

“홀로서기는 무슨… 이번에 그, 저기 저… 중앙 시장이 못 볼 꼴을 봤으니, 불안한 것이겠지.”

눈앞의 노인은 분명 곱게 늙은 편에 속했지만, 결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하면, 나름 하르만에서 가장 거대한 환전소의 소장 자리를 맡고 있는 라스가, 어째서 이 초라한 노인에게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굽신거리고 있는가?

전설로 남을 상인. 대륙 최고의 거상이자, 누구도 그 재산을 가늠할 수 없다는 대부호. 돈의 흐름을 속속들이 꿰차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거물 중의 거물.

눈앞의 노인은, 그런 인물이었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확실히 걸물이긴 걸물이야.’

노인의 행색이 초라해 보일지언정, 황금빛으로 빛나는 노인의 눈은 소싯적 그대로였다. 돈의 흐름을 보는 눈. 물건의 정확한 가격을 재고, 어떻게 해서든 이득을 취하는 탐욕의 증표.

황금안(???).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그저 어디에나 널려있는 노란색 눈으로 보일지언정, 상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 노인의 눈은 확실히 남다르다.

바로 지금도, 노인의 눈은 라스의 자질을 재단하려는 듯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리며 그 값어치를 매기려 하고 있었다.

천재적인 대 상인이자 하르만 상인 조합의 조합장, 반티크 비질.

대륙에서 가장 유명하고 거대한 상단인 비질 상단의 상단주를 맡고 있으며, 운하가 자리 잡고 있는 대륙 최고의 상업도시인 하르만의 무역을 꽉 잡고 있는 인물.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그의 성공신화는 자뭇 상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실로 전설 속의 영웅담 그 자체였다.

반티크 비질은, 손에 들린 연초를 유리로 만들어진 재떨이에 비벼 불을 끄며 말했다.

“콜록!… 연초 연기가 불편하다면, 미안하네. 요즘 몸이 좋질 않아서, 사제들도 치료용 연초를 자주 피워 달라고 아주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뭐, 자네가 이해해 주게.”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하….”

“괜찮기는. 얼굴이 아주 똥 씹은 표정인데, 무얼.”

아. 전부 들켰구나. 최대한 표정을 감추려 노력했건만, 수십 년간 상인으로서 살아온 반티크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반티크는 아직 옅은 미소를 띠고 있지만, 이래 놓고 돌려보낸 뒤에 청부업자를 붙일지도 모르는 일. 상인 조합의 기세를 업고 환전소의 소장 자리에 앉았으니, 아마 라스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한 뒤 새로운 소장을 앉히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라스는 침을 꿀꺽 삼키곤, 반티크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어, 어르신. 그래서… 상인 조합을 나가는 것은, 어찌….”

“저쪽에서는.”

“…예?”

그런 라스에게, 웃음기를 싹 지운 반티크가 자세를 고쳐 앉고 재차 물었다.

“저 깡패 새끼들 밑으로 들어가면은, 보호세를 덜 거두어 주겠다…. 뭐, 그러드나?”

“무, 무슨 말씀이신지….”

“나를 속이려 들지 말게.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반티크의 황금빛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라스는 그 고요한 눈동자에 물결치는 어떠한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분노하고 있었다.

“그 깡패 새끼들 밑으로 기어 들어가면. 저들이 라스, 자네를 중히 기용할 것이라 생각하는 겐가? 천만에!”

“어르신….”

“나 반티크 비질이야! 저런 깡패 새끼들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다! 내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저런 질 낮은 깡패 새끼들을 이 도시에서 지워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닌…!”

잠시 말을 끊은 반티크는, 답지 않게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숨을 골랐다.

“…내 긴말하지 않겠네. 다시 생각해 보게.”

반티크의 노기 어린 호통에, 라스는 잠시나마 상인 조합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하지만.

“…다시 재고해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라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반티크가 비록 하르만의 상권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지만, 이미 영주 대리인과 뒷세계 여왕과의 삼자대면에서 처참하게 깨졌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뒷세계의 여왕. 그녀 역시, 반티크와 비교해도 모자랄 것이 없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상인 조합의 무거운 회비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쳐먹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구만.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네. 다만, 내가 저 깡패 새끼들의 사업장 하나를 묻어 버렸다는 것만 명심하게.”

“ㅇ, 예?!”

이 노친네가, 드디어 노망이 났단 말인가. 뒷세계 여왕은 자신의 사업장을 끔찍이도 아끼는 여자다. 그런 그녀의 사업장 중 하나를 묻어 버렸다니.

“아, 아니… 어르신! 잠시만요! 무, 묻어 버렸다니요?! 그게 무슨…!”

“클클… 약쟁이 새끼들이 돈 굴리는 곳을, 저기 저… 수비대에 찔러 버렸지. 우리 쪽 상인 몇몇도 다소 출혈이 있지만은, 저쪽 돈줄은 약쟁이들이 반일세. 이 정도 손해를 떠맡을 가치는 있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뭐, 저쪽에서 보복할 것을 걱정하는 겐가?”

그렇다. 누가 뭐라 해도, 상대는 사람 하나 재껴버리는 것 정도는 눈도 깜짝 안 하는 뒷세계의 지배자. 그런 그녀에게 싸움을 걸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걱정 말게. 이미 수비대장과 이야기가 되어 있으니. 저쪽에서 섣부르게 먼저 치고 들어오면, 수비대를 풀어서 일망타진하면 되니 말일세.”

“아…!”

“물론 저쪽도 멍청이들은 아니니, 보복을 할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 걱정하지 않아도 좋네.”

라스는, 상인 조합을 나가는 것을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되었다. 이걸 나가야 하나, 남아 있어야 하나?

지금까지의 말만 들어 보았을 때는, 반티크의 계획이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인다. 아무리 뒷세계의 여왕이라고 하더라도, 수비대와 상인 조합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테니.

쿵! 쿵! 쿵! 쿵!

라스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그때, 누군가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문이 드르륵—! 열리고, 반티크의 심복 중 하나가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왜 이리 소란이야?”

“어, 어르신…! 그…!”

“천천히 말하게. 무슨 일인데 그러나?”

헉헉 거리며 숨을 돌리던 반티크의 심복이, 이윽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크, 큰일입니다! 르베너 환전소에 강도가 들이닥쳤습니다!”

“…무, 뭐라?!”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던가, 반티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반티크와 라스는 곧장 방을 뛰쳐나갔다.

* * * * *

“어후, 씨팔 무거워….”

좁고 인적이 없는 골목길로 들어온 우리는, 어깨에 들쳐 멘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고 답답한 가면과 로브를 벗어던졌다.

베키의 부탁에 따라, 환전소를 털어먹는 것은 순조롭게 끝났다. 상인 조합에서 파견해 준 경비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창질도 제대로 못하는 얼간이들 뿐이었으니, 일이 이렇게 싱겁게 끝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으, 어깨 아파라…. 선배님. 근데 우리 이런 짓 해도 되는 건가요?”

“뭐, 어쩌겠어. 게이트 관리사 죽인 걸 어떻게 덮을지 걱정이었는데, 마침 잘됐지 뭐.”

“으음… 저는 잘 모르겠네요….”

선량한 아가씨인 알렉시스 공녀는, 아무래도 이번 일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명문 귀족가의 자제가 환전소를 털어먹는 데 동조했다니. 이건 뭐 들키면 빼박 수도원 행일 것이다.

“공녀님. 괜찮습니다. 베키가 하는 일은 믿어도 좋아요. 그 녀석, 일처리만큼은 확실하거든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차피 다시 돌려줄 돈이라는데, 문제없지 않겠습니까? 그냥 저희가 잠깐 맡아두는 것뿐이에요. 그렇지, 로이먼?”

“더러워진 돈을, 저희가 깨끗이 정화시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거 완전 돈세탁….”

“어허, 로빈. 괜찮대도.”

베키의 계획대로만 굴러간다면, 아마 환전소장은 상인 조합을 등지고 베키의 밑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베키는 큰 피해를 입은 환전소를 지원해 준다는 명목으로 우리가 훔쳐 온 돈을 다시 환전소장의 손에 쥐여 주면 되는 일이다.

돈도 결국에는 원래 주인에게 돌아갈 예정이고, 내 친구 베키에게도 좋은 일이라니. 이건 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구만.

“…그런가요?”

“맞는 말이야. 들키지만 않으면 범죄가 아니지.”

“…실비아. 그건 너무 범죄자 같은 발상인데?”

“선배님. 우린 이미 범죄자예요.”

“쓰읍! 범죄자라니. 우린 베키와 비즈니스 파트너 일 뿐이야.”

그렇게 빵빵한 돈 보따리를 깔고 앉은 채 수다를 떨고 있으니, 베키가 말 한 대로 돈을 회수할 인원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작업하신 분들이십니까?”

“그래. 베키가 보냈지?”

“예. 실례지만, 물건은….”

“여기.”

몸을 슬쩍 비켜주고 황금빛의 금화로 가득 들어찬 자루를 보여주니, 조직원이 감탄을 흘리며 물었다.

“허어…. 많기도 하군요. 이게 다입니까?”

“최대한 꽉꽉 눌러 담은 거야. 환전소에 돈이 어찌나 많은지, 이렇게나 빼왔는데도 아직 한참 남아 있더라.”

“그렇군요.”

이윽고, 자루에 담긴 금화들이 나무로 된 술통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방금 털고 나온 자루보다는, 술통에 숨겨서 운반하는 것이 안전하겠지.

“허….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 군.”

“루나. 저런 거 따라하면 안 돼.”

“나, 나도 알고 있다….”

돈이 전부 옮겨지고, 돈이 들어찬 4개의 술통이 손수레에 옮겨졌다.

“수고하셨습니다. 뒷일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그래. 욕봐라.”

깡패치곤 겸손한 조직원을 배웅해주곤, 혹시나 겹치지 않도록 우리가 먼저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빨리빨리 움직여!”

“젠장, 대체 어떤 미친놈이 환전소를 털어 먹은 거야?!”

저 멀리서 다급히 뛰어오는 상인 조합 소속의 경비들을 자연스럽게 지나치며, 태연하게 베키와 접선하기로 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쉽네.”

“쉽네요.”

“쉽군.”

이거, 직업을 강도로 바꿔야 하는 건 아닌가 몰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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