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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83화 (83/106)

〈 83화 〉 82. 어디서 봤더라

* * *

나무 뒤편으로 뿌연 시야를 돌려보면, 그 웅장하기로 소문난 마왕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장엄한 도시가 시야에 꽉 들어찼다.

인간들이 세운 지상 최대의 도시이자, 인간이라는 종족의 중추를 담당하는 저 도시는 단지 크다. 라는 말 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문명.”

인간들이 세운 문명의 정수, 그 자체였다.

저 도시를 두 눈으로 목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르간은 인간들을 전선에서 밀어내기만 한다면 쉽사리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착각하고 있었군.’

비록 세세한 것들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흐릿했고, 색채 없이 잿빛으로만 보였기에 구분이 잘 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메텔하임 성벽의 윤곽선 만으로도 그 규모를 어림잡을 수 있었다.

우르간은 코를 킁킁 거리며 눈가리개를 다시금 덮었다. 도시의 외관을 구경하는 것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그런 우르간의 옆으로, 어느새 완벽하게 변장을 끝마친 애쉬가 다가왔다.

“흐응…. 예전보다 훨씬 커졌네?”

“애쉬. 일은 다 끝났나.”

“응. 아가토가 준비를 아주 잘해 줬던데?”

“내 신분은?”

“여기.”

옆에 서 있는 애쉬가, 팔을 뻗어 무언가를 내미는 것이 느껴졌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르간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곧장 애쉬의 손 위로 팔을 움직여 물건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물건을 붙잡고 더듬거려 보았다.

시각은 태어날 때부터 거의 포기한 채 살아왔다. 그 대신, 극도로 예민해진 기감과 손가락 끝의 촉감이, 손에 들린 물건이 무엇인지 가늠하게 해 주었다.

둥그런 외형. 마치 동전과 같지만, 동전보다는 훨씬 크다.

까끌까끌, 오돌토돌한 겉 표면. 규칙적인가? 아니. 불규칙적이군.

동전처럼 둥글고 얇은 금속 재질의 원판. 하지만 동전보다 더 크고, 어떠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우르간은 손가락을 더듬거려, 문양을 가늠해 보았다.

가로, 세로의 완벽한 비율로 맞물린 뾰족한 팔각형 문양. 코를 벌름거려 보았다. 금속 특유의 냄새. 재질은… 금이다.

‘…잠깐.’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빠르게 손가락 끝 털의 감각을 확장시켰다. 모험가 길드 공인… 금 등급 모험가, 시몬.

“시몬이라.”

당분간은, 우르간의 임시 껍데기가 되어 줄 신분이었다. 우르간은 시몬이라는 이름을 자신에게 투영하기 시작했다.

시몬. 맹인 라이칸슬로프 모험가. 수인들의 나라, 미도 연방의 보호구역에 살던 라이칸슬로프. 메텔 왕국의 사냥꾼들에게 야생의 라이칸슬로프로 오인받아 눈을 잃었다는 배경 설정.

나쁘지 않군. 실제로도 종종 있는 일이니까. 우르간은 이를 드러내며 피식 웃어 보이곤, 아가토가 마련해 준 금 등급 모험가 패를 조심스레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우르간을 빤히 바라보던 애쉬가 말했다.

“양손 도끼를 쓰는 전사들은 많으니까 괜찮지만, 네 무기는….”

“초승달 도끼다.”

“…아무튼. 그 도끼는 너무 눈에 띄니까, 일부러 평범한 양손 도끼로 구해왔어.”

애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르간의 두 손이 묵직해졌다. 손잡이는 붕대로 감싸져 있었기에, 조심스레 손을 올려 날 부분을 더듬어 보았다.

킁킁. 짙은 쇠 냄새. 마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평범한 강철? 아니. 아다만타이트인가.

아다만타이트는 단단하다. 강철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이며, 그 강도는 미스릴 합금에 비견될 정도이다. 다만 굉장히 무겁기에, 평범한 인간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우르간이 도끼를 몇 차례 만지작 거리고 있자, 애쉬가 미적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 그 정도면 충분해? 전에 쓰던 도끼보다는 별로인 것 같던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아가토가 꽤 신경써주었군.”

“신경 써 주긴, 무슨…. 아다만타이트만큼 시장에 남아도는 금속이 어디 있다고….”

“쓸 수 있는 이가 적어서 그런 것이지. 성능은 쓸만하다.”

“…그래. 쓰는 쪽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아, 맞다.”

도끼를 등에 매는 우르간의 목에, 차가운 금속질의 무언가가 휘감겼다. 우르간은 손을 움직여 목에 걸린 것을 만지작거렸다.

“환영의 목걸이라고, 걸고 있는 동안 외견을 바꿔 주는 목걸이야. 완전히 바꿀 수는 없지만… 간단한 것 정도는 바꿀 수 있거든. 털 색깔 정도는 바꿀 수 있을 거야.”

“고맙군.”

“고맙긴. 이것도 아가토가 구해준 건데.”

“그런데, 어떻게 사용하지?”

“네가 원하는 외견을 상상하면서, 마력을 불어넣어봐. 마력을 얼마나 불어넣느냐에 따라서 외견의 구현도가 달라진다던데….”

“…흠.”

우르간의 몸이 잠시 일렁이더니, 윤기 나는 잿빛이었던 털이 새하얀 색으로 바뀌었다. 눈가에 난 흉터 역시 가려진 모습에, 애쉬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우르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하. 예전에 딱 너처럼 생긴 똥개를 본 적이 있는데.”

“…나는 똥개가 아니라 라이칸슬로프다. 애쉬.”

“뭐, 그래도 꽤 귀엽게 바뀌었네.”

“조금 친근한 모습으로 바꾸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이다.”

“그 말투도 좀 바꾸면 딱 좋을 텐데…. 뭐. 일단 이 정도만 해도, 네 정체가 들통나는 일은 없겠다.”

“애쉬. 네 변장도 문제없는 것이겠지?”

“그럼. 딱 돈 많은 귀족 가문의 마법사 영애로 변장했어. 아마 너도 보면 깜짝 놀랄걸?”

“내 눈으로 보지 못해 아쉽군.”

“그럼. 아쉬워해야지.”

“임무는 숙지했겠지?”

“그래. 하아…. 이번 임무, 솔직히 마음에는 안 들지만…. 나도 조금 궁금했거든.”

“그래.”

저 멀리 도시가 자리했던 방향을 바라보며, 우르간이 말을 이었다.

“전선이 유지되면 좋겠군.”

“왕재수가 우리 대신 갔다고 하니까, 아마 문제없을 걸?”

“몬타라면 문제없겠지.”

한동안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던 둘은, 이윽고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 *

“어으어….”

지루해. 너무 지루해. 심심해 죽어.

성문 앞에 늘어져 있던 긴 줄에 선지 벌씨 세 시간째. 나는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이래서야,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입성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아니!!! 세 번 연속으로 고룡이 뜨는 게 말이 되냐고!!!!!!”

“어…. 이, 이상한 거야?”

“당연히 이상하지! 너, 대체 어떻게 돼 먹은 운이야!”

“아니, 나는 그냥 규칙대로 했을 뿐인데….”

“크아아악!!!!!! 한 판 더해!!!”

마차 뒤편에서, 하르만에서 샀던 카드 게임을 즐기는 용사와 실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드 게임을 해 봤자 전부 실비아가 이겨 버리니,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금방 질려 버렸다. 오직 용사만 혼자 투지가 불타올라 몇 번이고 실비아에게 도전하고 있었다.

“하아…. 로이먼. 뭐 재미있는 이야기 없어?”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하신다면, 딱 맞는 이야기가 있지요. 제가 정기 마물 토벌전에 참가했던 시절에….”

“…아냐. 됐다. 내가 미안해.”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니, 뿌드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랫동안 마부석에 한 자세로 앉아 있어서 그런 걸까.

‘내려서 몸이라도 좀 풀어야겠다.’

나는 삐그덕거리는 몸을 이끌고 마부석에서 내려왔다. 땅에 발을 디디니, 공기부터 달라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으그그극…! 크으윽…! 어후… 진짜 엄청 뻐근한데….”

몸을 푼 뒤, 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살펴보았다. 점심 시간대는 진작에 지났고, 시침은 오후 3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성문에서부터 길게 늘어선 줄을 슬쩍 보았다. 대충 반 정도가 줄어든 것 같은데.

이대로라면, 아슬아슬하게 성문이 닫히기 전에 입성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밖에서 노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큰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게 마차에 기대어 몸을 풀고 있으려니, 누군가 우리 마차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저기….”

“예?”

묵직하고 낮은 음성에, 나도 모르게 조금 경계하며 몸을 돌렸다.

이상한 눈가리개 비슷한 것으로 눈을 가린, 새하얀 털이 인상적인 라이칸슬로프와, 어디 귀족가의 3녀 정도 되어 보이는 마법사 여식 한 명이 우리 마차에 다가와 있었다.

그나저나, 마법사 쪽이 참… 아름다우시네. 어디서 많이 뵌 것 같은데…?

내가 마법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내 시선을 눈치챈 마법사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어머.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뇨. 아닙니다. 어디서 많아 뵌 분 같아 보여서요.”

기분 탓인가?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또 미묘하게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무튼,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경계를 슬쩍 풀고 묻자, 맹인으로 보이는 라이칸슬로프가 코를 벌름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금 등급 모험가, 시몬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조이라고 해요~. 저도 금 등급 모험가랍니다~.”

“크흠…. 여하튼, 저희가 메텔하임에는 초행길이어서 말입니다. 실례지만, 입성할 때까지만 동행해도 괜찮을는지요?”

“음…. 그게….”

분명히, 외관상으로는 딱히 문제가 없는 이들이었다. 라이칸슬로프는 조금 보기 힘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정도는 아니니까. 수인 왕국에 사는 라이칸슬로프들이 모험가를 하기 위해 올라오는 경우도 왕왕 있다.

“죄송하지만, 제가 일행이 있어서요. 잠시 의견을 물어보고 와도 될까요?”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딱히 적개심은 느껴지지 않았고, 저쪽도 예의를 차리고 정중히 나왔기에 나도 정중히 대해 주었다.

내 말을 듣고, 마법사 영애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 그럼요. 저희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럼, 잠시….”

나는 빠른 걸음으로 마차로 돌아와 일행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다들 내 이야기를 듣곤,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곤란하신 분들 같은데, 도와 드리죠.”

“그래요. 이제 나쁜 일은 그만하고, 선한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이사벨과 알렉시스 공녀의 뜻이 통했다. 하긴. 우리가 지금까지 마차도 털고, 환전소도 털고….

…이거 완전 악질 범죄자였네.

모두에게서 동의를 받아내고, 나는 다시금 마차 바깥으로 나와 아직까지 나를 기다리는 둘을 향해 다가갔다.

“다들 괜찮답니다. 함께 움직이시죠.”

내 말을 기다려 왔다는 듯, 마법사 영애가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해 주었다.

“정말 감사해요…. 부끄럽지만, 저도 수도는 초행길인지라….”

“아, 아뇨. 뭘요.”

마법사 아가씨가 정말 참하네. 딱 우리 엄마가 좋아할 만한 며느리 감이다.

저 생글생글한 미소 하며,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예쁜 얼굴 하며….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둘을 우리 마차 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마침 심심했는데, 말동무가 되어 주면 딱일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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