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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81화 (81/106)

〈 81화 〉 80. 여름이었다

* * *

나는 옷깃을 펄럭이며, 마차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어 조금씩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필사적으로 갈구했다.

“후우…. 진짜 뭐 빠지게 덥네….”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이건 뭐 마차도 뭣도 아니고 그냥 찜통이다. 초여름을 넘어서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버틸만한 더위였다. 마차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어도 딱히 바람이 불지도 않았기에, 다시 마차 안으로 고개를 들였다.

이번에는 마부석 쪽으로 난 창문에 머리를 내밀어, 로이먼에게 말을 걸었다.

“로이먼. 많이 더우면 교대해도 되니까….”

“괜찮습니다. 이것 역시 아크론께서 내려주신 하나의 시련.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 보이겠습니다.”

로이먼이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말하자, 로이먼과 함께 마부석에 앉아 있던 이사벨이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훌륭합니다. 로이먼 사제. 그야말로 모든 교인들의 본보기군요. 그대의 신앙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튼, 형제님. 저는 괜찮으니, 굳이 힘들이지 마시고 안에서 쉬고 계십시오.”

“어…. 그래, 뭐….”

로이먼과 이사벨은 같은 성직자라 그런 것인지, 죽이 상당히 잘 맞았다. 이사벨이 로이먼의 광신도 같은 면모까지 따라 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 아래에 계속해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가는 머리카락이 몽땅 빠져버릴 것만 같아서, 급히 머리를 마차 안으로 들였다.

“드르렁….”

“쟤는 잠이 온대냐…?”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아드리엔은, 이렇게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코골이까지 하면서 푹 자고 있다. 엘프들은 정령과 교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기온 변화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종족이다.

누구는 혀를 빼물고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있는데, 이 버르장머리 없는 귀쟁이가….

“으으… 땀나… 찝찝해….”

그때, 내 옆에 앉아있던 로빈이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동시에, 덥고 습한 땀냄새가 바람을 타고 확 풍겨왔다.

“아흐…. 선배님… 저 죽어요….”

“나도 더워…. 끈적거리니까 좀 떨어져라….”

“씨이… 너무해요….”

가뜩이나 더워 죽겠는데, 계속해서 내게 달라붙으려는 로빈 덕분에 불쾌지수가 끝을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 나는 가방에서 수통을 꺼내어 물을 들이켰다.

목 울대를 움직이며 정신없이 목을 축이자, 마차 뒤편에 앉아 있던 용사가 눈을 번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 나도 한 모금 만….”

“후우…. 좀 살겠네. 자, 여기.”

“다음은 저요….”

“다음은 나….”

“나, 나도 한 모금만…”

그렇게 생명수가 담긴 수통은 돌고 돌아, 아드리엔의 옆에 앉아 있는 마야에게까지 돌아갔다.

“…응?”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던 마야는, 자신의 손에 미적지근한 수통이 들리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우니까, 목마르면 물 마시라고….”

“아…. 고맙지만, 괜찮아.”

마야의 얼굴은 이런 살인 더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편안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유독 마야 혼자만은 땀을 전혀 흘리고 있지 않았다.

“마야. 너는 안 더워?”

“…어? 아니, 오히려 시원한데….”

“…뭐?”

정수리가 익을 것 같은 더위에, 결국 마야가 먼저 정신을 놓아 버렸구나. 나는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자, 마야가 다급히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게… 그…. 나는 바람 마법으로 나름 시원하게 유지할 수 있으니까…?.”

순간, 마차 안에 탄 모두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축 늘어진 채 탁해져 있던 눈동자들이, 천천히 마야에게 집중되었다.

모두가 마야를 뚫어져라 바라보자, 마야가 어깨를 흠칫 떨며 몸을 움츠렸다.

“저, 저기…?”

“…마야. 난 너밖에 없어.”

“어, 으, 응?!”

내가 마야의 손을 덥석 붙잡고 말하자, 마야의 얼굴이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나밖에 없… 헤헤….”

“그러니까, 부디 우리에게도 바람의 은총을 내려주지 않으련?”

“응…! 당연하지! 히히…. 오스틴은 나, 나밖에 없으니까….”

마야가 히죽히죽 웃으며 지팡이를 가볍게 툭 내려치자, 지팡이에서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람이 흘러나오며 삽시간에 마차 내부가 시원해졌다.

“아아…. 이제 좀 살 것 같군….”

“으으…. 나는 조금 춥기까지 한데….”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던 그레이시와 실비아 역시,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용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 에어컨이네….”

“응? 에어컨?”

“아, 아무것도 아냐….”

에어컨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마차 내부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었다. 마차 좌석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으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형제님.”

“뭐…. 어머, 씨발 깜짝이야!”

로이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로이먼과 이사벨 역시 마부석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빛내며 마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무서운 이야기에 나올법한 기이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렸다. 심장 멎는 줄 알았네.

“아크론께서는, 좋은 것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과 나눌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로이먼 사제의 말이 맞아요. 좋은 것은 나누면 배가 된답니다.”

“…로이먼, 이사벨. 시련이라며?”

“…생각해보니, 경전에는 딱히 시련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지는 않더군요. 제 착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뭔….”

“토 달지 마세요. 오스틴.”

놀랍게도, 이 미친 더위는 로이먼의 신앙심마저 한 수 접어줄 만큼 뜨거웠다.

마력량이 많은 마야 덕분에, 우리는 살인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여름이었다….”

“뭐라구요, 선배님?”

“아니, 이렇게 말하면 있어 보인다고 누가 그래서.”

그래. 여름이었다.

* * * * *

쾅!!!

딱딱한 지면에 새하얗게 불타오르는 검이 틀어 박혔다.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새하얗게 불타오르며 부르르 떨리는 검신은 지면에 미리 파여있던 홈에 딱 맞아 들어갔다. 덕분에, 검이 땅에 틀어박히며 지면을 박살 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 척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비단결 같은 머리칼은 밤하늘처럼 검푸르게 빛났으며, 머리카락 사이사이 반짝이는 별빛은 아름다운 얼굴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별의 가문, 스타차일드 가의 마지막 혈통. 스타차일드 가의 가주, 꺼지지 않는 별, 이젤 스타차일드.

또 크기가 커진 것인지 최근 들어 잘 여며지지 않는 가슴팍의 끈을 동여매며, 이젤 스타차일드는 턱을 치켜세우고 검을 바라보았다.

마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겠다는 듯이 하얗게 불타오르던 검신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광채가 쏟아졌다. 빛이 멎고, 어느새 검의 앞에는 밤처럼 어두운 갑주를 입은 기사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젤 스타차일드가 산맥 꼭대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팔뚝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랜버트. 늦었구나.”

“송구합니다. 예상보다 일처리가 늦었습니다.”

“쯧…. 되었다. 무사히 돌아왔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니.”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몸을 휙 돌려, 쌀쌀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넓찍한 발코니를 떠났다. 등 뒤에서 기사가 다급히 따랐지만, 그녀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가주님께서 많이 노하신 모양이군…. 젠장. 칼라스를 처단하고 나서 곧바로 복귀했어야 하건만….’

별의 기사, 랜버트는 스스로의 바보 같은 결정을 자책하며, 앞장서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가주님을 눈에 담았다. 과거 병약하던 모습에서 이제는 어른스럽게 자란 그녀가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한 구석에 꽁꽁 숨겨둔 연심이 새어 나오지 않을까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었다.

랜버트의 짝사랑, 이젤 스타차일드는 그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런 랜버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젤 스타차일드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내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보고는 내일 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넘어가 주겠지만, 다음에도 늦었다간 경을 치를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복귀가 늦었다고는 하나, 평소 며칠씩 복귀가 늦었을 때는 저렇게까지 화를 내지 않으셨건만. 오늘은 유독 기분이 좋지 않으신 건가.

이젤의 방이 소리 나게 닫히고, 랜버트는 한동안 멍하니 그녀의 방문 앞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랜버트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문에 착 달라붙어 귀를 기울이던 이젤 스타차일드는 등에 기댄 문을 따라 주르륵 미끄러졌다.

‘어, 어떡해…! 몇 주 만에 랜버트 얼굴을 보니까, 주체하기가 힘들엇…! 랜버트에게 안기고 싶어어…!’

그녀가 일부러 얼굴도 보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별의 기사 랜버트가 알 도리는 없었다.

‘랜버트….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도 잘생겼어…. 나, 나는 알 수 있어…!’

귀여운 연심을 키워 나가는 풋풋한 소녀의 마음을, 오로지 검만을 수련해 온 랜버트는 오늘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 사실에, 이젤 스타차일드는 푸—. 하고 볼에서 바람을 빼며 대번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고백하자니 용기가 나지 않고, 지금까지 가주로 군림해왔던 자신의 이미지가 걱정되었다. 게다가, 기사임과 더불어 자신의 가신이기까지 한 랜버트쪽에서 먼저 고백해 주어야 폼이 살지 않겠는가.

처음부터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미 가문의 일원 모두가 소멸해 버린 지금까지 성채에 남아 자신을 챙겨주는 유일한 남자가 랜버트 뿐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자신의 목숨을 살리겠다며 온 세상을 뒤져서 꺼져가던 별을 다시 밝혀준 그는….

“흐히히….”

이 까다로운 아가씨가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젤 스타차일드는 그리 생각하며 그녀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사시사철 눈이 녹지 않는, 차가운 송곳 산맥 꼭대기에 세워진 이 성채는 항상 고독하고 외로웠다. 그런 곳에 혼자 남아 있건만, 항상 자신의 옆에 머물러주던 랜버트마저 몇 주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으니, 오늘은 조금 심술을 부리고 말았다.

“이게 아닌데…. 히잉….”

힘없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곤, 푹신해 보이는 침대에 몸을 휙 날렸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익숙한 한기와 함께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랜버트는, 오늘도 수련을 하는 모양이었다.

“멋져….”

멋있긴 하지만, 이럴 때는 수련을 할 게 아니라 자신을 위로해 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랜버트도 참 무드가 없다고 생각하며, 이젤 스타차일드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랜버트…. 날 좋아하잖아…. 빨리 고백하란 말이야…!”

이젤 스타차일드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파묻은 채 팔다리를 붕붕 휘저었다.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별의 가문의 가주도, 별의 기사의 주인도 아닌, 사랑에 빠진 소녀뿐이었다.

“후우…. 여름이라서 그런지, 최근에는 별로 춥지 않군.”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랜버트는 땀을 닦으며 갑옷을 벗었다. 얇은 옷가지 위로, 잘 단련된 몸이 드러났다.

“여름…. 여름인가….”

아직 가문의 일원이 모두 있을 때에는, 아가씨였던 그녀와 함께 성채에서 내려가 메텔하임에서 축제를 구경하곤 했었다. 여름 막바지에 메텔하임에서 열리는 큰 축제를, 언젠가 다시 그녀와 함께 구경하겠다고 벼르고 있었건만.

‘오늘은 가주님께서 기분이 영 좋지 않아 보이시니, 식사는 혼자 해야 하나….’

눈치 없는 랜버트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는 것은, 아직 먼 미래 같아 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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