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77. 진짜 바보들
* * *
이사벨은, 마야가 오스틴이 머무는 여관의 위치를 알고 있을 줄만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사과를 하자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는데.
어제부터 당장 오스틴을 찾으러 나섰으나, 설마 마야가 길을 까먹었을 줄은 몰랐다.
마야의 기억력만을 믿은 것은 오판이었다. 하르만은 퀼른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은 도시였고,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혀있는 길 중 로빈에게 안내받았던 여관의 위치를 기억해 내는 것은 무리였다.
“어디야…! 대체 어디야…!”
그레이시는 다급해졌다. 이제야 소년을 만날 준비가 되었는데. 이제야 오스틴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준비가 되었는데.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그레이시는 알고 있었다. 오스틴은 분명 이 도시를 떠날 것이고, 어쩌면 이미 떠났을지도 모른다.
‘어쩌지…. 오스틴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되면, 나는… 나는….’
길 한복판에서 미친 듯이 두리번거리던 용사는, 이 중에서 유일하게 오스틴이 머물고 있는 여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 마야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물었다.
“마야! 여기서 어느 쪽이야!”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던 마야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으으… 기억이 안 나…! 어제는 저쪽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이, 이쪽…?”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녀들은 마야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냅다 달렸다.
‘제발…. 아직 늦지 않았길…!’
달리고, 또 달렸다.
주변의 풍경이 휙휙 바뀌고,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 때쯤.
“마, 맞아…! 여기야! 킁킁…. 오스틴의 냄새도 나고 있어…!”
“내, 냄새…?”
“바람 마법에 능통하면, 냄새를 맡는 것쯤은 일도 아니거든! 이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어서!”
급하게 달린 탓에,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잠을 자지 못한 탓일까. 어째서인지 몸도 평소보다 무거운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계속해서 달렸다.
설마, 벌써 떠나진 않았겠지.
아니. 떠났다면, 또다시 따라가면 된다. 오스틴을 이대로 놓칠 수는 없으니까.
이전의 만남에서, 불신의 씨앗이니 뭐니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오스틴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치사한 변명처럼 들렸을 것이니.
“오스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안했다고. 정말 반성하고 있다고. 파티에 돌아오는 것 까지는 바라지 않을 테니, 제발 우리를 지우지 말아 달라고.
무릎도 꿇을 수 있다. 신발을 핥을 수도 있다. 그녀들은 그리 생각했다.
그레이시는 한 술 더 떠서, 오스틴이 원한다면 몸을 내어줄 수도 있었다.
그녀들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필사적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오스틴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꾸욱 하고 조여 오는 것이, 그녀들이 얼마나 오스틴을 원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항상 상냥하던 오스틴. 언제나 우리를 돌봐주던 오스틴. 힘든 싸움이 끝난 뒤에는, 따뜻한 차를 내어주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오스틴의 미소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
다시 오스틴과, 그때 그 시절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다. 오스틴과 허물없이 지내던 그때 그 시절로.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칠해져 갔다. 하얀 도화지가 되어버린 그녀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오스틴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스틴이 머릿속에 꽉 들어차니, 불현듯 용사의 머릿속에 어떠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미안… 안… 해….’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누워있는 오스틴을 향해, 입을 맞춘다.
‘랑해… 오… 스틴….’
이게 대체 뭐지?
‘다시 만나자….’
용사는 어째서인지, 이 알 수 없는 기억을 떠올릴수록 가슴 한편이 꾹 아파오는 것 같았다. 오스틴과 이랬던 적이 있던가?
“치잇…!”
그러나,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용사는 머리를 세차게 휘젓곤, 다시 앞을 바라보며 달렸다.
오스틴. 우리는, 나는, 이렇게나 너를 바라고 있으니까…. 제발, 마지막이어도 좋으니까, 뭐든 할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아직 늦지 않았길…!’
그렇게, 계속해서 내달렸다.
* * * * *
째깍. 째깍.
“후우….”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은 채, 푹신한 침대에 머리를 기대었다.
방안에는 오직 나 혼자. 다른 일행들에게는, 먼저 마차에 가서 떠날 준비를 하라고 말해 두었다.
이제 떠나야 할 때다. 그래. 슬슬 떠나야 할 때지.
베키와 관련된 일도 깔끔하게 처리했고, 게이트 관리사에 관한 뒤처리도 완벽하다. 이제 이곳을 떠나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나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나는 대체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렇게 떠나길 망설여하는 걸까. 답은 의외로 빠르게 나왔다.
어젯밤, 루나와 나누었던 이야기.
덕분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으나, 내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너무 예리하고 맑아서, 오히려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으니.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만날 수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너희와 진실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이제야 그런 결심이 섰는데.
그렇게 용서를 바랐잖아. 어서 오란 말이야.
지금 만나면, 웃는 낯으로 사과를 받아줄 수 있을 텐데.
…아니, 이미 늦었나.
그렇게 매몰차게 말하고 나왔으니, 아마 저쪽에서도 나를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레이시가 너무 충격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감정에 휘말리지 않았어야 했는데. 불신의 씨앗이 심어진 것은 그녀들이었건만, 가장 감정적이었던 것은 우습게도 나였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용사 파티와 함께 갈란을 상대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애쉬를 상대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서, 내가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는데.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내쪽에서 먼저 찾아가자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저쪽에서 먼저 나를 찾아와 주길 바랬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대해 놓고는, 이제 와서?
‘오스틴…! 정신 차…!’
‘아드리… 저쪽…!’
‘시… 만나자….’
“…쯧.”
또. 또 그 기억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가끔씩 이렇게 알 수 없는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직 파티가 화목하던 시절,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 * * * *
“오스틴! 오늘도 수고 많았어!”
누군가 내 어깨를 탁탁 두들기며 말했기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용사. 이름이… 이유정이었던가? 특이한 이름이라서, 까먹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육포를 입에 털어 넣곤, 용사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래. 너도 수고 많았다.”
“오늘은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까 만티코어의 꼬리에 스칠 뻔했을 때,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 내가 그때 말하려다 말았는데. 용사, 너는 상대를 공격할 때 다음 공격을 예측하고 공격하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아니, 그게 말처럼 쉬워야지….”
용사가 풀이 죽은 듯 볼을 살짝 부풀린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미소기 지어졌다.
그때, 타닥거리는 모닥불에 장작을 집어넣던 그레이시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용사. 성검 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지난번에 용사가 성검을 불판으로 쓰려했을 때는….”
“자, 잠깐! 그레이시!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용사님…?”
“아, 그…. 이사벨!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일단 그 철퇴 좀 내려놔!”
“푸흡….”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동료 간의 유대감. 레인저에 있을 적 생활이 떠올라서, 무심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용사가 얼굴을 새빨갛게 달구곤 내 어깨를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우씨…! 오스틴! 웃지만 말고 나 좀 도와줘! 이사벨이 진짜 날 죽일 것 같단 말이야!”
“크흐흐…. 성검을 불판으로 썼으니, 혼나도 싸지 뭐.”
“오스틴…! 너마저…!”
결국 용사는 이사벨에게 붙잡혀, 야영지 구석으로 질질 끌려가 된통 혼을 나야 했다.
용사가 성검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야가 슬며시 다가와 내 옆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마야를 바라보니, 슬쩍 모자를 벗은 마야가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오스틴. 이거….”
“…응?”
마야의 손으로 시선을 내려보니, 밤하늘처럼 까맣게 빛나는 숫돌이 들려 있었다.
“이건…?”
“저번에, 도시에 들렀을 때… 샀어….”
“나 주려고?”
“응…. 지난번에 나를 구해줬으니까, 그 보답이야.”
아름답게 반짝이는 까만 숫돌을 이리저리 쥐어 보니, 단단하고 좋은 숫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날붙이를 쓰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좋은 숫돌을 골라 주다니.
“고마워. 마침 숫돌이 하나 필요했는데, 잘 됐네.”
“응….”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응? 뭐야?”
그때, 천막 안에서 활을 손보던 아드리엔이 바깥으로 나왔다.
“요, 용사…? 지금, 뭐 하는 거야?”
“헥…! 헥…! 아, 아드리엔…! 이사벨 좀 말려줘…!”
“안 돼요! 성검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다니, 얼마나 불경한 행동인지 몸으로 깨우치셔야 해요!”
“아니, 근데… 푸흡…!”
“이익…! 아드리엔! 지금 웃었지?!”
“아, 안 웃었… 푸하하하!!!”
야영지가 떠나가라 웃어젖히는 아드리엔과, 팔을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주저앉는 용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중,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별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아…. 좋네.”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싶을 정도로,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든든한 파티원들의 관계가, 저 별들처럼 영원했으면.
* * * * *
째깍. 째깍.
눈을 뜨니,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소리가 여전히 텅 비어있는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눈을 감은 지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나 있다. 잠을 잔 건 아닌데.
그만큼, 그때를 떠올리는 것이 재밌었던 것이겠지.
품을 뒤적여, 예전보다 크기가 조금 줄어든 검은빛의 숫돌을 꺼내어 들었다.
이러고 보니, 너희들은 내 일상생활에 참 많이도 간섭하고 있었다. 지니고 있는 물건 하나하나, 그녀들과의 추억이 녹아들지 않은 물건이 없었다.
잠시 숫돌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에 놓인 탁자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
잠깐의 망설임 끝에, 숫돌을 탁자 위에 놓을 수 있었다.
이것은, 단지 숫돌을 내려 놓은 것이 아니다.
그녀들과의 추억, 관계,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겁쟁이에 우유부단한 나는, 드디어 너희들을 떠나보낼 마음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고개를 돌려 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문 바깥은 조용했다.
역시, 찾아올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렇다고 내쪽에서 먼저 찾아가기에는, 나는 너무 겁쟁이였다.
다시금 탁자에 놓인 숫돌로 시선을 돌려, 닳고 닳은 숫돌을 손으로 쓱 훑었다.
“…갈까.”
이제, 떠날 시간이다.
숫돌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로, 몸을 돌려 문쪽으로 향했다.
…어지럽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잡념을 떨쳐 내었다.
이대로 계단을 내려가면 발을 헛디딜 것만 같아서,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아니, 사실 핑계일지도 모른다.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걸 지도 모른다.
이를 악 물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저 멀리, 로이먼의 등이 보였다.
“야! 로이… 먼….”
로이먼이 내 목소리에 몸을 돌린 순간, 틈 사이로 익숙한 얼굴들이 언뜻 보였다.
몸이 굳어버린 사이,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들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마주 보았다.
“어…!”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게, 그녀들이 몸을 삐걱거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맨 앞에 서있는 용사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어… 그, 그러니까….”
말해. 미안하다고, 지금까지 미안했다고, 제발. 다른 말은 괜찮으니까, 그렇게만 말해.
나도 참 바보 같지. 방금 그렇게 굳은 결심을 하고 나왔으면서, 막상 진짜 마주하니까 이런….
“처, 처음 뵙겠습니다! 용사, 이유정이라고 합니다!”
“…?”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용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고개를 숙인 용사가 슬며시 얼굴을 들어 내 낯을 확인했다.
“그, 실례지만,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으신… 가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서로 모르는 사이로 지내자.’
…아.
“…허.”
진짜 바보들은, 여기 있었구나.
나쁘지 않은걸.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조금은, 어울려 줄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내 눈치를 보는 바보들에게 대답했다.
“오스틴이라고 합니다.”
한 차례 쉬고, 다시.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