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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79화 (79/106)

〈 79화 〉 78. 분열, 재결합

* * *

길고 넓은 복도. 매끈하게 다듬은 흑요석 바닥 위로, 한 쌍의 발이 다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휘이이잉—.

움찔. 음산한 소리와 싸늘한 공기에, 복도를 걸어가던 남자는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복도가 너무나도 넓은 탓에, 복도 내부로 바람이 불어오면 간혹 이런 음산한 소리가 나곤 했다.

“후우….”

남자는 팔을 한차례 쓸어내린 후, 계속해서 나아갔다.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복도의 끝에 다다르고, 커다란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남자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쿠구구궁….

넓은 방이 나왔다.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방 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천장에 달려있는 샹들리에와 방 곳곳에 놓인 촛대가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질척 질척하고 음침한 이 마왕성의 한기를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방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둥그런 탁자 주변에, 세 명의 인영이 앉아 있었다. 남자는 그대로 걸어가, 그들과 최대한 떨어진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조금 늦었군. 아가토.”

우르간의 낮고 무거운 음성에, 아가토는 옷매무새를 고치며 대답했다.

“음. 요즘 바빠져서 말이야.”

“하긴. 아가일이 사라졌으니, 바쁠 만도 하겠군.”

말을 마친 우르간이, 코를 벌렁 거리며 탁자 위를 더듬더듬 짚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애쉬가 탁자 위에 놓여있던 과자를 집어주며 우르간을 거들어 주었다.

“이 멍청아. 코앞에 있는데 그걸 못 보니?”

“크르르릉…. 미안하군.”

“어휴, 피비린내.”

“와작 와작…. 방금 막 전선에서 적들을 도륙하고 온 참이지. 마음에 드나?”

그르르릉. 우르간이 낮은 소리로 울자, 애쉬가 인상을 확 구기며 우르간의 어깨를 퍽 때렸다.

“마음에 들겠니? 으휴… 진짜 역겨워 죽겠어. 좀 고상하게 처리할 수는 없어? 꼭 몸에 피를 흠뻑 적셔야 속이 시원하니?”

“미안하지만, 이건 우리 일족의 본능이다.”

“쯧. 누가 짐승 아니랄까 봐….”

“흠.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 빈자리가 꽤 많아졌군 그래.”

우르간의 말에, 애쉬와 아가토는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원탁을 쭉 둘러보았다.

참모장의 자리를 포함해서, 좌석은 총 아홉. 그중 무려 다섯 자리가 공석이었다.

아가토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확실히, 너무 많이 죽었지.”

“너무 많이 죽었다. 헌틀리, 그놈은 주제도 모르고 용사에게 덤볐다가…. 쯧.”

우르간이 이를 드러내며 그르릉 거리자, 팔짱을 낀 채 천장을 올려다보던 애쉬가 말을 이었다.

“쳇…. 나는 슬슬 이 자리에서 물러날까 생각 중이야. 용사가 한계를 돌파했다니. 이젠 나 혼자서는 상대가 안 된다고.”

“애쉬. 너는 망각의 우상이 남아 있지 않던가?”

“우상이 뭐 애들 장난감이니? 그거 하나 만드는 데 백 년이 걸린다고. 지난번에 하나 잃어서, 이젠 두 개밖에 안 남았단 말이야.”

애쉬와 우르간의 잡담이 길어지자, 아가토가 손뼉을 짝 마주치며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 다들 조용. 비록 이번에 갈란과 헌틀리가 사망하긴 했지만, 우리가 모인 이유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야.”

아가토가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낌새를 보이자, 우르간이 원탁을 탕—! 내리치며 이를 드러 내었다.

“크르릉…. 그래. 이번에 모인 것도 마왕의 명령 때문이었지. 이봐, 아가토. 나는 이제 슬슬 알아야겠군. 마왕은 대체 무슨 속셈인지 말이다.”

“그건….”

“기간트는 멋대로 움직이다가 소멸했을지언정, 칼라스는 마왕의 명령에 따랐다가 별의 기사에게 죽었다. 갈란과 헌틀리도 마찬가지. 아가일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모인 방 안에, 무거운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홀로 멀찍이 앉아있는 몬타를 힐끔 바라본 우르간이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 일족의 부흥을 약속받고 이 전쟁에 참전했다. 하지만, 이제는 마왕이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 드는군. 몇 안 남은 우리 일족의 전사들을 전선으로 떠미는 내 심정을, 본진에 남아서 참모진들과 탁상공론이나 펼치는 네가, 알기나 하나?”

“…그쯤 해. 우르간.”

그르르릉. 우르간의 털이 삐죽삐죽 솟아오르자, 아가토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쯤 하라고? 지금 나랑 말장난 하나? 군단장 중 넷이 죽었고, 하나는 행방이 묘연하다! 놈들이 이끌던 마물들은 절반이 뿔뿔이 흩어졌고! 이제는 전선을 유지하기도 힘들단 말이다! 이렇게 힘든 와중에 갈란과 헌틀리를 죽게 내버려 두다니, 마왕은 생각이 있는 것이냐?!”

“그래! 이번에는 무려 둘이 죽었다고! 그 둘도 약한 놈들이면 몰라, 갈란과 헌틀리가 그렇게 죽었다는 게 말이나 돼? 아무리 저 마왕이라는 양반이 대단한 양반이라고는 하지만, 나도 이제 슬슬 알아야겠어! 그 마왕이라는 놈, 대체 정체가 뭐야?”

애쉬까지 아가토를 노려보자, 아가토는 머리가 하얗게 칠해지는 것 같았다. 아가토는 애써 정신을 붙잡고, 혀가 꼬이려는 것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

“아하하…. 얘들아, 일단 진정….”

“아가토.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라.”

우르간이 이를 드러내며 낮게 그르렁거렸다.

“마왕은. 대체. 뭘 원하는 거지?”

꿀꺽. 아가토는 침을 크게 삼키곤, 우르간의 눈을 마주 보았다.

“…….”

“대답하지 않겠다면….”

스르릉—.

칼날이 검집에서 끌러져 나오는 소리에, 우르간과 애쉬, 그리고 아가토는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했을 텐데.”

새파랗게 빛나는 몬타의 검날이, 검집에서 빠져나와 그 예리한 날을 보이고 있었다.

“그분을 의심했다간, 가만있지 않겠노라고.”

등이 오싹해지는 살기가 방안을 뒤덮었다. 우르간은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도끼를 양손으로 거머쥐었다.

“크르르릉….”

“…해 보자는 거야?”

잠깐의 탐색전. 검집에서 끌러져 나오던 상태 그대로 멈추어 있는 몬타의 검을, 우르간과 애쉬는 눈을 빛내며 노려 보았다.

“자, 잠깐! 그만! 그만 그만!”

쉬익—!

아가토가 그 사이에 끼어든 순간, 무언가 우르간의 귀 끄트머리 털을 베고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 놈의 검로는 보이지 않았다. 우르간은 자신을 덮치려 했던 살기를 상기해내며 털을 부르르 떨었다. 아가토가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은 자신이었으리라.

“그, 하하…. 오늘은 이쯤 하고, 다음에 다시 모이자고! 알겠지? 애쉬, 우르간. 너희들은 이제 슬슬 저번에 이야기해 준 일에 착수해 줘. 준비는 다 끝났을 테니까, 바로 메텔하임으로 가면 될 거야.”

“…….”

말없이 게이트를 통과하는 우르간과 애쉬를 바라보며, 아가토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위태로운 관계가, 얼마나 이어질지.

‘역시… 아가일을 풀어준 건, 맞는 선택이었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아가일을 생각하며, 아가토는 쓴웃음을 지었다.

* * * * *

“에헤헤… 오스틴.”

“…왜 부르세요. 용사님.”

“치이…. 이제 슬슬 반말해도 되지 않아? 왜 자꾸 존댓말 하는데….”

“저희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잖아요. 어떻게 초면에 반말을 합니까?”

“그건…. 씨이… 몰라!”

“됐으니까, 좀 떨어져 주시겠습니까?”

“에이~. 이 정도는 괜찮잖아~.”

“아니, 좀.”

계속 이상태로 있다가는, 지금 내 앞에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로빈이 무슨 짓을 저지를 것만 같거든.

원래 마부석을 제외하고 다섯 명이 타던 마차에 용사 파티까지 얻어 타니, 서로 딱 붙어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자꾸만 내게 엉겨 붙는 용사를 밀어내며, 휙휙 바뀌는 마차 바깥의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용사와 똘마니들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이 질긴 악연을 너무 오래 끌기도 끌었고, 애초에 그녀들이 원해서 그렇게 못돼먹게 굴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정상참작을 해 주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하르만에 계속 머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화해를 한 것과는 별개로, 내가 용사 파티와 움직일 이유는 없었으니까.

우리와 함께 가겠다는 용사의 말에는 조금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슬슬 여행 자금이 모자라서 현상금을 갱신받으러 간다는데, 우리가 뭐 어쩌겠나. 다행히 갈란의 현상금은 우리에게 몰아주겠다고 했으니, 군말 없이 동행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계속해서 마차 바깥만을 바라보고 있자, 용사가 입술을 삐죽 내밀곤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이쪽 보면 안 돼?”

“아, 진짜. 아까부터 자꾸 귀찮게 할래?”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존댓말을 버리자, 용사가 눈꼬리가 휘게 웃으며 재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히히…. 드디어 반말하는 거야?”

“아니…. 에라이, 썅. 나도 몰라.”

내가 다시 마차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려 하자, 용사가 내 바짓단을 붙잡고 물었다.

“오스틴은… 우리 안 보고 싶었어…?”

“…어. 안 보고 싶었어. 이 웬수야.”

“힝….”

비록 내가 그녀들을 용서하기로 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순간에 정을 붙이는 것은 무리였다. 어제 한 바탕 치고받고 싸운 사이인데,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이란 게 그렇다.

그래도, 이전처럼 욕을 한 바가지 쏟아내며 문전박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전에는 눈도 마주치기 싫었을 텐데.

내가 용사와 계속해서 투닥거리자, 마차 뒤편에 앉은 마야와 그레이시가 묘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뭐. 할 말 있어?”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냐.”

아드리엔은 이미 깊이 잠든 상태였다. 나 때문에 이틀 밤을 꼬박 새웠다나 뭐라나.

마차가 출발한 지 꽤 됐으니, 슬슬 잠에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미 루나와 알렉시스 공녀는 곤히 자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로이먼은 평소처럼 마차를 몰고 있었고, 실비아는 마부석에 앉아보고 싶다는 강력한 요청으로 인해 로이먼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실비아 역시 잠에 든 것 같다.

“선배님.”

“…왜.”

“잊으신 건 아니죠?”

친구 이상 연인 미만, 그걸 말하는 건가?

“잊을 리가 없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럼 됐어요.”

로빈과 내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용사가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왔지만, 가볍게 무시해 주었다.

“후우…. 로빈. 지도 좀 줘봐.”

“지도…. 으음…. 아, 여기요.”

“고마워.”

지도를 펼친 뒤, 우리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하르만을 출발한 지 대략 세 시간 정도가 지났으니, 아마….

“아마… 이쯤.”

지도에는 분명, 근처에 Y자 모양의 커다란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마차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언덕 위에, Y자 모양으로 갈라진 오래된 고목이 우뚝 서 있었다.

“그렇지.”

“와…. 오스틴. 어떻게 지도만 봐서 우리 위치를 알 수 있는 거야?”

“아니, 지도에 다 나와 있잖아.”

“그, 그렇네….”

용사가 어떻게든 내게 말을 붙이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굳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로이먼. 오늘은 여기까지 가서 멈추자. 아마 그때쯤이면 해가 질 거야.”

“음…. 알겠습니다.”

마부석 쪽으로 난 창문에 지도를 내밀고 야영지 후보를 짚어 주자, 로이먼이 고개를 숙여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대로 로이먼에게 지도를 건네어 주고, 마차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나는 한숨 잘 테니까, 너희들도 좀 쉬어라. 나 때문에 밤샜다며.”

“어, 그래! 그… 잘 자…!”

예전에 비해서 많이 어색해졌지만, 이것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며칠만 지나면… 다시 예전처럼 허물없는 사이로 지낼 수 있겠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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