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75. 당신이 떠나기 전에
* * *
“…할 말이 뭔데?”
힘없는 용사의 물음에 동조하듯, 마야와 아드리엔 역시 탁한 눈동자를 굴려 이사벨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사벨은 밤새도록 기도문을 읊느라 피로해진 목을 가다듬으며, 방구석에서 술을 홀짝이는 그레이시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레이시. 술은 그만 드시고, 이쪽으로 와 보세요.”
“…….”
“하아….”
오스틴에게 알 수 없는 말을 들은 뒤부터, 그레이시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쩔 때는 실없이 웃기도 하고, 갑작스레 울기도 하며. 그러면서도 손에는 술병을 절대로 놓지 않고, 그렇게 계속해서 술만 마실 뿐이었다.
“…그레이시. 제 말은 들리죠? 거기서 들어주세요.”
여전히 대답은 없었지만, 이미 그레이시에게서 대답을 듣는 것은 포기했다. 이사벨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건너편에 앉은 용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모두 들으셨듯이, 오스틴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에요.”
“흑….”
“미안해… 미안해….”
“다들….”
아직도 마음 아파하는 그녀들의 태도에, 이사벨은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문득, 머릿속 한 편에서는 이러한 의문도 들었다.
‘이 분들은, 왜 이렇게 오스틴을 그리워하는 걸까요….’
단순히 죄책감이라고 생각 하기에는 도가 지나치다. 아무리 쌓이고 쌓여온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손 쳐도, 이렇게까지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마치….
‘연인을 잃은 심정… 같다고 할까요.’
설마, 다들 오스틴에게 연심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설마. 그렇다고 하기에는, 불신의 씨앗이 심어지기 전에도 딱히 이렇다 할 신호는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아드리엔이 심했다.
아드리엔은 처음부터 오스틴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 눈치였다.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오스틴을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이, 이사벨…. 그래서, 할 애기가 뭐야…?”
물론, 마야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이사벨은 퀭한 모습의 마야를 바라보곤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마야는 언제나 남 모르게 오스틴을 향한 호감을 표현하곤 했다. 다른 이들은 눈치 채지 못했을지언정, 이사벨만큼은 알고 있었다. 아직 파티의 사이가 좋을때는, 오스틴과 함께 불침번을 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불신의 씨앗이 심어진 이후부터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이사벨…?”
“…아. 흠흠….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이게 아니지. 이사벨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잡념을 떨쳐 내었다.
“저는, 아직 오스틴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이사벨의 확고한 말투에, 아드리엔이 헛웃음을 흘리며 비아냥 거렸다.
“이사벨. 그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래.”
“그러면 어째서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고, 이렇게 한심하게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거죠?”
“무, 뭐?”
평소와는 다른 이사벨의 공격적인 말투에, 아드리엔을 비롯한 모든 이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방구석에서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그레이시도 슬며시 고개를 들 정도였으니까.
“오스틴이 저희와 함께 하고 싶지 않을지언정, 저는 아직 오스틴을 포기하지 못해요. 아니, 파티에 다시 돌아오는 것은 이제 바라지도 않아요. 하지만….”
이사벨의 목소리가 약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눈물을 꾹 참고 밤새도록 기도문을 외웠던 이사벨의 눈이, 촉촉이 젖어 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헤어지면, 정말 두 번 다시는….”
이사벨은, 모험 중에 언제나 다정하게 다가와 주었던 오스틴을 떠올렸다. 혼자 불침번을 설 때면, 식기를 정리하고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던 그때 그 시절.
“저는…. 아직 오스틴을 보내고 싶지 않은데…. 제가 저지른 바보 같은 잘못 때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사벨….”
소매로 눈물을 쓱 닦아낸 이사벨이, 이윽고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는 오스틴에게… 다시 한번 사과하러 갈 거예요.”
“…하지만, 이사벨. 오스틴은 분명 우리에게, 앞으로 모르는 사이로 지내자고….”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요.”
이사벨의 말에, 그녀들은 경악했다. 그 말을 그렇게 해석하다니.
“이사벨.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장난 같은 논리에 오스틴이….”
“시도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죠. 적어도, 이렇게 방구석에서 울기만 하는 것보단 나아요.”
용사는 고민에 빠졌다. 오스틴에게 다시 한번 사과하자니,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오스틴이, 우리를 만나 주기나 할까…?”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에요.”
하지만, 용사는 불안했다. 오스틴이 그렇게 매정하게 내치고 갔는데, 이제 와서 그런 말장난 같은 소리를 하며 다가갔다간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잠시 동안 침묵이 가라앉은 방에서, 술병이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이사벨을 따라가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던 그레이시는, 어느샌가 멀쩡히 일어서 있었다. 술을 그렇게 퍼마시고도, 그레이시의 눈은 투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나도, 갈 거야.”
마야까지 동참하니, 이제는 아드리엔과 용사 둘만 남았다.
“용사님과 아드리엔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이러는 거지?”
* * * * *
“수고했어. 확실히, 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해.”
일을 모두 끝내고 베키의 사무실로 돌아오니, 베키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었다.
“뭐, 이 정도는 껌이지.”
“그래? 그럼 일 하나 더 할래?”
“아니.”
“매정하네.”
이제는 익숙한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베키가 건네주는 찻잔을 기울였다.
“그래. 이제 떠나는 거야?”
“그렇지. 백날 여기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흠…. 아쉽네. 네가 원한다면, 정말로 우리 식구로 일해도 괜찮은데 말이지.”
“됐네요. 난 깡패로 살 생각은 요만큼도 없거든.”
“그럴 것 같았어. 아쉽네, 아쉬워….”
그런 나를 바라보는 베키는, 정말로 내가 떠나는 것이 아쉬운 듯한 눈치였다. 아니, 그것보다 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거지?
“…왜. 뭐 할 말 있어?”
“…메텔하임으로 올라 가는 거지?”
“그렇지?”
베키는 내 대답을 듣고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난데없이 벌떡 일어나 자신의 책상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뭔데 그래?”
“잠시만 기다려.”
이윽고 책상 서랍에서 종이와 편지 봉투, 그리고 봉랍을 꺼내 들더니, 곧바로 펜을 집어 들고 무언가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거기, 불 좀 붙여줘.”
“어, 응.”
베키의 지시에 따라 책상에 놓인 성냥으로 양초에 불을 붙이자, 어느새 편지를 다 쓴 베키가 봉랍을 떨구곤,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로 봉랍을 꾹 눌렀다.
“됐다.”
베키의 반지가 떨어지고, 녹색을 띠고 있던 봉랍에는 고양이 문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저 문장은 나도 알고 있었다. 베키의 사업체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문양으로, 베키가 쓴 편지라는 것을 입증하는 문양. 상당히 중요한 편지에만 쓰는 인장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내용이길래 저렇게 까지 하는 걸까.
그렇게 완전히 밀봉된 편지봉투를 한 차례 후 불더니, 편지봉투를 입술로 살짝 깨물어 립스틱 자국을 남기곤 내게 건네어 주는 것이었다.
“자. 이거 가져가.”
“…이게 뭔데?”
“뭐긴 뭐야. 내 인장 쓴 거면 사업 관련 편지인 거 알면서 물어?”
“아니, 그러니까 무슨 사업….”
“그건 몰라도 돼.”
몰라도 되기는, 염병할. 나보고 가지라고 해 놓곤 무슨 내용인지도 안 알려 주는 게 말이야 방구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베키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베키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을 이었다.
“메텔하임에도 내 사업장이 몇 군데 있어. 그중에서, 상업 구역에 있는 쥐새끼한테 전해.”
“…쥐새끼?”
쥐새끼라. 듣도 보도 못한 이명이다. 설마 네발로 움직이는 진짜 쥐새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 테고.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베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넌 대체 아는 게 뭐니? 쥐새끼 로웰,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이 미친년아.
“내가 수도에 안 간지 오래돼서….”
“쯧…. 우리 밑에서 일하는 정보상이야. 상업 구역에 있는 브룩스 잡화점에 가서 물어보면, 아마 쥐새끼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줄 거야. 가서 그년한테 이 편지를 전해주면 돼.”
“그년? 여자야?”
“여자인데, 흔치 않은 쥐 수인이야. 뒷골목을 전전하면서 살아온 모양인데, 이런저런 정보에 귀가 꽤 밝아. 이런저런 인맥도 많고. 아마 너도 자주 이용하게 될걸?”
“…흠.”
쥐 수인에, 정보상이라. 어쩐지 이미지가 딱 맞아떨어진다.
“네게 도움 되는 내용도 적어 놨으니까, 가서 편지만 건네주면 쥐새끼 쪽에서 알아서 해 줄 거야.”
“알겠어. 그럼 이제 슬슬….”
편지봉투를 낚아채려 하자, 베키가 편지봉투를 위로 휙 들어 올리며 내 멱살을 잡아끌었다.
“빼먹은 게 하나 있지 않아?”
“…입단속하겠습니다, 누님.”
“그래. 아무리 내용이 궁금하더라도, 편지봉투를 함부로 열지는 말고. 나는 상관없는데, 그 미친년은 내가 보낸 편지를 남이 읽는 걸 엄청 싫어하거든.”
“여부가 있겠습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솔직히 편지 내용이 궁금했다. 실비아가 어떻게 해 주지 않을까? 실비아도 밀랍을 다루니까, 봉랍 정도는 어떻게든 다시 복구를….
“허튼 생각하지 말고. 얼굴에 다 보이거든?”
“어, 음. 그럼.”
그냥 얌전히 편지만 전달해 주자.
“이제 꺼져. 나 바빠.”
“싸가지 하고는…. 난 간다. 나중에 보자.”
“멀리 안 나간다~.”
베키의 도박장을 빠져나오고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원래는 내일 출발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베키의 일을 도와주느라 이런저런 식료품을 보충하지 못했다.
“…하루만 더 쉴까.”
최근에 고생 좀 했으니까,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