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79. 천천히, 한 걸음씩
* * *
“보스.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그래.”
조직원이 손님을 안내하러 나가는 와중에도, 베키는 웃음을 참지 못해 계속해서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지금 찾아 올 손님이라면, 더군다나 자신을 직접 만나러 올 손님이라면, 단 한 명밖에 없기 때문에.
그 노친네가 길길이 날뛸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쿵! 쿵! 쿵!
이미 문 밖 복도에서부터, 성난 늙은이가 발을 힘껏 구르며 걸어오는 것이 들려왔으니.
아니지. 계속 이렇게 웃고 있으면, 이쪽에서 환전소를 털었다는 것이 들통난다. 기껏 위험을 감수하고 환전소를 털어먹은 것이 헛수고가 되어 버린다. 이제부터는 연기에 들어가야 한다. 베키는 잠시 눈을 감고, 표정에서 웃음기를 싹 뺐다.
이를 보이는 순간, 그 약삭빠른 노인네가 미친개처럼 물고 늘어지리라.
쾅!
“베키!!! 네 이년—!!!”
콧김을 씩씩 뿜어내며 지팡이를 탁탁 거리는 노인의 이름은, 반티크 비질. 상인 조합의 조합장. 그 옆에는, 르베너 환전소의 소장 자리에 앉아 있는 라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베키는 순간 터져 나오려던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아내고, 무표정한 얼굴로 반티크를 돌아보았다.
“…지난번에 뵌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번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네, 네가… 네가 저지른 짓을 알면서도, 이렇게 뻔뻔하게—!”
멍청하다. 과거에는 유명한 상인이었을지언정, 지금은 이렇게 화에 잡아먹혀 이성을 잃고 날뛰는구나.
호위도 없이. 건방지게 말이다.
베키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종을 울리자, 곧바로 덩치 큰 조직원 둘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보스.”
“어르신께서 연로하셔서, 계속 서있기가 힘드시단다. 앉혀 드려라.”
“예.”
“무, 뭐랏?! 네 이년이 지금 같잖은 연기를…!”
반티크가 지팡이를 휘적이며 침을 튀기자, 조직원 중 한 명이 인상을 쓰며 반티크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앉으시지요, 어르신.”
“이, 이 깡패 새끼가…! 내가 누군 줄 알고 함부로 손을 대느냐!”
“어르신.”
반티크의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에 들어갔다.
“앉으시지요.”
반티크는 당황 하였다. 자신을 만나는 사람들은 언제나 설설 기었건만, 이 족보도 없는 깡패가 힘으로 자신을 위협하다니.
당황한 반티크가 끝까지 멀뚱 거리며 서 있자, 조직원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보스. 야산 하나 알아볼까요?”
“후루룹…. 아서라. 어르신께서 하르만의 상권에 기여하신 공로가 얼마나 큰데.”
반티크는 고개를 돌려 보았다. 라스는 일찌감치 소파에 앉아 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빌어먹을 깡패 새끼들….”
쾅—!
반티크가 중얼거리자, 찻잔을 기울이던 베키가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봐, 반티크.”
움찔. 순식간에 싸늘해진 방 안의 공기에, 반티크의 흥분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이다.
그런 반티크를 얼음장같이 차갑게 노려보며, 베키가 말을 이었다.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까놓고 말해서, 하르만 상권의 절반을 잃은 이빨 빠진 호랑이 따위, 어디 으슥한 야산에 묻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야.”
“무, 뭐….”
“내 약방을 수비대에 찔러 넘겨놓고, 이렇게 뜬금없이 들어와서 적반하장으로 나온다라…. 내가 오늘 기분이 좋지만 않았어도, 그 다 늙어 빠진 몸뚱이는 이미 드레이크 사료로 갈려 나갔어. 알아?”
반티크를 싸늘하게 노려보는 베키의 손에는, 어느새 예리한 단검이 들려 있었다.
“네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처럼 힘든 시기에, 이 내가 형식적으로나마 윗사람 대접을 해 주면 감사하게 받아야지. 안 그래?”
빙글빙글 단검을 돌리던 베키는, 그대로 단검을 들어 올려 책상에 내리찍었다.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지도에서 정확히 상인 조합 건물이 위치한 곳에 찍힌 단검을 보며, 반티크는 침을 삼켰다.
“다짜고짜 남의 사무실에 들이닥쳐서, 계속 이딴 식으로 행패를 부린다면…. 상인 조합 건물이 잿더미가 될지도 모르겠군.”
“…….”
잠시 정적이 흐르고, 베키의 눈빛에서 살기를 느낀 반티크가 주춤거리며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제야, 베키는 얼어붙은 표정을 풀고 싱긋 웃어 보였다.
“자, 그럼…. 어르신. 무슨 일로 오셨나요?”
“…환전소. 네가 털었느냐?”
“환전소라…. 확실히, 얼마 전에 환전소가 털렸다는 보고를 받긴 했지요. 그런데, 왜 제가 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가 한 짓이, 아니라고?”
반티크는 실눈을 뜨고 베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이 깡패 새끼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누가….’
“뭐…. 저는 그때 제 도박장을 관리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나저나… 그렇게 돈이 많이 굴러다니는 환전소가 털리다니, 관리를 제대로 안 하시나 봅니다?”
베키의 비아냥에, 반티크는 속이 타는 것 같았다. 옆에 환전소장 본인까지 앉아 있건만, 베키의 말에 반박을 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반티크를 보며 베키는 피식 웃어 보이곤, 라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대답하기 싫으신가? 뭐…. 그럼, 우리 환전소장님께서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저, 저는….”
“아, 참고로 지금 우리 밑으로 들어오는 개인 사업자들은, 특별히 1년간 보호세를 1할 깎아 주고 있거든?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라스의 눈빛이 순식간에 확 바뀌었다. 라스는 눈동자를 굴려 옆에 앉은 반티크를 힐끔 바라보았다.
라스의 눈은, 배신자의 눈이었다.
‘역시, 장사치들은 구워삶기 쉽다니까.’
베키가 말없이 건네어 주는 가입 신청서를 받아 드는 라스를 바라보며, 베키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를 천천히, 한 걸음씩 끌어내릴 것이다.
이번 일은, 그 발판에 불과하다.
* * * * *
타닥— 타닥—.
불똥이 튀는 모닥불 안으로, 미리 긁어모아 놓았던 마른 나뭇잎 뭉치를 집어넣었다. 화악—! 하고 불길이 조금 치솟아 올랐다가, 이내 다시 잠잠해졌다.
모닥불의 불길을 조절하며, 냄비 걸이에 걸린 커다란 냄비를 들여다 보았다. 하르만에서 산 냄비 걸이인데, 이게 또 굉장히 유용했다.
갈색으로 익어가는 외뿔 사슴 고기에서, 지글지글 소리가 나며 기름이 흥건하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장거리 여행이었다면 육포에 빵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겠지만, 기껏해야 2~3일 걸리는 여행에서는 이런 호화로운 식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소금으로 간을 한 뒤, 마차에 실려 있던 갖가지 채소를 대충 때려 넣고 물을 부었다. 이 상태로 먹어도 나름 짭짤한 스튜가 되겠지만, 아직 아니다.
맛있는 냄새가 온 사방에 퍼졌다. 천막을 치던 용사 파티 역시, 냄새를 맡고 모닥불 주위에 앉았다.
“오스틴이 해주는 밥은, 오랜만이네….”
“맛있겠다….”
평소 까칠하던 아드리엔 마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입을 헤— 벌리곤 냄비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외뿔 사슴 고기는 조금 더 우려내야 해.”
외뿔 사슴 고기는, 지방과 육즙이 많아서 뜨거운 스튜를 만들기에 제격이다. 지방이 사르르 녹아들고, 농후한 국물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특제 양념 가루를 넣으면 끝.
내가 품에서 양념 통을 꺼내자, 그레이시가 미묘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오스틴. 항상 궁금했다만, 그 가루는 대체 뭐지?”
“…이거?”
“맞아. 나도 매번 궁금했는데, 그 가루 대체 뭐야?”
“엄….”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막상 정체를 알게 되면 먹기 싫어질 텐데.
유일하게 이 가루의 정체를 알고 있는 로빈이,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 그…. 여러분. 굳이 정체를 알아야 할까요?”
“이름이… 로빈이었나? 그래. 우리가 먹는 것인데, 재료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 그게….”
까짓 거, 그냥 말하자.
“우리 레인저의 별미인데… 이게 또 마법의 가루야. 넣으면 감칠맛이 끝내준단 말이지.”
“흠. 대체 뭘로 만들었길래….”
턱을 쓰다듬으며 궁금해하는 그레이시에게, 웃음을 참아내며 말했다.
“포자 거미의 알 껍질을 빻아서….”
“…뭐?”
로빈과 로이먼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이래서 알려주기 싫었는데.
“…는 농담이고. 그냥 맛있는 육포들 갈아서 만든 가루야.”
“아하하…. 그렇지? 농담이지? 응?”
“…음, 맛있겠다.”
“오, 오스틴?! 저희는 지금까지 계속 오스틴이 만들어 준 음식만 먹었는데, 농담 맞죠?!”
“얼른 저녁 먹고 자자~.”
울먹이기까지 하는 용사와 이사벨을 무시하고, 보글보글 끓는 냄비에 마법의 가루를 한 숟갈 넣었다. 맛있는 냄새가 온 사방에 퍼지고, 드디어 스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걸쭉하고 농후해졌다.
각자의 그릇에 스튜를 배분해 주고, 내 몫으로 큼지막한 고기를 그릇에 담아내었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고기를 먹는 것을 본 용사가 한 마디 했을 텐데. 마지막으로 용사 파티와 함께 이렇게 평화로운 저녁을 만끽한 것이 언제더라.
수저로 고기를 짓누르자, 고기가 결을 따라 부드럽게 찢어지며 국물이 베어 나왔다. 야채와 함께 한입 크게 떠서,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음. 맛있네.’
우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다들 그릇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스튜를 먹고 있었다. 귀족의 식사 예절을 배운 알렉시스 공녀와 실비아 빼고.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용사 파티 초창기의 그 따뜻한 분위기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느껴졌다. 이 느낌이, 이 분위기가, 정말… 정말 그리웠다.
“오스틴.”
“…응?”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내 옆에 앉은 마야가 스튜를 떠서 내 입에 들이밀었다.
“그게…. 아,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마야와 함께 서로 떠먹여 주곤 했었지. 마야가 자주 음식을 흘리다 보니, 스튜가 묻은 로브를 빨며 울상을 짓던 마야가 떠올랐다.
“오, 오스틴…? 나, 팔 아픈데….”
마야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팔을 조금씩 떨어대면서도 꿋꿋이 내 입술에 수저를 가져다 대는 마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퍽 웃겨서, 피식 웃으며 입을 크게 벌려 마야의 수저를 덥석 물었다.
“앗…!”
내가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마야가 눈을 크게 뜨곤 내 입과 수저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맛있네.”
“으, 응…. 헤헤….”
이상하게 헤실헤실 풀어진 마야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고 고개를 돌리자, 로이먼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선배님?”
“어, 음….”
아니. 나는 뭐 밥도 못 얻어먹나?
라고 따지고 들고 싶었지만, 로빈의 눈이 너무 싸늘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슬쩍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너도 빨리 먹어.”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죠.”
계속해서 나를 노려보던 로빈이, 갑자기 스튜를 듬뿍 떠서 내 입에 들이밀었다.
“선배님. 아~.”
그 광경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눈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이게 뭐라고.
“아…. 나, 나도…!”
“오, 오스틴! 이것도 먹어 봐라!”
“오스틴! 그…. 내 스튜가 유독 맛있는 것 같아! 한번 먹어 봐!”
“아니, 다들 밥상머리에서 이게 무슨…. 읍읍…!”
애미, 씨발.
허공에서 이리저리 뒤섞이는 숟가락들로 인해, 내 입가 주변은 이미 스튜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다들 그만하세요. 참…. 식사 예절은 지키셔야죠.”
다행히도, 알렉시스 공녀가 저지해 준 덕분에 내 입을 인정사정없이 더럽히던 수저들이 멀어져 갔다.
“응애. 공녀 마망.”
“후후…. 오스틴도 참. 입에 다 묻히시곤….”
“아니, 이건 제가 한 게 아닌데요….”
손수건으로 내 입을 닦아주는 알렉시스 공녀의 얼굴에 잠깐 동안 승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간 것을 보았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파티가 떠들썩해진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어색한 용사 파티와도,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가면…. 과거 화목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