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81. 왕국의 심장
* * *
하르만에서 마차를 타고 출발한 지, 어느덧 3일 째다.
여느 때처럼 야영지를 정리하고, 푸르릉 거리는 말의 갈기를 빗겨 주며 아직 서늘한 아침 공기를 콧속 깊이 들이마셨다. 상쾌한 아침 공기가, 잠에서 깬지 얼마 안 되어 비몽사몽 한 머리를 조금이나마 환기시켜 주었다.
“흐아암….”
“형제님. 다 끝났습니다.”
“어, 음…. 그래. 슬슬 출발하자.”
로이먼이 천막을 회수해서 마차에 싣고, 마차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지난 이틀 간은 로이먼이 땡볕에서도 마차를 몰아주는 수고를 해 주었기 때문에, 오늘은 내가 마차를 몰기로 했다.
“끄응…! 오, 오스틴…! 나 힘이 안 들어가아…!”
“아휴. 시팔 진짜…. 아줌마!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타세요!”
“…뭐? 아줌마?”
“아니, 그…. 하하…. 내가 밀어줄게. 자.”
아침이라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며 칭얼거리는 아드리엔의 엉덩이를 밀어주면서,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일행들을 어떻게든 마차에 태우는 데 성공했다. 태운다기 보단 짐짝을 싣는 것에 가까웠지만.
“…기분 탓인가?”
…누구 하나 안 태운 것 같은데?
“하나, 둘, 셋, 넷…. 저건 누구 팔이야?”
마차에 널브러진 일행을 눈어림으로 세어 봤지만, 이른 아침의 몽롱한 머리가 필사적으로 방해를 해 왔다.
모르겠다. 다 탔겠지, 뭐.
묵묵히 앉아서 경전을 읽는 로이먼과 다르게, 다들 바닥이며 좌석이며 온갖 곳에 축 늘어져 있었다. 며칠간 하르만 고급 여관의 푹신한 침대에서 자다가 맨 바닥에서 자게 되었으니, 몸이 피곤한 것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마차의 문을 닫고 마부석에 올라탔다.
“읏차…!”
“오스틴. 준비는 다 되었나?”
“응. 대충 다 탄 것 같아. 누구 한 명이 안 탄 것 같긴 한…. 잠깐만.”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아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던 그레이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 넌 뭘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있냐?”
어쩐지 누구 하나가 없는 것 같더라니, 그레이시가 마부석 옆자리에 타 있었다.
“내가 앉으면 안 되는 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원래 로빈이 앉기로 하지 않았냐?”
“저런 상태인데, 마부석에 탔다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레이시의 손가락을 따라 마부석 창문으로 마차 안을 들여다보니, 마차 바닥에 드러누운 채 쩝쩝 입맛을 다시는 로빈이 눈에 들어왔다.
“…쯧. 그렇네.”
“걱정하지 마라, 오스틴. 나는 이제 달라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말이다.”
기다란 고삐를 찰싹 내리 치니, 마차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고삐를 잡고 속도를 조절하며, 그레이시에게 물었다.
“오호. 달라지다니, 어떻게?”
“어제 곰곰이 생각해 봤다만, 예전의 나는…. 오스틴, 네게 너무 차갑게 굴었던 것 같다.”
“오. 알긴 아네? 그래서?”
“크흠…. 비록 내가 오스틴을 못 알아보긴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노력하면 나도 기회가 있겠다 싶더군.”
“기회라….”
무슨 기회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달라지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열심히 해. 응원할게.”
“으, 응원…. 역시, 아직 나에게도 기회가….”
그렇게, 짧은 대화가 끝났다. 길을 따라 마차를 모니, 오른편에 자리한 숲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이라 그리 덥지도 않고, 바람도 선선하니 딱 쾌적한 날씨였다.
오늘 내로 메텔하임에 도착할 것 같으니, 성문이 닫히기 전에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겠다. 나는 고삐를 재차 내리쳐, 마차의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수도 근처라서 그런지, 길은 대체로 고르게 잘 닦인 편이었다. 마차 바퀴의 천적인 조약돌이나 기타 방해물 같은 것도 없다 보니, 이대로 별 문제만 없다면 예비 바퀴를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조용히 마차를 몰고 있으니 꽤나 심심하고 적적해졌다. 나는 눈동자를 힐끔 굴려 옆자리를 흘겨보았다.
그레이시는 책을 꺼내어 읽고 있었다. 꽤 가까이에서 집중하며 보고 있었기에, 표지를 보고 무슨 책인지 가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마물을 상정한 야전 교범. / 저자 베넷 볼드윈 ]
“…….”
베넷 볼드윈. 볼드윈 후작. 내가 알기로는 그 양반은 이미 은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 전직 왕실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던가.
왕실 기사단, 공식 명칭은 메텔 왕국 왕실 직속 기사단. 메텔 왕국의 기사단이 왕실 기사단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따로 구분하고자 왕실 기사단이라고 불린다.
그레이시가 속한 왕실 근위대와는 조금 다른 역할을 맡고 있긴 하지만, 그레이시 역시 근간은 기사이다 보니 왕실 기사단의 야전 교범 정도는 읽을 수 있겠지.
“재밌냐?”
“음? 이것 말인가?”
“그럼 그거지 뭐겠어. 나 심심해 죽겠으니까, 책만 읽지 말고 말동무 좀 해줘.”
“그, 그래도 괜찮나…?”
그레이시는, 어쩐지 조금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우리가 아무리 싸웠기로서니, 내가 그렇게 뒤끝이 심하지는 않은데.
“안 될 거 없지. 그냥 예전처럼 대하면 되잖아. 나 그렇게 쫌생이 아니야.”
“흐흠. 그, 그럼…. 알겠다. 유의하겠다.”
어색한 대답 이후, 다시 정적.
기껏 얘기 좀 나누자고 말을 붙였더니, 도로 입을 꾹 다물고 앉았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오늘은 좀 일찍 일어났네? 안 피곤해?”
“괜찮다. 왕실 근위대의 근위대장으로서, 근위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이보다 더 일찍 일어나곤 했으니.”
“…아니,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레인저의 일과는 잘 모른다.”
“…….”
억지로 이어 붙인 대화는 그레이시의 파멸적인 소통 능력으로 다시 뚝 끊어져 버렸다. 그레이시가 원래 이렇게 센스가 없는 애가 아니었는데.
그레이시 역시 어색해진 분위기를 눈치챈 것인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랑 말하기 싫으면 그냥 책이나 봐. 나도 말 안 걸 테니까.”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야이씨. 그런 게 아니면, 대체 뭐 하자는….”
“히얏?!”
답답한 나머지 짜증을 부리며 고개를 휙 돌리니, 볼에 홍조를 띤 그레이시의 얼굴이 코끝이 살짝 스칠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나는 목각 인형처럼 목을 삐걱거리며 다시 원래대로 고개를 돌렸다.
“…….”
…더 어색해져 버렸다. 그냥 이대로 조용히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태연히 마차를 몰자, 그레이시가 기어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저… 조금 부끄러워서… 말이 잘 안 나오는 것뿐이다….”
“…부끄러워?”
“다, 당연히 부끄럽지 않겠나!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오스틴과 화해하고, 드디어 단 둘이 됐는데….”
그레이시는 부끄러운 듯, 그 이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레이시가 옛날 일을 잊은 것은 아니었구나.
“오늘 날씨 좋네.”
“…음. 화, 확실히….”
“하아…. 저기, 있잖아.”
“어, 어…?”
오른편에 자리한 숲에서 나뭇잎이 몇 장 떨어져 내림과 함께, 익숙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나는 허공에서 춤을 추는 나뭇잎 하나를 낚아채곤, 그레이시의 책 위에 올려 주었다.
매화나무 잎이었다.
“매화나무 아가씨. 너무 어색해하지 말고, 예전처럼 지냈으면 좋겠어.”
“…히끅.”
그레이시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딸꾹질을 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알겠지?”
“…응.”
어색함이 조금 풀린 분위기 속에서, 그렇게 마차를 몰았다.
* * * * *
“진짜 존나게 덥네. 미쳐버리겠다.”
점심을 먹고 난 뒤, 교대를 하자는 로이먼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과거의 나를 죽이고 싶었다. 모락모락 열이 올라오는 정수리는 이미 뜨겁게 달아 올라서, 생고기를 올리면 바로 육포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흐으으…. 너, 너무 덥다아….”
“후우…. 조금만 참아, 그레이시. 마야가 곧 시원하게 해 준다고 하니까.”
그레이시는 이미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어찌나 더운지, 그레이시의 새하얀 얼굴 위로 소금기가 하얗게 끼어 있었다.
간편하고 가벼운 가죽 경갑을 걸친 나도 더워 죽을 것 같은데, 무겁고 두꺼운 중갑을 걸친 그레이시는 말이 필요 없었다.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갑옷 속에 몸을 가두고 있으니, 아마 저 안은 말 그대로 푹푹 찌고 있지 않을까.
“내가 볼 땐 그 중갑이 문제인 것 같은데, 그레이시.”
“하, 하지만…. 유사시 상황을 대비해서, 갑옷은 항상 입고 있어야 한다….”
“네가 갑옷을 벗어도, 도적 따위가 너한테 생채기 하나 낼 수 있으면 다행이지. 그냥 벗어.”
“오스틴, 변태애…. 하지만, 오스틴이 그런 걸 원한다면….”
그레이시가 갑옷을 철컹 철컹 벗기 시작했다. 흉갑이 벗겨지니, 땀에 푹 절어 속옷까지 비치는 민소매 옷이 드러났다.
“이, 이런 게 좋은 거지…?”
“어, 음….”
어딘가 야릇한 땀냄새를 확 풍기는 그레이시에게서 시선을 떼며, 마부석 쪽에 난 창문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마야! 아직 멀었어? 그레이시가 슬슬 맛이 가기 시작했는데!”
“끄응…. 잠깐만 기다려…. 지팡이에 걸어 둔 휴대용 마법진이 다 떨어져서….”
마법은 이게 문제였다. 무영창 마법은 대마법사나 하는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니 그렇다 쳐도, 다른 마법사들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영창을 외워야 했다. 심지어는 영창을 짧게 줄이는 것이 마법사의 급을 정한다고들 하니까, 말 다했지 뭐.
바람 마법 분야에서 대가 마법사에 오른 마야라고 해도, 한 구절 정도는 영창을 해야 한다. 아니면 마법진을 그려서 마력을 불어넣거나.
마법진을 그리는 쪽이 압도적으로 마나 효율이 좋다 보니, 마야는 계속해서 바람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지팡이에 마법진을 그려 넣고 있었다.
“음…. 그렇게 덥나?”
“자네는 엘프잖나. 아드리엔….”
아드리엔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땀을 뻘뻘 흘리던 루나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흐으…. 저, 저 죽어요….”
“거의 다 됐어요, 공녀님. 여기서 이렇게 하면…. 됐다!”
마야의 지팡이가 마차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는 순간, 순식간에 더위가 확 달아날 정도로 시원해진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응기이잇….”
“끙…. 오스틴. 이상한 소리 내지 마라.”
그레이시는 시원해진 공기에 제법 정신을 차렸는지, 청결 마법진이 그려진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었다. 땀이 어느 정도 닦이니, 그레이시의 몸에서 상쾌한 향이 확 풍겨왔다.
“그것도 마야가 그려 준거지?”
“음. 그렇지. 마야는 유능하니까 말이다.”
“이래서 파티에는 마법사 하나는 있어야 돼. 삶의 질이 달라진다니까?”
더위도 몰아냈겠다. 나와 그레이시는 어색했던 아침과는 다르게, 언제 그랬냐는 듯 신나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 비석이다!”
“어, 어디요? 어디요?!”
메텔하임에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길쭉한 비석을 가리키자, 로빈과 이사벨이 마부석 창문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여정의 끝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절로 신이 난 나는, 고삐를 힘차게 내려쳐 마차의 속도를 높였다. 힘 좋게 땅을 박차고 달리는 흑마 두 마리 덕분에, 마차는 경사진 오르막 길임에도 불구하고 감속되지 않고 빠르게 언덕을 올랐다.
“어버버버…! 오, 오스틴! 조금만 천천히…!”
“이 언덕만 넘으면…!”
마침내 작은 언덕 위로 올라서자, 넓고 광활한 평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저 멀리 거대한 송곳 산맥이 눈에 보이고, 커다란 강줄기가 거대한 평야를 가로지르며 흐른다. 그 강을 끼고, 상업 도시인 하르만 보다도 훨씬 거대한 도시가 장엄하게 놓여 있다.
너무나 비옥하고 사람이 살기 좋은 나머지 신이 내린 땅이라는 말까지 듣는 기회의 땅 위에, 인간이라는 종족의 심장부가 뿌리를 내리고 세워져 있었다.
“와아….”
“저곳이, 메텔하임….”
마차 바깥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실비아와 루나 역시, 장엄한 메텔하임의 모습에 압도되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메텔 왕국의 수도, 메텔하임.
“드디어….”
길고 길었다. 여기까지 오겠다고 얼마나 갖은 고생을 했던가. 저 멀리 메텔하임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왕궁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참아낼 수 없었다.
“자, 가자!”
싱글벙글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고삐를 내리치자, 우리가 탄 마차가 힘차게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긴 여행이었다. 별 일이 없다면, 당분간은 정말 여관에 틀어 박혀서 쉬기만 할 생각이었다. 별 일이 없다면 말이다.
뭐, 별 일이 있겠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