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84화 (84/106)

〈 84화 〉 83. 위화감

* * *

초저녁이 될 무렵, 우리는 드디어 기나긴 검문소를 통과하고 메텔하임에 입성할 수 있었다.

“스읍… 하아….”

이 낯익은 메텔하임 특유의 향기. 예전 그대로구만.

전 대륙을 상대로 펼쳐지는 마왕군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이곳 메텔하임은 예전과 딱히 다른 점 없이 활기찼다. 저녁 시간대가 되니 슬슬 불이 들어오는 마력 조명과, 저 멀리 보이는 웅장한 대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마치 고향집에 들어온 것처럼 익숙하고 정겨웠다.

마차를 천천히 몰아 큰 대로로 나가니, 곳곳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밀가루 포대를 나르는 남자. 순찰을 도는 수비대 병사들. 장난스럽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작업복을 걸친 채, 주괴가 잔뜩 실린 수레를 끌고 대장간으로 들어가는 드워프. 모그단이 생각나는걸.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어딘가로 향하는 아카데미 생도들도 눈에 들어왔다. 아마 기숙사로 향하는 것일 테지.

아, 그러고 보니….

“알렉시스 공녀님.”

마부석 옆자리에 탄 알렉시스 공녀를 향해 말을 걸자, 내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알렉시스 공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네? 무슨 일이시죠?”

“그러고 보니, 공녀님께서는 슬슬 본가로 돌아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카데미 방학도 곧 끝나가고, 졸업식이 코앞이실 텐데 말입니다.”

“아…. 그렇죠. 본가…. 아카데미….”

아카데미를 되뇌이는 알렉시스 공녀의 표정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아카데미에서 왕따라도 당하시나?

‘에이, 설마.’

공작가의 장녀를 따돌리는 간 큰 놈이 있을까.

아니지. 온갖 미친놈들이 판을 치는 세상인데, 알렉시스 공녀를 아니꼽게 보는 이들이 없을 거라는 보장은 또 없지.

만약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이라면, 내가 직접 아카데미를 찾아가서 깽판을 치리라. 그리 다짐하며, 알렉시스 공녀를 향해 재차 물었다.

“혹시, 아카데미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이번에 가문으로 돌아가게 되면, 아마 졸업까지는 오스틴과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아하. 어쩐지 조금 시무룩해 있더라니, 그것 때문이었구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채 시무룩해 있는 알렉시스 공녀의 모습이 퍽 귀여웠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들어 올렸다가, 허공에서 멈칫했다.

다른 데서는 몰라도, 이렇게 수도 한복판에서 공작가 영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는 알렉시스 공작이 얼마나 딸바보인지 잘 알고 있다. 혹시라도 알렉시스 공녀가 외간 남자에게 쓰다듬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간, 그 미친 딸바보 콧수염 아저씨가 칼을 뽑아 들고 나를 베어 버리려 들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며 다시 손을 내리려는 순간, 알렉시스 공녀가 내 손을 낚아채곤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저기, 공녀님…?”

“괜찮으니까, 어서요.”

알렉시스 공녀는 그리 말하더니, 내 손에 머리를 비비적대기 시작했다. 나는 엉겁결에 알렉시스 공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 어때요?”

“엄청나게… 부드럽네요.”

“에헤헤…. 고마워요.”

그렇게 쓰다듬으며 마차를 몰기를 수 분, 헤실헤실 풀어졌던 알렉시스 공녀의 표정이 어느새 다시금 시무룩해졌다.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당분간 못 받겠죠….”

“그래도, 저희는 당분간 수도에 머무를 생각이니까요. 가끔씩 시간 날 때 만나면 되죠.”

“졸업 시험을 봐야 해서, 아마 많이 바쁠 거예요….”

“…아.”

쯧. 이건 생각지도 못한 복병인데.

알렉시스 공녀는, 우리 파티의 유일한 탱커라는 점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였다. 어차피 당분간은 수도에 죽치고 눌러앉아 있을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당분간 떨어져야 한다니 내심 섭섭하다.

나는, 여전히 시무룩해 있는 알렉시스 공녀의 볼을 콕 찌르며 말했다.

“너무 시무룩해하지 마세요. 저희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 그렇죠…. 미안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간간히 제가 찾아가도 될까요?”

알렉시스 공작과는 나름 연줄이 있으니까, 아마 본가에 찾아가도 푸대접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알렉시스 공녀가 대번에 눈을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 물론이죠! 매일 와도 좋아요!”

“아뇨. 아무리 그래도 매일은 조금….”

“…저는 오스틴을 매일 보고 싶은데, 오스틴은 그렇지 않나 보네요?”

“아니, 그게 왜 그렇게…”

여관이 줄지어 들어선 거리에 도착할 때까지, 나와 알렉시스 공녀의 대화는 길게 이어졌다.

이제 곧 만나기 힘들어질 테니, 지금이라도 많이 대화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 *

우리들 중 가장 수도 지리에 밝은 로빈의 추천에 따라, 우리는 어느 고급진 여관 앞에 도착했다. 나는 곧장 마차를 몰아, 여관 뒤편에 자리한 마구간에 말들을 묶고 마차를 주차했다.

일행들을 먼저 들여보내어 방을 잡도록 하고, 나와 실비아는 마차에서 짐을 빼내었다.

그때, 우리 마차의 뒤편에 조용히 앉아 있던 시몬과 조이가, 무사히 여관이 있는 거리까지 들어왔으니 이만 헤어지겠다며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 왔다.

“그르릉….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세 졌습니다.”

“고마웠어요. 잘생긴 오라버니.”

잘생긴 오라버니라. 저거 나 말하는 거 맞지?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예. 별거 아닙니다. 저희도 즐거웠습니다. 그럼….”

싱긋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넨 조이와 시몬은, 이윽고 발걸음을 돌려 우리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대체 뭐지.”

분명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왜 이렇게 위화감이 드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누구랑 미묘하게 닮은 것 같았는데….

“…에이씨. 몰라.”

그냥 어디선가 만났나 보지, 뭐. 계속 생각해 봤자 머리만 아파 오니, 그러려니 해야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휘젓고 여관으로 들어가려 하던 찰나, 나와 함께 그 둘을 배웅해 주던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닌가…? 음…. 하지만, 분명….”

“뭐가 아니야?”

“아… 오스틴. 다른 게 아니라, 저 둘…. 분명 내가 아는 사람들이랑 닮은 것 같은데, 자세히 살펴보면 또 아닌 것 같아서….”

“너도 그러냐? 나도 그런데. 우연인가?”

“음….”

시몬과 조이가 모습을 감춘 골목길 방향을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단 실비아는, 이윽고 콧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좀 다르게 생기긴 했네. 내가 착각했나 봐.”

“참 이상하단 말이지.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이 그 말이야…. 아무튼, 이제 슬슬 들어가자. 오스틴.”

실비아와 함께 여관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려, 인파로 인해 북적거리는 대로를 쓱 훑어보았다.

“…기분 탓인가?”

분명 시선이 느껴졌는데.

“오스틴! 안 들어오고 뭐해!”

“…어! 금방 가!”

여관으로 들어가면서 다시금 대로변을 노려 보았으나, 더 이상 아무런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쓰읍…. 기분 탓인가 보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나도 꽤 피곤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할 일만 빨리 끝내고, 서둘러 자야겠다.

* * * * *

순간 오스틴과 눈이 마주칠 뻔한 조이는, 재빨리 벽 뒤로 몸을 숨기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아슬아슬했다.”

“들켰나?”

아직 익숙지 않다는 듯, 자신의 흰색 털을 더듬거리던 시몬이 넌지시 물었다.

“그건 아닌데, 순간 눈이 마주칠 뻔했어.”

“그게 누구지? 용사?”

“아니. 오스틴이라고, 용사 파티에서 척후를 맡은 애 있어.”

“오스틴이라…. 확실히, 전투 감각이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후…. 좋아.”

애쉬, 현재 조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양 뺨을 가볍게 두들기곤 뚜벅뚜벅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은 시몬이 한 발 늦게 움직이며, 그들은 자연스럽게 인파 속에 파묻혔다.

조이는 시선을 힐끔 돌려,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자신의 뒤를 잘 따라오고 있는 시몬을 향해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이번 임무는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해. 당분간은 이런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뜻이야.”

“음. 확실히 그렇겠군.”

“나는 인간들의 생활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별 문제는 없겠지만…. 너는 절대로 혼자서 돌아다니거나 하면 안 된다?”

“킁킁…. 알고 있다. 명심하지.”

그리 대답하면서도, 이미 곳곳에서 피어나는 맛있는 냄새에 정신을 못 차리는 시몬의 모습이 퍽 볼만했다.

벌써 침이 뚝뚝 흐르는 시몬을 보며, 조이는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으휴…. 말이나 못 하면. 자, 가자. 우리도 슬슬 여관을 잡아야지.”

“애ㅅ…. 아니, 그… 조이.”

“하아…. 왜?”

조이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자, 시몬이 혀를 빼물고 헥헥거리며 맛있는 냄새가 나는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저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

“…뭐?”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자극적인 색감의 양념을 잔뜩 바른 고기를 파는 가판대가 눈에 들어왔다. 시몬은 이미 침을 질질 흘리며, 가판대에서 시선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아주 뚫어지겠다. 눈도 잘 안 보이면서, 뭘 그리 쳐다보고 있어?”

“아니, 아니다…. 냄새로 알 수 있다…. 킁킁…. 저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아주 극상의 냄새가 나고 있다…!”

“아휴…. 내가 못살아 진짜….”

조이는 한숨을 내뱉으며, 가방에 담긴 작은 주머니를 꺼내었다. 끈을 풀어 헤치니, 주머니가 터질 것처럼 꽉 들어찬 금화가 눈에 들어왔다.

아가토가 임무에 필요한 돈을 넉넉하게 주었기에 망정이지, 돈이 없었으면 아마 얄짤 없었을 것이다.

“그래, 가자…. 내가 하나 사 줄게….”

“그르르르릉…. 킁킁…. 어, 어서 가자고…!”

기껏 수도에 왔으니, 조사도 할 겸 도서관에 들어가 보려 했건만. 본격적인 임무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마 이 똥개에게 계속 휘둘려 다니지 않을까.

벌써부터 예상되는 앞날에, 조이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 * *

1